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과정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의 관계로 인해 다시금 조명되기 시작한 홍익대의 역사는 여러 의미에서 되돌아봄 직하다. (☞박정희 정권 강탈재산 환수 논의 : 민속촌과 홍익대, 정수장학회, 설악케이블카의 공통점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학교 설립에 큰 역할을 했고, 그 후 빨갱이 논란에 상처받았으며, 5.16 쿠데타 군부에 의해 학교가 무너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비리 혐의로 논란을 빚은 재단이 뉴스를 장식했으며,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이 생존권을 걸고 투쟁을 벌인 학교이기도 하다.
홍익대의 오늘을 말하는 상징적 열쇠가 이 학교 연혁에 숨어 있다.
"본교는 1946년 4월 25일 재단법인 홍문대학관을 설립하고, 6월 27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 31번지 소재 흥국사에서 개교하여, 동년 9월 22일에는 문과 및 법과 131명의 입학식을 거행하였다. (중략) 1947년- 운영난으로 '홍문대학관 관무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운영진을 대종교 관계인사들로 새로이 영입, 교명을 '홍익대학'으로 변경."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공식적으로 이 학교 역사에 '대종교 관계 인사'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 모든 역사의 시작은 해방 전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6년 귀국 후 대종교 지도자들이 서울시 중구 저동2가 7번지에서 찍은 기념사진. 이들은 1947년 원로회의에서 민족사학을 설립키로 했다. 오른쪽 상단 이흥수는 이 학교 초대 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홍익대학 설립자 유족회 제공 |
잊힌 역사, 민족 사학 홍익대
홍익대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선 대종교의 성격부터 알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한국 국민이 중고교 시절 수업 시간에 간단히 듣고 넘어가는 이 종교는 1909년 나철에 의해 단군신앙을 중심으로 탄생했다.
이 종교는 항일 독립투쟁사에 굵직한 흔적을 남겼다. 장세윤 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은 "일제 치하 대종교와 관련된 인물, 단체들은 사실상 종교 또는 종교인, 종교조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독립운동을 위한 종교와 그 관련 조직으로 인식하는 편이 더 나을 정도"라고 평가했다.
나철, 김교헌, 윤세복을 비롯해 박은식, 김두봉, 김좌진, 박찬익, 서일, 신규식, 신백우, 신채호, 안희제, 이동녕, 이시영, 조성환, 조완구, 황학수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대종교와 관련된 인물이다.
1915년 조선총독부의 '종교통제안'으로 인한 탄압을 피해 1917년 중국 지린성(吉林省)으로 총본사를 이전했던 대종교 인사들은 광복 후인 1946년, 서울로 돌아왔다. 환국 직후 이들이 가장 먼저 추진한 행동은 민족 사학 설립이었다. 1947년 5월 원로회의에서 이들은 단군의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 이념을 바탕으로 재단법인 홍익학원과 홍익대학관을 설립하고 일제 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당대의 국어학자 정열모(1895~1968)를 학관장으로 선임했다.
곧이어 홍익학원은 1946년에 비인가 사설학교로 설립돼 분규를 치르고 있던 홍문대학관을 인수해 당시 대종교 본부였던 서울 중구 저동 2가 7번지 덕우사에서 첫 수업을 시작했다. 지금도 홍익대의 출발이 1946년이냐 1947년이냐를 두고 홍익대 측과 이흥수 유족 측이 다툼을 벌이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학교 측은 1946년을 홍익대의 출발로 보고 있다.
같은 해 7월, 종합대학으로 출발을 위해 홍익학원은 재단법인 홍익학원 설립준비위를 구성했다. 사재 1억 환을 기부한 이흥수(1896~1973)가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군산의 실업가로 알려져 있던 이흥수는 대종교 6대 총전교(總典敎, 교주)를 지냈던 인물이다.
이에 따라 1949년 6월 27일, 대한민국 정부 대학령 제1호 대학으로 홍익대는 4년제 홍익대학교로 인가받았다. 초대 이사장은 이흥수, 초대학장 정열모, 초대 재단 상무이사는 정일, 초대 사무처장은 김현묵이었다.
당시 재단의 재산은 상당했다. 강원도 홍천, 경기도 양평, 경기도 오산 등에 200여만 평의 토지를 갖고 있었다. 그 후에도 이흥수는 수년에 걸쳐 사재 15억 환에 이르는 자산을 학교에 더 투자했다. 서울시 남산동 교사, 서울시 누상동 교사, 서울시 문배동 교사, 서울시 마포구 염리동 대지 14000평, 서울시 마포구 상수동 교지 8만 평, 서울시 중구 주자동 홍익버스 운수주식회사, 전라북도 전주시 홍익고무공업사, 경기도 인천 교사경기도 부천 영종도 염전 24만 평, 경기도 수원군 대룡면 토지, 전라북도 정읍 금광 등이 모두 이 학교 재단 재산이었다.
학교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설립 당시 홍익대의 중심은 문과대였다. 국어학과와 국사학과가 이 학교의 자랑이었다. 당시 학교의 설립 목표는 "민족정체성의 기본인 국학분야 인재를 양성하고 애국심 투철한 민족지도자를 기른다"는 것이었다.
빨갱이 사냥
학교가 흔들리기 시작한 건 냉전이 찾아오면서부터였다. 홍익대의 중심인 민족주의 세력은 반공-공산주의 세력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특히 1949년 김구 암살사건이 일어나면서 학교는 파도에 휩쓸리기 시작한다. 이 사건은 남한 내에서 민족주의 세력이 냉전 구도 하에서 축출되기 시작했음을 상징했다. 이흥수의 손자 이준혁은 "전체민족진영에 대한 반민족세력의 쿠데타였다"고 강조했다.
김구의 운구를 홍익대 3기생들이 맡았던 사실은, 격랑에 휩쓸리는 한국사에 홍익대도 표류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김구 서거 후 홍익대는 그가 설립했던 건국실천양성소를 인수하기로 하고, 이렇게 인수된 건국실천양성소의 교사에 지금의 홍대를 대표하는 미술과가 설립됐다. 건국실천양성소는 총 12기까지의 졸업생을 배출했다고 알려져 있다.
1950년 1월, 보도연맹사건이 터졌다. 이사와 교수, 학생 54명이 철도경찰대, 헌병대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초대 학장 정열모는 빨갱이로 몰린 끝에 학장직에서 내려왔다. 곧이어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정열모를 비롯한 상당수 인물이 월북하거나 납북됐다. 남한에 남아있었다면 그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집단 학살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었다. 반공 성향이 얕았던 홍익대의 지도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정영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대종교의 민족주의적 지향은 서양문화에 기반을 두었고, 냉전의 지도자였던 이승만으로서는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다"며 "그것은 제3공화국의 박정희 정권에 와서도 바뀌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대신 이사직을 채운 건 검사였던 엄상섭 등이었다. 엄상섭은 조선총독부의 마지막 학무국장을 지낸 인물이다. 독립운동가가 창설한 학교에 친일파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내려가 1951년 첫 졸업생을 배출했던 홍익대는, 1954년 서울로 돌아와 이 해 12월 마포구 상수동 와우산에 본관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어려워진 재정 상황은 이 학교 미래에 암운을 드리웠다. 이 때, 재단을 찾은 이가 있었다. 1938년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해 1950년 자유당 국회의원을 지냈던 충청도 출신의 이도영(1913~1973)이었다. 이도영은 1956년, 자신의 재산 10억 환을 기부하는 조건으로 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흥수는 이사로 재단에 남았고, 나머지 설립이사들은 전부 사퇴했다.
동맹휴업, 그리고 5.16
▲이흥수 홍익대 재단 초대 이사장. ⓒ홍익대학 설립자 유족회 제공 |
새 희망이 온 건 1960년 발발한 4.19 민주화 혁명이었다. 오랜 투쟁 끝에 1961년 3월 10일, 이도영이 물러나고 총동창회와 학생, 교수들이 이흥수를 다시 재단 이사장으로 추대했다. 이도영은 이사로 물러났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바로 5.16 군부 쿠데타가 발발했다.
군부는 이듬해 2월 2일, 미술학부만 남기고 나머지 학과는 모두 폐교 처분했다. 이어 문교부장관 김상협은 1962년 5월 30일, 이흥수 이사장을 비롯한 재단 이사들의 임원 취임인가를 취소하고 최문환 관선이사장을 선임했다. 이 시기는 바로 정부가 부일장학회(정수장학회의 전신)를 강탈하던 때이기도 하다.
인가 취소 사유는 간단했다. 이도영이 10억 환의 재산을 출연했음에도 "이를 감독하지 못하였으며, 이로부터 목적 사업경영에 전혀 경비의 보조가 없이 학생공납금에만 의존경영"한다는 이유였다. 존재하지도 않은 돈을 관리하지 못했다는 논리다.
이 조치의 의미는 이듬해 1963년 1월 15일 드러났다. 관선이사회는 이도영을 다시금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시켰다. 이 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가 이도영의 종제로 알려진 이원영이다. 새 재단 이사로 들어온 이원영은 공화당 창설 당시 정책위 부의장이었고, 1967년에는 공화당 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원영은 일제 강점기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활동하던 당시 "고이소 구니아키 (당시 조선) 총독의 진보적인 통찰력과 확고, 불굴의 신념에 운명을 맡긴 조선은 행복하다"고 찬양하는 등의 행위가 후일 드러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에 포함된 인물이다. 이도영과 함께 재단에 들어온 당시 이사 중 적잖은 이가 친일 논란에 휩싸인 전력이 있다.
군부의 힘으로 학교의 운영권을 쥐게 된 이도영은 이후 박정희 일가와 단단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우선 홍익재단은 군부 쿠데타의 핵심이었던 김종필에게 제1호 명예박사학위를 줬다. 이도영의 둘째 아들로 역시 홍익재단 이사를 지낸 이석훈은 육인수(육영수의 오빠)의 딸 육해화와 결혼했다. 육인수 또한 홍익재단 이사를 지냈다. 1966년 홍익대는 쿠데타 세력의 발상이었던 서울 영등포구 문래공원에 박정희의 흉상을 제작해 바쳤다.
이후 이도영은 군부의 핵심 정치조직이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지내는 등 승승장구하다 1973년 사망했다. 이도영 사망 직전, 재단을 빼앗긴 후에도 계속 민족운동을 이어오던 이흥수도 같은 해 5월 30일, 서울 대방동 상이용사촌 골방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2대 이사장은 이도영의 부인 최애경이었다. 최애경도 설립재단이 마련해둔 재산을 속속 처분하자, 1994년 다시금 족벌재단 퇴진운동이 일어났다. 그런데 퇴진하는 최애경의 뒤를 이어 1997년 새 이사장으로 들어온 인물은, 이도영의 육촌동생 이면영이었다. 지금의 홍대는 이렇게 세워졌다.
역사가 바뀌었다
1968년에 나온 <홍익요람>에도 재단 이사장 이름에는 이흥수가 표기돼 있었다. 같은 해 열린 졸업식에서도 학교의 창립 연도는 1948년으로 기록돼 있었다. 1978년 발행된 교지에도 창설 30주년을 맞아 건립된 교시탑의 사진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도영과 이흥수가 사망한 후, 서서히 역사 지우기가 시작됐다. 1979년 발행된 자료에서 돌연 '설립자 이도영'이란 표현이 등장한다. 1983년엔 '도설 37년사'가 발행되는데, 여기서 갑자기 설립연도가 2년 앞당겨져 1946년으로 바뀐다. 홍문관 시절이 홍익대의 역사가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홍익대의 창설자는 홍문관을 시작한 양대연이 됐다. 그리고 역사는 건너뛰어, 이도영 이사장이 들어온 1956년이 이어진다. '도설 37년사' 편찬을 주도한 이가 현재 홍익대 이사장인 이면영이다.
뒤바뀐 것은 역사만이 아니다. '홍익인간' 이념을 담아 정열모가 직접 작사했던 교가는 관련 내용이 삭제된 다른 노래로 바뀌었다. 1956년 편찬된 <학교연감>에 실린 당시 교가는 "백두산 앞뒤뜰에 퍼진 겨레는/ 오천년 뿌리박은 깨끗한 핏줄/ 빚어낸 불함문화 아름다우니/ 이상은 홍익인간 그 아니큰가/ 여명의 대한 땅에 샛별과 같이/ 숙명적 홍익대학 나타났도다"라는 가사로 구성돼 있다. 이 자료에는 '설립자 이흥수'라는 이름이 선명히 박혀 있기도 하다.
이도영 일가가 오랜 기간 집권하면서 처분한 재산도 문제다. 이도영 일가는 1957년 홍익운수공사, 홍익고무공업, 서울시 남산동 교지와 교사를 처분한 이래 수년에 걸쳐 학교 재산을 속속 팔아치웠다. 재단이 학교에 돈을 댄 게 아니라, 학교 재산을 재단 재산으로 바꾼 것이다. 이 때문에 당초 교사가 들어설 예정이었던 용산구 문배동, 마포구 염리동, 마포구 창전동 등의 교지가 모두 사라졌다. 당초 홍익재단은 서울시 곳곳에 홍익대학 캠퍼스를 세울 목표를 지녔었다. 오랜 기간 이어진 재산 처분 때문에 애초 8만 평 규모였던 상수동 부지는 현재 3만여 평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뒤바뀐 역사는 홍익대 사태가 세상에 알려진 2000년 초반까지도 고스란히 유지됐다. 당시까지도 설립자는 이도영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후 학교 측은 "관리자의 '개인적 실수'로 역사가 누락됐다"고 언론에 해명했으나, 여전히 학교의 출발은 1946년 홍문대학관으로 공식 인정하고 있다. 또 이흥수의 이름은 여전히 홈페이지에선 찾을 수 없다.
그간 이흥수 유족의 목소리는 철저히 가려져 있었다. 현재 홍익대학설립자유족회를 이끄는 이준혁은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할아버지(이흥수)가 살아 계셨다. 집으로 항일투사들이 놀러와 함께 사진을 찍은 기억도 난다"며 "할아버지 사망 후 가세가 기울었다"고 전했다. 이준혁 일가는 날림공사의 대표 사례로 불린 서울 마포구 와우아파트의 단칸방에서 월세로 지냈다. 이준혁은 중학교 졸업 후 고교에 진학하지 못하다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합격했다.
그렇다면 이 역사는 어떤 과정을 거쳐 세상에 알려졌을까. 학교는 이 논란에 어떻게 대응했으며, 어떤 입장일까. 문제를 처음 제기한 이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하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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