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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혼의 141구' 김홍집의 1994년 한국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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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투혼의 141구' 김홍집의 1994년 한국시리즈

[배지헌의 그린라이트] 인천야구 에이스, 인천부평리틀 김홍집 감독 인터뷰

해마다 가을이 되면 야구팬들은 저마다의 기억 속 전설을 불러내어 이야기꽃을 피운다. 김유동의 만루홈런, 최동원의 한국시리즈 4승, 가을까치 김정수, 이종범의 한국시리즈 도루 신기록, 이승엽과 마해영의 백투백 홈런…. 그 중 대부분은 승자의 기억이다. 패자의 눈물이 전설로 남은 예는 흔치 않다. 1994년 한국시리즈 1차전 '141구 역투'의 주인공, 전 태평양 투수 김홍집을 제외하면 말이다.

"요즘에도 포스트시즌 때만 되면 다들 그 얘기를 하세요." 그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방송이나 신문에서도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고요. 솔직히 저한테는 곤욕이죠. 잊을 만 하면 어김없이 그 얘기가 나오니까요." 그날 김홍집은 '라이벌' LG 이상훈과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선발 맞대결을 벌였다. 팀으로서나 개인으로서나 물러설 수 없는 승부였다. "당시 LG만 만나면 저도 모르게 승부욕이 발동하곤 했어요. 게다가 같은 좌완에 데뷔도 함께 한 상훈이랑 붙게 되니까 더 이기고 싶더라고요."

이상훈과의 선발 대결은 김홍집의 승리였다. 이상훈이 7회를 넘기지 못하고 마운드에서 물러난 반면, 김홍집은 구석구석을 찌르는 컨트롤과 완급조절로 LG 타선을 농락하며 계속해서 마운드를 지켰다. 하지만 태평양 타선이 투수를 도와주지 못했다. 특히 8회에는 1사 만루의 결정적인 찬스를 잡았지만, 5번 김동기의 잘 맞은 타구가 병살타로 처리되는 불운이 따랐다. 결국 경기는 1대 1 동점인 가운데 연장전 승부로 접어들었다.

"9회 끝나고 내려왔는데 김시진 투수코치(전 넥센 감독)님이 '오늘만 할 거 아니니까 이제 바꾸자'고 하시더라고요. 평소 같으면 그냥 '내려와' 하셨을 텐데,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이상하게 미련이 남았어요. 그래서 '코치님 저도 지기 싫습니다. 던져서 이기고 싶습니다'하고 제 주장을 폈죠." 쉽게 꺾일 고집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옹고집', '똥고집'일 정도였다. 결국 투수코치의 우려를 뒤로 하고, 정동진 감독은 연장전에서도 김홍집을 계속 밀어붙였다. 훗날 정 감독은 "홍집이가 워낙 잘 던지고 있어서 바꾸기가 어려웠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만큼 그날 김홍집의 투구는 완벽했다. 140구째까지는.

통한의 141구째. "사실 볼을 던져야 하는 상황인데, 밋밋하게 스트라이크를 잡으려고 던진 공 하나가 경기를 끝내버렸죠. 공이 손에서 딱 떨어지는 순간에 '아차' 싶었어요." 연장 11회말, 1사후 대타로 나온 김선진의 좌월 홈런 한 방에 기나긴 1차전 승부가 끝이 났다. 그리고, 그 한 방에 사실상 그해 한국시리즈의 우승팀이 갈렸다. 태평양은 이후 내리 연패하며 한국시리즈 패권을 LG에 내줘야 했다. 인천 연고 프로팀의 첫 번째 우승 도전은, 그렇게 0대 4의 완패로 끝났다.

사람들은 그날 김홍집의 투구를 두고 '눈물의 141구'라 했다. 진상은 조금 다르다. "제가 원래 땀이 많아요. 안경도 쓰고 해서 습기가 차잖아요. 마운드 내려오면서 땀이 막 흘러내리는데, 그걸 닦는 모습을 두고 중계방송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고 표현하셨나봐요. 실은 저, 울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마지막까지 혼자 던진데 대한 후회는 없다. 하지만 아쉬움은 남는다고 했다. "그 경기만 이겼으면 태평양이 충분히 우승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랬다면 팀이나 제 운명도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지금까지도 계속 야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는 그날 자신이 던진 140구째까지만 기억하고 싶다고 했다. "많은 분들이 그렇게라도 지금까지 기억해 주시는 건 고맙죠.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잊고 싶어요 그날을. 아니, 그날의 마지막 공만 잊었으면 좋겠어요."

▲김홍집의 한국시리즈는 인천야구의 상징적 장면 중 하나다. ⓒKBS 화면 캡처

'좌완 3인방'의 당당한 일원

사실 김홍집은 단지 '141구'만으로 기억되기에는 아까운 투수였다. 고교 진학할 때부터 인천고와 동산고가 서로 김홍집을 데려가겠다고 나섰다. 스카우트 경쟁은 대학 진학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인하대와 단국대가 김홍집을 두고 경쟁했다. 결국 양교 감독이 인천고까지 찾아와 담판을 지은 끝에 단국대로 진로가 결정됐다. "사실 조건은 인하대가 더 좋았어요. 어려운 집안 형편 탓에 부모님은 장학금 등 조건이 좋은 인하대 쪽을 권유하셨죠. 한편 단국대에선 저 포함해서 팀 동료 네 명을 받아주는 조건을 내걸었구요. 결정을 도저히 못하겠어서 어머니께 맡기고 저는 도망을 갔는데, 저녁에 집에 돌아오니까 단국대로 결정했다고 하시더군요."

결과적으로는 잘한 결정이었다. 단국대 입학과 함께 김홍집의 야구가 본격적으로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단국대는 학교에 전용 운동장이 없는 형편이라 단체로 훈련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대신 개인 훈련들을 열심히 했죠. 선배들이나 누가 운동하러 나가면, 서로 경쟁적으로 개인운동을 하게 되더군요. 억지로 하는 운동이 아니라 자기가 필요해서 하는 운동이니까 능률적이었죠. 또 단체훈련도 시간이 딱 정해져 있으니까 그만큼 더 집중해서 해야만 했고요. 무엇보다 그 시절에는 마음속에 야구에 대한 갈망과 열정이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무대에서 김홍집의 주가를 드높인 것은 탁월한 제구력. 볼 스피드는 시속 140킬로미터(km/h)를 밑돌았지만, 스트라이크존 구석을 찌르는 날카로운 컨트롤로 타자들을 요리했다. 공 한두 개를 자유자재로 넣었다 뺐다 하는 김홍집의 투구를 두고 야구계에서는 "마치 일본 투수를 보는 것 같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대학 2학년 때 국가대표팀에 뽑힌 뒤부터 기량이 확 늘었어요. 한번 자신감이 생기니까 제가 원하는 곳에 공을 마음먹은 대로 던질 수 있었죠. 심판이 스트라이크를 잡아주면 거기서 공 하나를 더 빼고, 그걸 또 잡아주면 반개를 더 빼고. 볼인데 스트라이크 잡아준 게 굉장히 많았어요. 컨트롤 좋은 덕을 본거죠. 심판들도 제가 던지는 날은 판정하기 편했을 거예요. 투수 공이 제멋대로 들어오면 스트라이크 판정하기도 어렵거든요." 그래서 그가 피칭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도 '자신감'이다. "같은 140km/h를 던져도 자신감 있게 던진 공과 그렇지 않은 공은 공 끝의 힘이 달라요. 자신 있게 던진 공은 맞더라도 배트가 밀리거든요. 제구력도 결국은 자신감에서 나오는 거구요."

게다가 김홍집은 지금의 오승환 버금갈 정도의 포커페이스로 유명했다. 마운드에서 아무리 큰 위기가 와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사실은 징크스 때문이었다. "저는 항상 운동장 나가면 안 웃어요. 희안한 게 마운드에서 웃음을 보이면, 그날은 꼭 사정없이 난타를 당했어요. 웃으면 항상 졌어요. 물론 저 혼자 만든 징크스지만, 무시하자니 찜찜하잖아요. 그래서 마운드 올라가면 항상 무표정한 얼굴을 의식적으로 유지했죠. 누구는 화났냐고도 하고, 어떤 분들은 '저 선수는 속을 알 수가 없다'고 하시더군요." 나중에 프로에서 안경까지 쓰게 되면서, 김홍집은 냉정하고 두뇌회전이 빠른 투수의 이미지를 더욱 굳혔다.

대학 시절 김홍집은 이상훈, 구대성과 함께 '좌완 3인방'으로 불렸다. 특히 자신과 대조적으로 강속구에 거친 투구스타일을 지닌 이상훈에게는 묘한 라이벌 의식을 느꼈다. 이상훈만 만나면 투쟁심에 불이 붙었다. 밖에서는 친한 사이지만 경기장에서는 눈길 한번 주고받는 일이 없었다. 주위에서도 둘의 경쟁심을 부추겼다. 앞서간 건 이상훈. 고려대 입학 첫해부터 잠재력을 발휘하며 주목을 받았다. 그러다 2, 3학년이 돼서는 김홍집이 추월했다. 이상훈이 '빠삐용'이 되어 방황하는 사이, 김홍집은 아시아야구선수권과 올림픽 예선 국가대표에 발탁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4학년이 된 1992년. 딱 한 경기를 통해 야구계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이상훈을 향하게 된다. 4월 9일 열린 봄철연맹전 성균관대전에서 이상훈이 14타자 연속 탈삼진의 대기록을 달성한 것이다. "경기 초반만 보다가 중간에 숙소로 돌아간 뒤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어요. 저녁에 TV를 보는데, 온 매스컴이 완전히 난리가 났더라고요." 김홍집도 같은 해 30이닝 연속 탈삼진을 기록하며 역투했지만, 이상훈이 보여준 퍼포먼스가 워낙 압도적이었다. 단숨에 대학 최대어로 떠오른 이상훈은 그해 역대 신인 최고액인 계약금 1억8800만 원을 받고 LG 트윈스에 입단했다. 이상훈 이전까지 프로야구 신인이 억대 계약금을 받은 사례는 선동열, 박동희, 정민태 3명밖에 없었다. 이상훈의 계약 소식에 김홍집도 자극을 받았다. 이상훈과 비슷한 조건을 내걸고 구단과 줄다리기를 벌였다. 하지만 태평양 돌핀스가 LG와 똑같은 대우를 해주길 바라는 건 무리였다. 결국에는 1억 2000만 원에 도장을 찍고 태평양 유니폼을 입었다.

화려한 출발, 짧은 영광, 긴 터널

ⓒ김홍집
1993년 입단 첫해부터 김홍집은 태평양의 차세대 좌완 에이스로 기대를 모았다. 기대는 빗나가지 않았다. 개막 때는 불펜에서 시작했지만, 금세 선발로 전환해 5월 2일 롯데 전에서 데뷔 첫 선발승을 따냈다. 이후 나오는 경기마다 무더기 삼진을 잡아내며 질주했다. 6월 21일 삼성전에서는 연장 13회를 완투하며 삼진 16개를 뺏는 괴력투를 선보였다. 시즌 중반까지 선동열, 김상엽 등 쟁쟁한 선배들과 탈삼진왕 경쟁을 펼쳤다. 하지만 의욕이 지나쳤던 탓일까. 시즌 막판 부상을 당해 전력에서 이탈했다. 그와 함께 신인 탈삼진왕 꿈도 멀어졌다. 최종 성적은 7승 8패 2세이브에 3.64의 평균자책점. 두 자리 승수 달성에는 아깝게 실패했지만, 가능성은 확실하게 보여줬다.

2년차 징크스는 없었다. 이듬해인 1994년, 김홍집은 방위병 복무로 인천 홈경기에만 나오면서도 12승 3패를 기록했다. 첫 두 자리 승수는 물론, 승률 8할로 그해 승률 타이틀도 따냈다. 6월 10일 벌어진 잠실 LG전에서는 이상훈과의 '억대 좌완선발' 맞대결에서 승리투수가 되는 기쁨도 누렸다. 경기 내용도 짜릿한 대역전승. 김홍집이 먼저 2회 3점을 내줬지만, 태평양 타선이 6회와 8회 폭발하며 5-3으로 승리했다. "경기 끝나고 매니저님이 어떤 분을 모셔 와서 인사하라고 하더군요. 알고 보니 인천고 선배였는데, '수고 많았다'며 수표 한 장을 꺼내서 건네주셨어요. 극구 사양하다 결국 받아갖고 집에 왔는데, 꺼내보니 글쎄 100만 원짜리 수표지 뭐에요. 깜짝 놀랐죠." 그날의 승리는 김홍집 개인의 승리이자, 인천야구의 자존심을 세운 승리였던 셈이다.

마침 1994년은 소속팀 태평양의 팀 성적도 좋았다. 정민태가 부상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몸값에 걸맞은 투구를 했다. 여기에 최창호, 정명원 등이 탄탄한 마운드를 구축하며 농도 짙은 '짠물야구'를 펼쳤다. 페넌트레이스 2위를 차지한 태평양은 플레이오프에서 한화를 3전 전승으로 물리치고 인천연고팀 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김홍집은 플레이오프 1차전 선발로 나서 독수리 에이스 정민철을 상대로 승리를 장식했다. 비록 한국시리즈에서 LG에 4연패로 물러나긴 했지만, 김홍집과 '투수왕국' 태평양의 미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아 보였다.

하지만 이듬해부터 급격한 추락이 시작됐다. 튼튼하던 왼쪽 어깨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김홍집은 1994년부터 방위병으로 복무하며 이틀에 한번 꼴로 밤샘 보초를 서는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도 인천 홈경기에 출전하고, 휴가 때는 혼자 기차를 타고 지방구장으로 이동해 원정경기에 등판했다. 제대로 몸 관리를 하기 힘든 여건이었다.

"한창 혈기왕성할 때는 잘 몰랐는데, 밤새고 낮에는 운동하는 생활이 계속 누적되니까 결국엔 몸에 무리가 오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부상이 왔죠." 어깨 통증이 심해지자 제대로 된 공을 던질 수가 없었다. "공을 채는 순간에 힘을 팍 줘야 하거든요. 그런데 던질 때마다 뜨끔뜨끔 아프니까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재활도 오랫동안 하고 했는데, 결국은 그 감각이 안 돌아왔어요."

김홍집은 어쩔 수 없는 가을사나이였다. 시즌 내내 통증을 달고 살다가도, 매년 가을만 되면 구위가 조금 살아났다. 덕분에 태평양이 현대로 바뀐 뒤에도 포스트시즌 때는 꾸준히 경기에 출전했다. "제가 시즌 시작할 때는 항상 엔트리에 있어요. 근데 몇 게임 던지면 팔이 아파. 그래서 여름 내내 재활해요. 그러다 가을쯤 되면 나타나요. 던지다 보면 또 아파. 또 재활해. 그러다 보면 팀은 포스트시즌 올라가 있는 거예요. 팀은 큰 경기 경험이 있으니까 포스트시즌 선수 명단에 올려놔요. 그래놓고 1경기 던지면 또 아파. 그 상태로 버티다 시즌 끝나면 재활하고. 그게 현대 시절 내내 반복됐어요." 결국 2001년 트레이드를 자청해 한화로 팀을 옮겼다. "현대에서는 나름대로 배려를 해준 것 같아요. 제가 충청도 천안에서 대학 생활을 했으니까 적응하기 수월할 거라고 본 거죠."

신기하게도 한화로 옮긴 뒤 어깨가 좋아졌다. 첫해 투구이닝은 18.1회에 그쳤지만 평균자책 2.45로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공을 던졌다. 자신감을 얻은 김홍집은 호주 마무리캠프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마무리캠프와 동계훈련에서 몸을 잘 만들고 준비하면, 다음 시즌 재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코칭스태프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부상이 있는 노장보다는 젊은 투수들이 우선이라는 이유였다. 머리로는 이해됐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연봉 협상에서도 최소 동결을 기대했지만 돌아온 것은 삭감 통보였다. 김홍집은 이를 그만두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결국 2003년 15경기 출전을 끝으로, 김홍집은 11년의 프로 생활을 마감했다. 2004년 잠시 새로운 인천의 주인인 SK에 입단 테스트를 받기도 했지만, 너무 오래 공을 손에서 놓고 지낸 탓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화에서 임의탈퇴 처리된 뒤 6개월을 아무것도 안하고 쉬었어요. 김경기 코치님 주선으로 테스트를 받긴 했는데, 마음과는 달리 스피드가 너무 안 나오더라고요. 거기서 선수생활은 깨끗하게 포기를 했죠."

통산 29승 25패 7세이브 11홀드에 4.08의 평균자책점. 데뷔 당시의 많은 기대와 짧지만 화려했던 순간을 생각하면 너무나 아쉬운 숫자들이 그가 떠난 자리에 남았다.

▲한 동안 야구계를 떠났던 김홍집은 이제 어린 선수들과 함께 현장으로 돌아왔다. ⓒ인천부평리틀야구단 카페

다시 142구째를 던진다

은퇴 이후 한동안 김홍집은 야구와 떨어져 지냈다. "2~3년을 야인으로 지내면서 온갖 일을 다 해본 것 같아요. 그러다 인천고 양후승 감독님(현 NC 코치)의 제안으로 모교에서 인스트럭터 일을 하게 됐죠. 아까운 재능을 썩히지 말고 후배들을 지도해 보라고 권하시더군요." 결국 그가 있을 곳은 야구장이었다. 후배들을 가르치고 대통령배 우승까지 함께하면서 야구에 대한 애정이 다시 돌아왔다. "나중에는 중국으로 건너가서 1년 동안 선수 겸 플레잉코치로 활동했고, 돌아와서는 인천고 정식 코치로도 일했어요. 사회인 야구선수들 상대로 야구교실도 열었죠. 그러다 리틀야구단을 창단하면서 감독을 맡게 됐습니다."

현재 김홍집의 소속은 인천부평리틀야구단. 아이들과 웃고 즐기면서 야구할 수 있는 지금이 그에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애들 야구하는 거 보고 있으면 저도 다시 선수 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목표는 1년에 1승. 우승은 못해도 좋으니까 다치지 않고 즐겁게 야구를 배우는 것, 아이들이 어디 가서 야구선수는 공부 못한다거나 예의 없다는 소리 듣지 않게 지도하는 것, 지금 당장 유명한 리틀야구 선수가 되기보다는 먼 훗날에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게 가르치는 게 '감독'으로서 김홍집의 목표다.

여기에 인천지역에 중학교 야구부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계속하는 중이다. "리틀야구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데, 그 선수들이 정작 진학할 수 있는 중학교 야구팀이 너무 부족합니다. 야구부가 없어서 다른 지역으로 전학 가는 아이들도 많아요. 지자체와 중학교 관계자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김홍집이 한국시리즈에서 던진 141구째는 담장 너머로 날아갔다. 하지만 김홍집의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김홍집은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자기 자신과의 연장전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142번째 공은 이제 막 손에서 떠난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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