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임훈의 투수쪽 번트가 절묘하게 안타로 연결되면서 애초의 시나리오는 폐기됐다. 무사 1, 3루의 험악한 위기상황에서 삼성벤치는 급하게 작성한 쪽대본을 꺼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셋업맨 안지만의 조기투입이라는 초강수를 선택한 것이다. 그 이후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야구경기가 한 두 명의 투수만으로도 충분한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투수들은 경기 중간에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걸 치욕으로 여겼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불펜 분업화가 고도로 발전한 오늘날의 야구에서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제 어떤 선발투수들은 5회를 간신히 버티고 내려오면서도 당당하게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눈다. '벌떼야구'는 더 이상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단어가 아니며, 감독들은 투수를 바꾸기 위해 배트걸만큼이나 쉴 새 없이 경기장 안에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특히 감독들이 가장 애를 먹는 시점은 경기 중반인 6회와 후반으로 접어드는 7회의 투수교체다. 이는 다년간 사령탑을 지낸 베테랑 감독들조차 종종 실패를 경험하게 만드는, 야구에서 가장 까다로운 문제 중 하나다.
어째서 유독 6회와 7회가 문제가 되는 것일까?
첫째로는 6·7회가 선발투수의 교체를 고려해야 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KIA 선동열 감독은 퀄리티 스타트를 '부끄러운 기록'이라고 일갈했지만, 사실 현대야구에서 선발투수가 6이닝 이상을 무사히 던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프로야구 투수들의 이닝 당 평균 투구 수는 보통 16~17개 사이. 이는 대부분의 선발이 5회를 마치고 6회 마운드에 올라올 때쯤에는 이미 투구 수가 80개를 훌쩍 넘긴 상태임을 뜻한다. 6회를 마칠 때쯤 투구 수는 이론적으로 100개에 도달한다. 공 끝에 힘이 떨어지고, 실투가 나오기 딱 좋은 시점이 6·7회에 찾아오는 셈이다.
투수의 힘이 떨어지는 것 외에도, 6·7회는 상대팀의 가장 위험한 타자들과 상대하게 되는 이닝이기도 하다. 올해 프로야구 투수들의 평균 WHIP(이닝당 출루 허용)는 1.34로, 한 이닝 당 평균 4.34명의 타자를 상대했다고 보면 된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5회까지 상대하게 되는 평균 타자수는 21.7명으로, 6회 첫 타자로 거의 틀림없이 상대 4번 타자를 마주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같은 계산법을 사용하면 7회 첫 타자는 상대팀의 9번 타자가 될 확률이 높으며, 이 역시 상위타선과 연결되는 쉽지 않은 순간이다. 게다가 상대는 타순이 세 바퀴를 돌며 이미 선발투수의 공에 대한 파악을 끝낸 상태다.
실제 올 시즌 프로야구에서 선발투수들의 경기당 평균 투구이닝은 약 5.2이닝으로 6이닝에 채 미치지 못했다. 물론 그중에는 배스(한화)처럼 단 1.2이닝만을 던진 투수도 있고 나이트(넥센)처럼 평균 7이닝 가까이 던져준 투수도 있지만, 리그 전체적으로는 6회 2아웃까지가 선발투수들이 버틸 수 있는 한계지점이었다. 단지 아웃카운트 하나를 못 잡아서 퀄리티스타트에 실패한 투수들이 즐비했다. 류현진같은 특급 투수들을 따로 살펴봐도, 평균 7이닝을 넘긴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6회부터 감독들은 다음과 같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한계에 달한 선발투수를 내리고 구원투수를 투입해야 할까? 아니면 선발투수를 좀 더 믿고 퀄리티스타트를 챙겨줄 것인가?
만일 정규시즌이라면 조금 융통성을 발휘할 여지가 있을지 모른다. 감독은 다음 경기를 위해 흔들리는 선발을 좀 더 놔두면서 자존심을 세워주고 불펜진에 휴식을 주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설사 그러다 다 잡은 승리를 날리더라도, 페넌트레이스 때는 다음 경기가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문제될 여지가 적은 편이다.
▲28일 오후 인천 문학야구장에서 열린 2012 팔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3차전 SK 와이번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에서 6회말 2사 1, 2루 SK 김강민이 3점 홈런을 친 후 그라운드를 돌고 있다. 이날 경기의 승리로 SK는 초반 2연패를 당한 한국시리즈 양상을 다시금 바꿔놓았다. ⓒ뉴시스 |
포스트시즌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단기전에선 내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오늘 지면, 그대로 올해의 야구가 끝나버릴 수도 있는 막다른 승부다. 그래서 감독들은 평소보다 조금 더 선발투수들에 냉혹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5회 이전에도 선발투수에게서 공을 빼앗는 쪽을 선호한다. 만에 하나 선발투수를 그대로 마운드에 내버려뒀다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오기라도 하면, 다음 시즌에는 감독석에 다른 사람이 앉게 될 수도 있는 일이다. 포스트시즌 들어 6·7회 이닝 중간에 투수교체가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이유다. 가령 한국시리즈 1차전 같은 경우, 정규시즌의 류중일 감독이라면 6회 1사 2루에서 윤성환이 스스로 위기를 넘기도록 내버려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날은 바꾸는 감독도, 바뀌는 투수도 누구 하나 망설이거나 불만을 표하는 법이 없었다. 반면 선발투수가 정규시즌 때보다 훨씬 많은 이닝을 던지게 놔둔 SK는 패배를 떠안았다.
6·7회 투수교체가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불펜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1994년 LG의 우승 이후, 프로야구에서 8회 셋업맨-9회 마무리 등판은 불변하는 공식이 되었다. 우리는 삼성 경기에서 9회가 되면 오승환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박희수가 나오지 않는 SK의 8회를 구경하기란 송해 없는 전국노래자랑보다 드물다는 점도 안다. 감독들은 불펜을 구성할 때 가장 강력한 투수를 맨 뒤에 배치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한다. 그 다음가는 투수는 8회, 그보다 조금 못한 투수는 7회, 그리고 구위가 가장 떨어지는 선수를 추격조 요원으로 임무를 부여하는 식이다.
대부분의 상위권 팀은 8회와 9회를 막는 데는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가령 삼성은 안지만과 오승환, SK에는 박희수와 정우람이라는 확고한 투수들이 뒤를 받친다. 정 급할 경우에는 오승환과 정우람을 8회부터, 안지만과 박희수를 7회부터 기용하는 방법도 있기에 7회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7회는 좌완 원포인트 릴리프와 사이드암 투수들이 아웃카운트 한두 개를 쪼개서 막아내기에 안성맞춤인 이닝이기도 하다. 7회 이후에는 어떤 투수를 투입해야 할지 공식이 정해져 있기에, 설령 감독이 경기 중에 퇴장을 당한 상황이라도 투수기용이 혼란을 겪는 일은 별로 없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상황이 6회부터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가령 6회 선발투수가 무사 1, 2루를 허용하고 마운드를 내려갈 경우, 감독은 불펜에서 어떤 대안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불펜에서 겨우 서너 번째 가는 실력을 갖춘 투수 정도로 위기를 진화할 수 있을까? 자칫 역전을 허용하기라도 하면, 뒤에 버티고 있는 좋은 투수들을 써보기도 전에 백기를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8회에나 내보낼 투수를 6회부터 쓰자니, 당장 경기 후반과 앞으로의 경기에 차질이 생긴다. 딜레마가 발생하는 것이다.
정리해보자. 1회부터 5회까지는 확고부동한 선발투수의 영역이다. 8회와 9회는 셋업맨과 마무리의 영역이다. 그러나 6회와 7회는 선발투수의 영역이라 할 수도, 불펜 필승조의 영역이라 할 수도 없는 애매한 중간지대다. 일종의 투수교체의 '연옥'이다. 만일 팀에 연장 15회까지 영화처럼 던져줄 선동열 같은 투수만 가득하거나, 불펜에 오승환급 투수 4명을 보유한 팀이라면 6·7회를 놓고 고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팀은 게임 속에서나 존재하며, 현실의 야구에서는 대부분의 팀이 5회를 버티기에도 급급한 선발진과 두세 명의 필승조를 갖고 어렵게 경기를 꾸려나간다. 그래서 6·7회를 무사히 넘기는 게 그토록 힘이 드는 것이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영리한 감독들은 포스트시즌에서 1+1이라는 변칙적인 시스템을 운용한다. 포스트시즌에서는 경기 일정상 선발투수가 3~4명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기존 선발투수 중 한두 명을 불펜으로 돌리는 방식이다. 가령 지난해 삼성 류중일 감독은 선발요원인 차우찬을 불펜에 기용해서 5-6-7회를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같은 기간 메이저리그에서는 텍사스 레인저스가 선발투수 오간도를 불펜으로 투입해 경기 중반을 맡겼고, 올해도 사이영상 수상자 출신의 린스컴이 샌프란시스코의 6회를 든든하게 책임지고 있다. 이런 기용은 불펜의 가장 약한 고리인 6회를 튼튼하게 하는 것 외에도, 자칫 상대 쪽으로 넘어갈 수 있는 흐름을 조기에 차단하고 주도권을 유지하는 면에서도 효과적이다.
올해 한국시리즈도 비슷하다. 삼성은 지난해보다 한 술 더 떠 1+2 작전을 구사한다. 작년엔 차우찬 하나였지만, 올해는 외국인 투수 고든까지 불펜으로 밀려났다. SK도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선발투수 채병용을 불펜으로 기용해 재미를 본 바 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채병용에다 송은범까지 불펜으로 나설 전망이다. 양 팀 다 선발진에 넣기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지만, 구위 자체는 뛰어난 투수들로 경기 중반을 해결한다는 계획이다.
결과는 어떨까. 2차전까지만 해도 삼성이 대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였다. 삼성은 1차전에서는 6회 1사 2루에서 심창민을 투입해 막아낸 뒤, 7회에는 안지만을, 8회에는 오승환을 일찌감치 올려 SK에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반면 SK는 교체타이밍인 6회 위기를 김강민의 호수비로 간신히 넘긴 뒤, 7회에도 윤희상을 고집하다 추가점을 내주고 무릎을 꿇었다. 2차전에서도 삼성은 장원삼이 (평소보다 적은 이닝인) 6회만을 책임진 뒤, 고든-정현욱-차우찬으로 남은 3이닝을 막아냈다. 선발투수가 3회도 못 버티고 물러난 SK는 6·7회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3차전에서는 조금 양상이 달라졌다. 7대 5로 뒤진 5회 2사 2루에서 SK는 송은범 카드를 꺼내들었다. 진갑용을 투수 땅볼로 잡고 이닝을 끝낸 송은범은, 이후 7회 2아웃까지 2이닝 동안 삼성 타선을 퍼펙트로 막아냈다. 그 사이 SK 타선은 6회 말 대거 6점을 쏟아부으며 역전에 성공했다. 7회 2아웃 최형우 타석에서는 박희수가 한 타이밍 일찍 올라왔는데, 이는 이틀 연속 홈런을 쳐낸 최형우를 확실하게 제압하고 넘어가려는 SK 벤치의 전략이었다. SK의 대역전극은 경기 중반을 완벽하게 틀어막은 송은범의 역투 덕분에 가능했다.
반면 삼성은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우선 1+2 전략의 핵심인 차우찬이 무너졌다. 배영수에 이어 4회에 마운드에 올랐지만, 나오자마자 박진만에게 홈런포를 얻어맞았다. 정근우에게도 내야안타를 허용하면서 겨우 2아웃만 잡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7대 5로 앞선 6회 권혁이 연속안타를 맞고 무사 1, 3루가 되자 삼성 벤치에선 마땅히 내보낼 만한 투수가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정현욱은 2차전 투구내용이 너무 불안했다. 고든은 미덥지가 못했다.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김희걸을 낼 수도 없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안지만이 일찌감치 올라왔지만, 영혼까지 난타당한 끝에 한꺼번에 6점을 주고 무너졌다. 어이없는 수비 실수가 동반된 결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충격의 강도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적어도 3차전 결과만 놓고 보면, SK와 삼성의 불펜 상황은 완벽하게 역전됐다. 박희수-정우람 외엔 믿을 투수가 없다던 SK는 송은범의 호투로 6·7회를 막아줄 최고의 카드를 손에 넣었다. 선발이 5회까지만 버텨주면, 6회부터 송은범을 내세워 승리하는 새로운 공식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면 삼성은 오승환을 제외한 나머지 불펜 전원이 허점을 드러내면서, 8회조차 확실하게 막는다는 보장을 하기 어렵게 됐다. 물론 안지만의 성격상 툴툴 털고 다음 경기부터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것으로 보이지만, 8회는 그렇다쳐도 6·7회는 이제 누구를 믿고 맡길 것인가? 남은 시리즈에서 삼성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숙제다.
그렇게도 막강해 보이던 삼성 불펜이 균열을 드러냈다. 다 죽어가던 SK는 회생의 실마리를 만들어냈다. 싱겁게 끝날 줄 알았던 한국시리즈가 조금은 재미있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두 팀이 남은 시리즈에서 6·7회를 어떻게 무사히 넘기는지 유심히 살펴보면 더 재미있는 시리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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