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유엔은 2009년 말 '2012년을 세계협동조합의 해'로 정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은 세계협동조합의 해 공식 책자를 통해 "협동조합이 경제적 성과와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일깨워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2012년 총선 대선을 앞두고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대세를 형성한 복지국가 담론에는 자칫 국가주의의 확대로 귀결될 수 있다는 비판적 시각이 따라붙는다. 복지국가 담론의 한계를 넘어, 또한 한국 노동운동의 편협한 이념과 노선을 넘어 협동조합 운동의 대중적 발아를 위한 제언을 10회 기획으로 담아본다. <편집자>
한국 노동운동의 영혼이 죽어가고 있다
▲ 민주노총 전북본부는 작년 6월25일 전북 전주시 광주지방노동청 전주지청 앞에서 타임오프제 시행을 앞두고 '타임오프 폐기와 최저임금 현실화' 등을 요구하는 집회를 가졌다 ⓒ뉴시스 |
한국의 노동조합들이 죽어가고 있다.
솔직히 이제는 이런 진단이나 말조차 새삼스럽지도 않다. 이미 오래전부터 노동조합운동 안팎에서 그런 지적과 분석, 비판이 줄을 이어 왔다. 노동조합운동을 하는 수많은 간부나 조합원들도 이를 극복하고 치유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펼쳐온 것 또한 사실이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조합과 지역 노동조합의 연대를 향한 투쟁과 모색은 차마 눈뜨고 지켜볼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한 분투와 희생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한국 노동조합은 노동운동의 영혼이 이미 빠져나가 버렸고, 육신조차 껍데기만 남아 죽어가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10년 7월 1일부터 시행된 타임오프제(Time-Off, 근로시간 면제제도)와 함께 수많은 노동조합이 전임자 임금을 제대로 주지 못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24조 2항은 "노동조합의 업무에만 종사하는 자(이하 전임자라 한다)는 그 전임기간 동안 사용자로부터 어떠한 급여도 지급받아서는 아니 된다"고 못 박고 있다.
그리고 4항에서는 "제2항에도 단체협약으로 정하거나 사용자가 동의하는 경우에는 사업 또는 사업장별로 조합원 수 등을 고려하여 제24조의 2에 따라 결정된 근로시간 면제한도(이하 '근로시간 면제한도'라고 한다)를 초과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근로자는 임금의 손실 없이 사용자와의 협의 교섭, 고충처리, 산업안전 활동 등 이 법 또는 다른 법률에서 정하는 업무와 건전한 노사관계 발전을 위한 노동조합의 유지·관리업무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노사 공통의 이해가 걸린 활동으로 고충처리, 산업안전, 단체협상 교섭 등에 종사한 시간만을 근무 시간으로 인정하고 이에 대해서는 회사가 임금을 지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노조전임자의 업무와 정원은 노사 간 단체협약을 통해 결정했다.
이에 따라 조합원 50인 미만 사업장은 전임자 0.5명을, 100인 미만은 1명을, 300인 미만은 2명을, 1000인 미만은 최대 3명만을 둘 수 있게 되었다. 예컨대 금속노조 기아자동차지부는 2010년 8월부터 204명이던 노조전임자 수가 유급 21명, 무급 70명으로 줄었다. 노조는 무급전임자 노조원 70명의 급여를 해결하기 위해 조합원 1인당 조합비를 월 평균 1만4천200원 인상해야만 했다.
급기야 지난 6월 9일에는 현대자동차 노조 간부가 타임오프제 등 노동탄압을 분쇄하자며 자살을 감행해 충격을 주기까지 했다. 현대자동차 노조는 기존 단협이 만료돼 233명의 전임자들가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회사 측은 조합원 4만5천 명의 법정 전임자 24명만을 인정하고 노조에 법정 전임자를 지정하라고 통보한 상태였다.
타임오프제로 노조 활동이 위축되는 것과 함께 복수노조의 시행 또한 노동조합을 활성화하기보다는 더욱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귀결되리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사실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조합의 형태와 종류를 자유롭게 선택해서 조직하는 것은 노동운동의 첫 번째 원칙이자 오랜 요구사항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노동조합은 이런 결사의 자유조차 제대로 활용해서 노동운동을 활성화시키는 기회로 삼을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해져 있다. 오히려 재벌과 자본가들이 복수노조 조항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어용노조를 조직, 기존 노동조합을 분리 통제하는 기제로 삼을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왜 이렇듯 한국 노동조합이 참담할 정도로 무기력해지고 고사해 가고 있는 것일까. 한때 전 세계 노동자들이 한국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경이의 시선으로 주목하고 그 투쟁성과 성과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것이 엊그제인데, 왜 이렇게 급속하게 몰락하고 말았을까. 우리는 이제 문제의 근원으로까지 파고 들어가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을 그 뿌리에서부터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한 마디로 한국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인간다운 삶, 단결과 연대라는 노동운동의 대의를 버렸다. 대다수 노동자와 노동조합들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노동해방, 사회해방의 뜨거운 가슴과 열정을, 노동운동의 영혼을 자본에 팔아버렸다. 이것이 한국 노동운동 실패의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종업원 이익단체로 전락한 한국 노동조합
▲ 5월 1일 서울광장에서 민주노총 회원들이 '제121주년 세계 노동절 기념대회'를 개최했다 ⓒ뉴시스 |
노동조합은 노동자 스스로 만든 자유인 결사체다. 당연히 노동조합 전임자는 회사가 '임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들이 스스로 걷은 조합비로 조합 '활동비'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 노조 전임자 활동비를 자본가가 준다면 이는 어용 노동조합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한국 노동조합은 전임자 활동비를 사용주로부터 받으면서도 어용 노조가 아니라 민주 노조를 표방했고, 또 실제로 자본과 강력하게 대항하는 민주 노동조합으로서의 정체성을 이어왔다. 자본으로부터 전임자 활동비를 투쟁으로 쟁취해내고 그것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노동조합의 힘이 강력했다.
한국 노동조합은 기업별 노동조합으로 오랫동안 고착됐다. 기업별 노조는 사실상 어용 노조로 분류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의 최대 무기는 조합원 수, 속된 말로 쪽수의 힘인데, 몇몇 대기업을 빼고는 기업별로 자본의 막강한 힘에 대항하는 이 쪽수의 힘을 발휘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문제인 것은 기업별 노조는 결국 조합원들의 정체성을 기업별로 회사 소속의 종업원이라는 정체성에 가두어 놓는데 있다. "우리는 금속 노동자다"라는 노동자 의식보다 우리는 현대중공업 소속 노동자라는 기업 정체성이 우선시되는 것이다. "우리는 운수 노동자다"라는 노동자 연대의 정체성보다 "우리는 지하철 종업원"이라는 종업원 의식이 앞서게 된다. 그래서 기업별 노조는 자유로운 노동자들의 결사체로서의 노동조합이 아니라 회사에 예속된 종업원 노조에 불과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노동조합들이 꼭 그렇게 종업원 노조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 산별 노조 운동이 이어져 왔지만 산별 노조라 할지라도 무늬만 산별일 뿐 같은 산업 노동자로서의 정체성보다는 한 회사의 종업원이라는 정체성이 훨씬 더 강한 게 현실이다. 산별노조인 금속노조나 보건의료노조의 단체협약 과정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여전히 기업별로 단협을 다시 체결하는 한국 산별노조의 초라한 실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1987년 이후 한국 노동조합 운동의 대폭발 시기에는 기업별 노조의 이런 성격이 오히려 강점이 될 수 있었다. 단결의 힘에 눈을 뜬 노동자들이 민주 노동조합을 통해 작업장 안에서 똘똘 뭉쳐 기업주에 대항하면 사실 기업주는 이에 맞설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1987년 이후 매년 노동자들의 임금은 두 자릿수로 올랐고, 기업별 노조도 민주 노동운동의 중심축으로서 세계 노동운동이 놀랄 정도로 눈부시게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7년 국제통화기금의 지배를 계기로 한국 노동조합운동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른바 노동 유연성의 도입은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노동자층을 만들어 내면서 노동자들의 단결을 밑에서부터 급속하게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평생직장 개념은 사라져 버렸고, 노동자들은 기업 안에서조차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무식과 현장직, 남성과 여성, 하청, 재하청, 재재하청 등 소속과 계층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전투적 노동운동의 성과, 풍요로운 한국 노동자들의 소비생활
실제로 1997년까지 한국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해마다 놀라운 정도로 향상되고 있었다.
<한국의 주요 노동통계>
▲ 한국노동연구원, KLI 노동통계, 노동부 고용노동통예에서 재작성 |
2010년 기준으로 한국에서 4인 가족의 월 소득이 약 150만 원 이하면 차상위계층에 속한다. 그만큼 한국 노동자들의 소득 수준과 소비생활은 아무리 비정규직이라 해도 1987년 이전에 비해 놀라울 만큼 높아졌다. 월 소득 150만 원은 북한이나 동남아 노동자들의 2~3년 치 연봉에 해당한다. 물론 한국의 차상위계층 소비생활 또한 북한과 동남아 노동자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풍요롭다.
그러나 작업장 안에서 '전투적인 투쟁'을 통해 생산현장의 민주화와 노동조건을 개선했던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의 신탁통치 아래 국가와 자본의 전방위 공격 앞에서는 전혀 대응을 못 한 채 속수무책으로 후퇴만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성과를 지키는 일에 급급해야만 했고 그조차도 힘에 부쳤다. 노동조건은 뒷걸음치기 시작했고, 생산현장의 민주화는 다시 점차로 병영식 노무관리 체제로 치환되어 갔다.
그 분기점은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노동 유연화 정책이었다. 수많은 비정규직이 양산되었다. 실업자가 늘어나면서 고용 불안정은 노동자들에게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전환이 일상화되는 상황 속에서 정규직 노동조합들은 비정규직을 자신들의 고용 안전판으로 받아들였고 노동자들의 단결이란 그저 수사로만 남게 되었다.
이에 대응하는 노동조합운동의 전략은 1년 열두 달 늘 구태의연하게 반복되는 총파업 구호뿐이었다. '뻥 파업'이란 자조의 표현까지 등장하면서 노동조합은 그야말로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중소 영세 자영업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과 상당수의 노동자들까지도 노동조합 운동의 반대 세력으로 돌려놓는 결과를 낳았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에 대항하는, 눈에 보이는 뚜렷한 대안의 이념과 대안의 경제사회 체제도 존재하지 않고 그것을 추진하는 대안 세력 또한 없는 현실에서 노동조합이 정규직이건 비정규직이건 종업원의 이익 단체화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한국 노동자들은 그렇게 단결과 연대 대신 자신의 밥그릇부터 지키는 현실의 선택을 했다.
현대차노조의 '정규직 장기 근속자 자녀 우선 채용' 요구로 대표되는 정규직 노조의 이기주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성의 표현일 뿐이다. 자신들의 희생과 죽음만 보일 뿐 구체화한 희망이란 도무지 지푸라기 하나조차도 보이지 않는 단결과 연대의 미래를 위해 노동자들에게 눈앞의 실리를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한국 노동조합은 노동운동의 뜨거운 심장과 영혼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제도로서 박제화 된 교섭 기구로 변해버렸다. 민주노총의 많은 노동조합은 민주라는 말을 쓰고는 있지만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져 버린 지 오래다. 수많은 노동조합들이 전태일 정신을 말하지만 자신의 월급을 털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배고픔을 함께 나누는 정규직 노동조합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일부이긴 하지만, 예컨대 민주노총 상근 활동가 가운데 절반 이상을 특정 정파 활동가들이 '해고도 비정규직도 없는' 자기들만의 노동관료로 똬리를 틀고 앉아 노동운동의 심장과 영혼을 갉아 먹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한국 노동조합 운동은 미래의 대안조차 없이 암담한 항해를 해오면서 난파되어 가고 있다.
원산노련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노동 쟁의 사건인 1929년 원산노동연합회 총파업 ⓒ여수지역사회연구소 |
그런데 정말로 한국 노동조합 운동에 대안이 없었던 것일까. 신자유주의의 노동 유연화와 해고, 비정규직에 대한 노동자들의 대응 전략은, 아무도 그 실현 가능성을 믿지 않는, 정권 교체를 통해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이 집권하는 길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는 협동과 단결의 힘으로 새로운 사회경제를 만들어 낼 힘이 있으며, 또한 그런 세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우선 한국 노동 운동의 금자탑으로 평가되고 있는 '원산 총파업'과 '원산노동연맹'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자. 1929년 일제 식민지 시기 원산노련이 주도한 원산 총파업은 식민지 시대 최대의 파업으로서 오늘날까지도 한국 노동조합운동에 무엇인가를 강하게 말해주고 있다. 원산노련은 오늘날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한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아주 오래된 미래라고 할 수 있다.(원산노련 자료는 한국노총, 한국노동조합운동사, 1979년 참조)
1921년 조직된 원산노동회는 1925년 1000명의 노동자들이 김경식을 위원장으로 원산노동연합회로 재조직되면서 일제 식민지 시대 가장 강력한 노동조합으로 성장했다. 1929년 당시 원산노련에는 해륙 운수노동자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1800여 명과 기공적(技工的) 직업에 종사하는 양복, 인쇄, 이발, 제곡(製麯, 누룩제조업) 등 약 400명, 총계 2200명이 조합원으로 있었다. 원산에 있는 거의 모든 노동자가 조직되어 있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원산노련은 장소를 세분하여 조직된 기초 조직인 도중(都中, 즉 반(班))이 60여 개가 있었고 이 도중이 모여 23개의 개별 노동조합을 조직한 3단계 조직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원산노련의 주요 사업 4개를 보면 당시 원산노련이 무엇을 지향했는지 지금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놀라울 정도임을 알 수 있다.
1. 노동운동의 전위군을 양성하기 위하야 강습소와 학교를 시설함
2. 노동계급에 계급의식을 촉진키 위하야 신문잡지의 편성과 순회강연과 강독 등을 위함
3. 각지 노동운동, 청년운동, 형평운동, 여성운동을 항상 조사함
4. 본회 각 세포 단체원으로 소비조합을 조직하야 조합원의 생활상 필요물품을 구입 공급함.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다름 아니라 원산노련이 협동조합운동을 주요한 운동으로 분명하게 아예 사업목표로 못 박고 있다는 사실이다. 원산노련의 조직력이 막강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고 그렇게 장기간 파업을 지속했는데도 버틸 수 있었던 까닭은 다름 아닌 원산노련에는 오늘날 한국 노동조합에는 거의 없는 소비조합과 구제부(구매 담당 부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구한 설명을 하기보다 당시의 르포기사를 원문 그대로 읽어보면 원산노련이 어떤 노동운동을 지향하고 있었는지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비조합과 병원 등 경영
그러나 이것(전위군 양성을 위한 청년부 설치, 강습회 순회강연 신문잡지 편찬 강독 등 계급적 훈련: 글쓴이 주)보다도 가장 괄목할 사업은 소비조합의 경영과 로동병원, 리발소, 구제부의 직영이다. 소비조합은 재작년에 처음 창설한 것으로 조합원들이 가입 당초에 매 한 명이 이십원식을(10회 분불(分拂)) 출자한 것인데, 처음에 이 모든 출자금과 모 은행에서 원산 유력자 실팔명의 련대로 빌어내 온 돈 팔천원을 긔본 삼아서 사업을 시작한 것인 바 그 속에는 곡물부와 잡화부의 두 부가 잇어서 조합원들의 생활에 필요한 잡화와 미곡만 시보다 약 이할 내지 사할의 헐한 갑으로 공급하고 잇다는데, 한 달에 그 취인액이 아모리 적어도 일만이천여 원의 거액에 달한다 한다. 물품을 사는 데는 조합에서 미리 그 조합원의 수입과 가족상태를 잘 됴사하여 뎡도를 뎡하여 노흔 표준에 의하야 그 생활에 알맛게 미곡권과 잡화권을 주어 사도록 한다는데, 아무럿튼 원산리에 잇는 됴합창고와 사무소 문전에는 항상 물품 사러 오는 조합원과 그 가족들로 문전성시하고 잇스며 더욱 현재 소비조합의 운뎐자금은 약 삼사만 원의 거액에 달한다 한다.
환자 연인원 1년에 2만
로동병원에는 수년 전 지함북 사회운동의 열렬한 투사로 잇든 경성의뎐 출신 차철순 씨가 원장으로 잇는 이외에 의사 한 명과 산파 한 명과 약제사 두 명과 간호부 네 명과 입원병실 십여 개를 가진 당당한 긔관으로 련합회원에게는 약가를 전부 사할인하여 준다 하며, 환자도 매일 륙칠십 명식 모여든다 하니 실로 일년의 연인원 총수가 이만 일천여 명에 달하는 터이며, 입원병실도 사시부절으로 만원이 되어 잇다한즉 그 성황을 알 겄이며, 그밧게 잇는 리발소는 회원에게 한 번에 십오전식 밧고 머리를 거주는 것으로 이천여 명 회원과 그 가족들 지 전부 거주는 관계로 항상 '바리겡' 소리가 칠 사이 업다고 한다.
- 김동환, 원산노동연합회진용종횡기(2), 조선일보, 1929. 2. 13.
규율정연한 구제부 사업
구제부라 함은 련합회의 세포단톄인 각 로동조합마다 그 안에 잇는 것이니, 조합원으로 화촉동방의 가약을 매즐에는 그 결혼비용의 전부를 지출하여 주는 이외에 국수도 조합원이 가서 눌러주고 '우이'(신랑을 데리고 가는 사람: 글쓴이 주)나 '권마성'(가마 멘 사람들이 발을 맞추기 위해 부르는 노래소리: 글쓴이 주)도 조합원이 가서 해 줄 더러 심지어 신랑신부가 덥고 자는 이부자리 지미어 준다 하며, 장례할 에도 모든 조합원들이 상도이 되어 상여를 메어다 주고 북망산천에 뭇친 뒤에도 년년세세 단오나 가위가튼 큰 명절이 올마다 애나게 눈물을 흘려가며 분초도 하여 주고 제사도 지내어 준다 하며, 병이 나면 약갑을 대어 주고 누구에게 어더마지면 함 몰려가 설치하여 주어 가튼 로동자란 의식이 실로 한배를 갈르고 나온 친형뎨보다도 더하게 서로서로 도아주고 위로하여 주며 지낸다 한다. 이제 한 가지 실례를 들어 소개하건대 작년 삼월에 조합원 우상준(30) 씨가 부두에 나가 일하다가 중상을 입자 련합회의 교섭으로 고주측인 국제통운에서 부상 위자료로 돈 오백원을 바더내어서 그 돈을 가지고 다섯달 동안을 입원 치료케 한 뒤 스물 세 개의 조합에서 각각 오원과 동무들이 십원도 내고 이십원도 내어 도합 삼백여 원의 금액을 만들어 주어서 당자는 그 돈을 가지고 미천삼아 반찬가게를 버린 것이 지금에는 한 집안이 넉넉히 살러갈 수 잇게 되엇다고 한다. 그러면 이 모든 구제비용은 어듸서 나오는가 하면 별 것이 아니라 처음 로동자가 조합에 가입할에 가입금으로 내어놋는 삼십원 돈을 가지고 영원히 이러케 돌려하며 활용하고 잇다 한다.
- 김동환, 원산노동연합회진용종횡기(3), 조선일보, 1929. 2. 14
원산노련에는 이처럼 오늘날의 생활협동조합을 비롯하여 의료생협, 공제조합, 신용조합 등 거의 모든 협동조합을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었다. 조합원에게 꼭 필요한 잡화와 미곡을 시가보다 20~40% 싼값으로 공급하였고 1929년 소비조합의 한 달 거래액이 1만2000원, 조합의 운전자금이 약 3~4만 원이었다는 사실은 원산노련의 소비조합 사업이 얼마나 활성화되어 있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게 한다. 1926년~1929년 당시 조선 쌀 가격이 1섬당 31.93원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엄청난 거액이라고 할 수 있다.
원산노련 조합원들은 가입 시 30원의 가입비와 소비조합 출자금 20원을 내야 했다. 그리고 달마다 노임의 100분의 1을 조합비로 납부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런 의무금을 납부하고 일단 조합원이 되면 사고로 일을 못하거나 병에 걸려 누워 있더라도 최소한의 최저생활은 가능하게끔 구제부 사업을 벌임으로써 형제보다 강한 노동자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 이 글은 녹색평론 7·8월호에 실린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박승옥 공동대표 1970년대 학생운동을 하다 제적됐다. 1983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조영래 지음)을 펴냈다. 박승옥은 이를 계기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1985년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정책실장, 1987년 전태일기념사업회 부설 구로노동상담소 개설, 1990년 전태일노동자료연구실 대표 등으로 일했다. 현실 사회주의 붕괴 뒤인 92년 농촌으로 내려가 10여 년 동안 생태, 환경, 에너지 문제에 천착했다. 2005년 6월부터 재생가능에너지 시민기업인 '시민발전' 대표로 농업 및 에너지의 자립·자치와 우리 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해 힘쓰고 있다. 최근 석유와 에너지에 대한 논쟁적인 문제제기를 담은 책 <상식: 대한민국 망한다>(2010년)를 썼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공제조합 운동을 하기 위해 2009년 9월 풀뿌리공제운동연구소와 한겨레신문사가 공동으로 결성하고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라는 이름으로 2010년 2월 공식 출범했다. 현재 장례문화 공동체 '상포계'를 운영하고 있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상포계는 작년 12월 8일 영면한 고 리영희 선생님의 장례를 주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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