- 홍익대의 감춰진 역사, 끝나지 않은 논쟁 ☞'단군 이념'으로 건립된 홍대, 박정희 흉상 바친 이유? <上> |
1999년 초가을, 당시 25살이던 김승구(당시 홍익대 기계공학과 3학년)는 "이상한 자료가 있다"며 흥분한 후배들로부터 한 묶음의 서류뭉치를 받았다. 후배들은 김지하의 강연장을 찾아가다 만난 사람으로부터 '내가 홍익대 설립자 집안의 사람이다. 학교의 역사가 왜곡됐다'는 주장을 들었노라고 했다.
이준혁(1963년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은 일제 시절 군산의 경성고무사에서 일했던 이흥수(1896~1973)의 손자였다. 이흥수는 아들 셋을 낳았는데, 막내는 홍익대학 설립자유족회를 이끌고 '홍익사랑' 홈페이지(현재 자유게시판은 폐쇄)를 관리했던 이용석(지난해 3월 사망)이다. 이준혁은 이용석의 조카로, 그 집안 장손이다.
이준혁이 준 서류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홍익대는 일제 치하 항일 독립투쟁의 중심에 있었던 대종교 인사들이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 이념을 바탕으로 1947년 설립한 학교다. 군산의 기업가 이흥수가 사재 16억 환을 털어 홍익대를 세우고, 초대 설립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 시절 재단 이사장이 바뀌었고, 그 후 군부 독재를 거치며 학교의 주인은 학교 역사를 왜곡하고, 학교 재산을 팔아치웠다.
김승구로서는 생전 처음 듣는 얘기였다. 당시만 해도 학교 설립자는 이도영(1913~1973)이며, 학교의 역사는 1946년 비인가 학교였던 홍문대학관으로부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준혁의 말이 사실이라면, 학교의 진짜 설립자가 완전히 가려져 있었던 셈이다.
흥미를 느낀 김승구는 관련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그는 학생 총 대의원회 의장에게 문제를 알아볼 것을 건의했다. 그리고 총 대의원회는 같은 해 11월 2일, '민족 홍대의 과거, 현재, 그리고 천년의 미래'라는 이름의 강연회를 열었다.
본격적으로 이상한 기운이 감지된 건 이 때부터였다. 학교는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다. 학생과 교직원, 교수 등이 김승구를 찾아와 "이걸 진행하지 마라" "외부 세력의 공격에 휘둘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무섭게 협박했다"고 김승구는 회고했다. 강연회 당일, 학생과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욕설이 오갔다. 우여곡절 끝에 세미나는 끝났으나, 공론화는 되지 못했다. 김승구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 사건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김승구는 과거 홍대 졸업생들을 찾기 시작했다. 동문회보에 남은 연락처로 닥치는 대로 연락을 취했다. 3회 졸업생 이덕성(사망)과 연결됐다. 그 해 초겨울, 안국동 예전다방에서 매월 세 번째 목요일 모임을 가지는 홍익대 1, 2, 3회 졸업생들의 모임 삼목회(문배회)를 찾았다. 이곳에서 알려져 있지 않던 역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승구와 홍익대의 7년여에 걸친 싸움이 시작된 순간이기도 했다.
▲홍익대 3기생들은 김구 선생이 서거한 후 그의 운구를 운반했다. 3기 졸업생들은 당시 정열모 선생이 피살 현장을 보여주며 학생들에게 "이 피살 현장을 잊지 않을 것"을 주문했다. ⓒ홍익대학 설립자 유족회 제공 |
"학생회의 배후를 조종했다"
김승구의 목소리에 모든 학생이 반응한 건 아니었다. 학생회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김승구의 주변에서 유일하게 관심을 보여준 이는 99년 미대 학생회장을 지냈고 2000년 초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섰던 이선효였다. 김승구는 자신이 그간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3월 14일, 온라인 게시판에 '총장님께 공개질의 드립니다'는 제목의 글을 올려 재단의 비리 의혹, 역사 왜곡 의혹 등을 제기했다. 그리고 다음 싸움을 학생회에 넘긴 후 미국으로 자원봉사 차 떠났다.
그 사이 이선효가 이끌던 학생회는 홍익대 재단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이해 4월 19일 <대한매일>은 관련 사태를 보도하기도 했다. 이로써 홍익대 재단과 설립자 재단 간 역사 싸움이 언론을 통해 공식적으로 알려졌다. 문제가 커졌다.
동문회도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 해 초부터 학교 역사 논란을 지켜보며 대응을 준비하던 홍익대학교 민주동문회는 7월 13일 시내 한 음식점에서 '모교 역사 바로세우기 실무팀'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이들은 이 해 11월, 문래공원에 세워진 박정희 동상 철거에 나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 동상은 홍익대가 군부에 바친 선물이었다. 이어 이들은 정기용을 위원장으로 홍대역사바로세우기 대책위원회를 같은 달 정식 발족했다.
김승구는 이 해 9월 귀국했다. 학생회는 학교와의 싸움에서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김승구도 이 사건을 어느 정도 잊고 있었다. 다시 이들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건 이 해 가을. 당시 부총학생회장 이미경과의 약속 자리에 이용석이란 사람이 나타났다. 이흥수의 아들이었고, 이준혁의 작은아버지었다.
홍익대 건축과를 졸업했던 이용석은 오랜 싸움에 지쳐있던 상태였다. 이미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던 상황이었다. 이용석은 누구도 믿지 않았다. 김승구는 이용석이 첫 만남에서 자신을 경계하는 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당시 만남은 만남일 뿐이었다. 달라진 건 없었다.
김승구가 다시 홍익대 역사 논쟁에 휘말린 건 학교 측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그해 12월, 학교 기획실에서 근무하던 정모 과장이 김승구를 찾았다. 김승구는 "마치 나의 동향을 파악하는 듯한 질문만 했다"고 말했다. 학교 측은 김승구가 나서도록 그의 뒤에서 구 재단(이흥수 일가)이 사주했고, 김승구가 학생회를 조종한 것으로 파악했다.
주변에선 모두가 말렸다. 당시 학교에서 조교로 일하던 한 선배로부터는 "학교가 모든 (법률적) 준비를 끝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학교와 싸워선 안 된다는 얘기였다.
학교와 싸우다
김승구는 "이 사태에 뛰어든 건 정의감 따위가 아니었다. 단순히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학교의 반응, 선배의 그 말 한 마디 때문에 '끝장을 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김승구는 학교의 강경한 대응에서 "재단이 교육자가 아니라 악한 장사꾼"과 같음을 느꼈다. 재단이 특별한 돈을 출연하지 않기 때문에, 학교는 학생의 등록금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이는 국내 대부분 사학에서 공통된 현상이다. 학생은 그만큼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학교는 '역사를 알고 싶다'는 학생의 요구에 위협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승구는 혼자 정면으로 학교와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당시만 해도 학교는 학생회에 예결산서를 제출했었다. 김승구는 1998년 학교 예결산자료를 찾아냈다. 홀로 예결산서를 보고 확인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상한 거래 한 건이 포착됐다. 처음 들어보는 지역의 땅을 학교가 비싼 돈을 주고 매입한 것이다. 김승구는 매 주말마다 화성군, 연남동 등을 돌아다니며 학교가 매입한 땅의 등기를 모두 직접 확인했다. 김승구의 이 작업을 통해 홍익대 재단이 경성고등학교를 합병하는 과정에서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으로 그 학교 땅과 건물을 매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실은 MBC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 사이 학생들의 투쟁은 서서히 성과를 맺기 시작했다. 뒷 이야기지만, 사학법 제정 여부를 둘러싸고 여야가 한창 다투던 2005년 당시 EBS가 홍대의 역사를 조명한 다큐멘터리를 방송해 반향을 낳기도 했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옛 동문들, 동창회 관계자들의 그간 노력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한편 김승구는 2001년 4월, 이면영 이사장을 비롯한 재단 이사진을 업무상 배임, 학습권 침해 등의 혐의로 서울서부지검에 고소했다.
학교는 7월 상벌위원회를 열었다. 그리고 두 차례의 상벌위원회 결과 김승구는 제적 처리됐다. 상벌위원회 직후 김승구는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당했고, 이해 11월 유족회의 이준혁과 함께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아 법정 구속됐다.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된 사례는 드물다. 김승구는 "학교가 날 제적하고, 법적으로 대응할 거란 생각은 이전부터 하고 있었다"며 "(학교를 상대로 제기한) 고소만 취하하라는 압박이 주변 곳곳에서 전해졌다"고 말했다. 김승구는 굴하지 않았기에 교도소로 갔다.
싸움의 끝, 새로운 싸움
▲김승구 씨. 김 씨의 삶은 우연히 휘말린 학교 역사 논쟁으로 크게 바뀐다. ⓒ프레시안(이대희) |
그 사이 학교 측과 유족 측, 김승구는 치열한 사실 관계 다툼을 벌였다. 동문회도 양 측의 주장을 끊임없이 저울질하고,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2005년 6월 23일, 2심에서 법정은 원심을 파기하고 피고인들의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학교 측은 이도영이 10억 환의 재산을 실제로 기부했다고 주장했으나, 2심 법원은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또 이면영 이사장을 이도영의 가까운 친척(6촌)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고, 학교 측의 토지 거래 내용이 통상적인 수준을 넘어섰다는 점도 인정했다. 이어 2007년 9월 7일, 대법원도 최종적으로 유족과 김승구의 손을 들어줬다.
긴 싸움 끝에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 받았으나, 김승구는 그 대가로 대학 졸업장을 잃어버렸다. 현재 김승구는 지인이 운영하는 인테리어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새로운 점포가 들어오면 옛 점포의 인테리어를 부수고, 새 점포 내부를 단장하는 일이다. 일이 비정기적인 까닭에 인터뷰 시간을 잡기도 쉽지 않았다. 그는 "고소를 당하면, 개인은 무조건 힘 있는 기관에 지게 돼 있다. 법정 결과와 상관없이, 긴 시간 지속되는 싸움으로 개인의 삶이 망가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승구는 여전히 밝게 지낸다. 7일 밤 9시, 김승구는 회기동의 한 분식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으며 "이 사건에서 얻은 게 많다"고 말했다. 자신이 희생양으로 비치는 것도 싫다고 했다. 그는 학교 측과 법정 싸움을 시작할 당시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운 스스로의 선택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김승구는 "내가 무너지는 건 그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일"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은 이제 삼십대 후반의 생활인 김승구에게 과거의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다.
홍대의 역사 논란은 한동안 잊혀졌다 최민희 민주통합당 의원실을 통해 수년 만에 다시금 세상에 알려졌다. 이준혁은 "민족 교육을 위해 세워진 학교의 역사가 현대사에 휩쓸려 비틀린 사실을 더 많이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홍익대 재단 "이도영은 홍대 강탈하지 않았다"
장기간의 다툼까지 갔던 역사 논란에 대해 학교 측 관계자는 "유족 측의 주장이 왜곡됐다"고 반박했다. 학교 측 주장은 과거 EBS 다큐멘터리에서 보다 상세히 나온다. 당시 홍대 기록보존소 소장을 맡았던 김형욱 교수는 "학교란에서 몇 년 동안 이흥수 이사장 이름이 누락된 적이 있다. 기록관리의 소홀함으로 생각하고, 상당히 유감이다. 그 이후 바로 복원했다"고 밝혔다. 다만 학교는 여전히 1946년을 학교의 출발로 공식 기록하고 있다. 이흥수의 이름은 홈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없고, 다만 '대종교 인사'들이 참여했던 사실만을 간략히 적시하고 있다.
논란이 커지자, 홍익대 재단이 교육과학기술부에 직접 관련 사태를 해명하기도 했다. 최민희 의원실이 교과부로부터 받은 해명자료를 보면, 홍익대 재단은 "1956년 당시 학교 자산은 7521만 환에 불과했고, 사채 3000만 환으로 인해 폐교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며 "이흥수 전 이사장은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1956년 5월 이도영을 이사장으로 영입했다"고 밝혔다.
"이도영이 홍익대를 강탈했다"는 유족 측의 주장과 전혀 다르다. 그리고 1956년 3월 27일자 <홍대신문>에 실린 김현묵 당시 학교 사무총장의 기고 내용과도 다르다. 당시 김 사무총장은 숱한 학교의 재산을 나열하고 있다.
나아가 홍익대 재단은 "이도영 전 이사장은 정규대학 인가에 필요한 6억 환을 초과하는 10억 환의 재산을 기부하여 홍익대학이 정규대학으로 인가를 받을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도영이 10억 환의 재산을 출연하지 않았다는 주장 역시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다.
재단은 이도영이 5.16 군부 쿠데타의 후원으로 학교를 장악했다는 의견 역시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재단이 5.16 쿠데타를 '혁명'으로 표현했으므로, 이 표현을 그대로 빌려 쓴다. 재단은 "이도영의 차남 이석훈은 5.16 혁명 당시 15세의 중학생이었다"며 "이석훈이 육인수의 딸과 결혼한 것은 5.16 혁명이 발생한지 11년, 그리고 이도영이 홍익학원 이사장으로 재취임한지 9년이나 지난 1972년의 일이다. 그러므로 이도영 전 이사장이 5.16 쿠데타 세력의 후원으로 홍익학원 재단을 장악하였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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