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암 환자는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었고 올해 9월에는 130만 명을 경신했다. 가족까지 고려하면 암으로 고통받는 국민이 800만 명이 넘는 셈이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를 역대 최대 기록으로 꺾었을 때 표 차이가 530여만 표였음을 고려하면 적지 않은 숫자다.
의료기술이 발전하면서 암 생존자도 늘고 있다. 2000년부터 2009년 말까지 생존하고 있는 암 환자는 80만 명이고, 이 가운데 절반(49.7%)은 60세 미만으로 경제활동인구에 속하는 연령층이다. 이들을 방치하면 양극화 문제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정부와 정치권이 암 환자를 비롯한 중증환자의 치료뿐만 아니라 완치 이후의 삶의 질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프레시안>은 한국환자단체연합회와 함께 대표적인 중증질환자인 암 환자의 암 제거 이후의 삶을 조명하고, 역대 정부와 대선 후보의 보건의료정책을 분석하는 기사를 마련했다. <편집자>
다섯 자녀의 아버지인 송명훈(가명·48) 씨는 3년 전 급성백혈병(혈액암) 진단을 받았다. 25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1년 동안 항암치료에 들어갔다. 1년 뒤 그는 빈털터리가 됐다. 모아둔 돈 3000만 원을 병원비와 생활비로 썼다.
치료는 끝났지만 일곱 식구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항암치료로 면역력이 떨어진 그는 퇴원 후에도 2년간 사람이 많은 곳으로는 외출을 삼가야 했다. 대중교통도, 공공장소도 금지됐다. 재취업하기에 그는 "아직 몸이 안 따라준다"고 했다. 집에서 다섯 아이를 돌보던 아내가 대신 공공근로를 다닌다. 송 씨는 아이들에게 부모노릇을 못해 미안하다.
"한창 경제 활동을 해야 할 나이인데 한순간에 모든 게 날아갔어요."
아직 '암 환자' 신분인 그는 2년 뒤가 더 걱정이다. 정부가 정한 중증환자 등록기간 5년이 만료되는 탓이다. 내년에 암이 재발되면 기초생활수급 자격이 5년 더 연장된다. 반면 암이 발견되지 않으면 설사 건강이 나쁘더라도 근로능력이 인정돼 수급자 자격이 박탈된다. 하지만 송 씨는 모든 환자가 5년 만에 완치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2년 뒤 재취업을 할 수 있을지도 불안하다. 회사가 자신의 병력을 알면 재취업에 불이익을 당할 것 같다. 그는 "아무리 내가 일할 수 있다고 주장해도 회사에서는 믿지 않을 것"이라며 "사장도 정상적인 사람을 뽑고 싶지, 나 같은 사람을 뽑고 싶겠느냐"고 반문했다.
▲ 백혈병 이력이 있는 송명훈(가명) 씨는 재취업이 안 될까 걱정이다. 사진은 대기업 협력업체 42개사와 중소기업 142개가 참가한 가운데 지난달 9월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일자리 박람회. ⓒ연합뉴스 |
30대에 재취업 실패 2번, 밀려오는 진로고민
암 환자가 재취업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는 경우는 흔하다. 국립암센터가 위암, 간암, 대장암 환자 중 암 진단 당시 직업이 있던 남성 환자 305명을 2년간 추적해 2006년 내놓은 연구를 보면, 직업을 잃은 암 환자 가운데 23%만이 재취업에 성공했다. 휴가를 냈다가 원래 직장에 복귀한 환자를 포함해도 취업성공률은 56%에 불과했다. 이는 암 환자들의 고용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을 시행하는 미국의 직업복귀율 78~80%에 비해 크게 낮은 수치다.
2년 전 유방암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해가는 진영은(가명·32) 씨도 지난해 일자리를 구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첫 번째 일자리는 비영리단체인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알아봤다. 암 환자였다고 밝히자 "서류상 자격은 되지만 교육과정이 힘들어서 채용은 어렵겠다"는 답변이 왔다. 이후에도 일반 회사에 지원서를 넣었다가 최종면접에서 떨어졌다. 회사는 "아파서 안 될 것 같다. 미안하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건축 설계 일을 했던 진 씨는 전에는 일 중독자였다. 잠을 반납해가며 적게는 300만 원에서 많게는 600만 원까지 벌었다. 암 판정을 받은 뒤 그는 조용히 회사를 그만 뒀다. "복귀할 거 생각해서 개인 사정이라고 거짓말했거든요."
두 번째 취업에 실패한 그는 다시는 암 이력을 밝히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건강했을 때 나도 암 환자는 '불편하고 일 못할 것 같다'는 편견을 가졌었다"고 털어놨다.
진 씨는 완치되면 설계 일을 다시 하고 싶지만 자신이 없다. 마감 때는 2박3일씩 거의 밤을 새우는 업무강도를 버텨야 하고, 회식 때는 술도 마시고 기름진 음식도 먹어야 하는데 몇 년간은 아무래도 무리 같다. 야근만 조절하면 지금도 아예 일을 못하지는 않지만, 회사에서 암 환자인 자신을 배려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나라에서 진 씨가 할 수 있는 일을 지원해줄지도 의문이다.
"그동안 번 기대소득이 있는데 100만 원만 받고 나라에서 소개하는 단순근로를 할 수 있을까? 별 큰 기대는 안 해요. 대학 동기나 동료들은 지금도 자기 커리어를 쌓는데 나만 뒤쳐지는 것 같고. 고민이 많죠. 소득 기대치를 낮추고 단순근로로 가야하는지, 했던 일을 다시 할 순 없는지…."
송 씨도 "정년이 보장되는 회사는 아예 없다"며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기초생활수급자에게 지원하는 3D업종에 종사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는 "장시간 일하고 월급이 100만 원도 안 되는 하류업체를 소개시켜주면 누가 가겠느냐"며 "정년과 병원비를 보장하는 회사가 있다면 당장 내일 죽더라도 나갈 것"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중증환자 치료 이후 재활·일자리 복귀 지원해야"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말 발표한 '2009년 국가암등록 통계'를 보면 암 진단 후 5년 생존율은 1996~2000년까지 44%였지만, 2005~2009년에는 62%로 18%포인트 높아졌다. 생존율이 낮은 간암(25.1%)이나 폐암(19.0%), 췌장암(8.0%)도 있지만, 대부분의 초기 암은 만성질환처럼 꾸준히 관리해야 하는 질병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항암치료 이후의 삶을 보조하는 정부 정책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암 진단을 받은 환자들은 "정부가 치료 이후 재활이나 안정적인 일자리를 지원하면 다시 사회로 복귀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로서도 암 환자 가운데 상당수가 빈곤층으로 전락하기 전에 '일자리 복귀'를 지원해야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송 씨는 "체력을 회복해서 재취업할 때까지만이라도 정부가 지원을 늘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환자 중에는 빨리 회복되는 사람도 있고 좀 더 시간이 필요한 사람도 있지만, 일반인이 받는 취업훈련 과정이 환자의 사정에는 잘 안 맞는 경우가 많다"며 "환자 맞춤형 재활·재취업 지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암 환자인 이순영(가명·41) 씨는 "병원에 다녀와도 눈치 보이지 않는 일자리가 있었으면 한다"며 "정부가 중증 이력이 있는 환자들을 고용하는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서 지원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지난 7월 '제2차 암대책 추진 기본계획'에서 암 환자에게 일자리 지원 방안을 마련한 바 있다.
"암 이력 이유로 불합격시킨 것은 차별"
선진국처럼 직장에 복귀하거나 재취업하려는 암 환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도 일었다. 안 대표는 "장애인 차별을 금지하듯이 환자 차별을 금지하는 법적 강제가 필요하다"며 "환자 차별법만 따로 만들기보다는 장애인,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금지법'을 만들고 처벌 조항을 신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난해 12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암 수술 후 5년이 지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원자를 불합격 처리한 것은 차별"이라며 A항공사 대표이사에게 진정인에 대한 구제조치를 취하라고 결정했다. 당시 인권위는 "개인의 건강상태나 환경에 따라 병의 경과가 다르므로 암 수술 후 5년이라는 절대적인 시간을 기준으로 채용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유를 들었다. 하지만 인권위의 결정은 '권고'일 뿐 강제는 아니다.
안 대표는 "이미 암 생존자가 80만 명을 넘었고 조만간 100만 명에 근접할 것"이라며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가족 중에 암 환자가 생길 확률도 높아졌다"고 경고했다. 암 환자의 경제적 위기가 남의 일은 아니란 뜻이다.
중증환자 맞춤형 복지 마련해야 전문가들은 암을 비롯한 중증질환이 우울증, 가계파탄, 가정파괴 등 복합적인 문제를 낳는 만큼 해법도 통합적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양봉석 환자복지센터 소장은 "중증질환자는 재취업 문제뿐만 아니라 심리·사회·경제적인 문제를 두루 겪는다"며 "그런데도 정부는 환자들에 대해 단편적인 정책만을 내놓을 뿐, 개개인의 취약한 상황에 맞추어 통합적인 지원을 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양 소장은 "한국 사회의 질병구조가 예전에는 급성기나 전염성 질환 중심이었다가 요즘은 중증질환과 만성질환 중심으로 바뀌었다"며 "질병구조 변화에 맞춰 심리치료, 신체재활, 직업재활 등을 통합적으로 지원하는 의료사회복지기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치료하면 비교적 이른 시일 내에 낫는 급성질환과는 달리, 만성질환과 중증질환은 다양한 위기를 부른다. 환자가 있는 가정은 치료비와 간병비 때문에 부담을 안고, 자녀 교육에 어려움을 겪는다. 환자는 장기간 일자리를 잃고 사회생활이 단절돼 우울증에 빠지거나 가족과의 관계가 나빠지기도 한다. 실제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 6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질병·빚·실업·자녀교육 등의 문제로 위기 상황에 내몰리는 '위기가구'는 위기의 요인으로 '가구원의 건강'(23.7%)을 제 1순위로 꼽았다. 가족의 건강 문제가 '빚 등 경제적 어려움'(22.3%)보다 더 심각하다고 인식한 것이다. 그럼에도 치료 이후의 환자들을 지원하려는 지자체의 움직임은 복지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실정이다. 서울시는 지난해 8억 원을 들여 '환자복지센터'를 건립하고 암·뇌혈관질환·심혈관질환·희귀난치성질환자들의 재활 및 치유 프로그램을 제공할 계획을 세웠다가 예산 부족으로 취소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아직까지 퇴원한 이후 중증질환자의 요구를 해결하는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은 전무한 상황"이라며 "환자들에게 의료비 지원 이상의 관리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은 공감하지만 예산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지자체와 지역사회가 담당해야 하는 복지도 있지만, 중앙정부 단위에서 해줘야 하는 것도 있다"며 중앙정부의 지원을 우회적으로 요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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