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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마(馬)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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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마(馬)의 변천

[김유경의 '문화산책']<12> 제주마(馬)를 찾아서 1

제주도와 말은 떼어놓고 볼 수가 없다. 화산섬의 토질에서 자라는 풍부한 초 자원과 맹수 없는 온난기후대가 제주도를 천혜의 목축장으로 만들었다. 선사시대 유물에도, 삼성혈의 탐라국 세 시조의 등장에도 말이 동반하며 고려, 조선 시대를 거쳐 새 품종 말을 연구하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곳은 변함없는 말의 고장이다.

▲ 제주도 중산간(中山間) 일대 오름의 목초지에서 방목 중인 말들. 가장 아름다운 제주풍경의 하나이다. ⓒ 안홍범

제주도 중산간(해발 200-600m 지역의 통칭) 일대 목초지에서 무리지어 풀을 뜯고 있는 말은 제주도의 그림이다. 키가 작으나 힘센 제주말, 전 세계적인 경주마 더러브렛(Throughbred), 둘의 혼혈인 한라마(제주산마라고도 한다), 세 종류 말이 있다. 말은 이제 옛날처럼 군용이나 운송교통, 농경용으로는 용도가 없고 현대인의 생활스타일에 맞춰 경마용이나 승용 말의 생산사육이 활발하다. 관련 산업도 제주도에서 진행 중이다. 국립축산과학원 난지축산시험장에서 말의 육종을 연구하는 이종언 박사는 "전국에 있는 2만7천에서 8천두 말의 90%가 제주도에서 생산된 것이고 말의 사육도 70%가 제주도에서 이뤄집니다"라고 말했다. 말의 고장임을 여실히 알려주는 것이다.

▲ 난지축산시험장에서 육성한 새 품종의 한국 승용마들. 선조 대대로 좋아하던 검은 털빛과 얼루기를 육종한다. ⓒ 이종언

제주도에서 보는 말은 오래된 한국사와 말 인문학의 현장이기도 하다. 부여와 고구려의 명마는 일찍 알려졌지만 제주에서는 1073년 '고려 문종에게 명마를 보냈다'는 기록이 처음이다. 고려 시대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대몽항쟁을 펼치다 토벌된 뒤 원나라가 이곳에 군마를 길러 낼 직영 목마장을 설치하면서 역사의 흐름이 바뀌게 된다.

"고려 때인 1276년 대완마 160필과 말 기르는 몽고인 전문가 목호가 다수 들어온 것이 후일 조선의 목장체계로 이어집니다. 삼성혈시대의 토종 말 자원은 사라졌다 보고 대완마가 제주도의 거친 환경에 적응하면서 오늘의 몸은 작으나 지구력 강한 제주마가 된 겁이다.

현대에 와서는 제주 고유의 말 자원과 기술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승용마를 육성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털의 색이 아름답고, 온순하고, 지구력이 우수하며, 환경에 적응성이 뛰어납니다. 털 색깔은 흑색(가라) 또는 흑백 얼루기(가라월라)로 고정하고 있어요. 그 이유는 우리 선조들이 흑색마를 최고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말의 품성을 우수하게 만드는 일은 힘든 작업이지만 자부심을 가지고 조만간 이곳에서 육성한 승용마가 곳곳을 뛰어다닐 날을 그려보곤 합니다." 제주도가 말의 고장으로 맡은 '제주말의 미래'다.

▲ 갓 태어난 망아지의 건강상태를 살피는 이종언 박사. ⓒ 이종언

인류역사상 말, 특히 명마는 말을 대동한 전쟁을 통해 권력의 역사를 바꾼 힘이기도 했다. 모든 지배자들이 명마를 갈망했다. 핵무기 제조하는 것과 같은 비중이었을 것이다. 중앙아시아 페르가나(대완국;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 지방의 명마, 대완마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리며 핏빛 같은 땀을 흘린다고 알려졌다. 그 때문에 대완마를 한혈마라 부르기도 한다.

서기전 서역에 파견한 특사 장건이 돌아와 전한 정보로 이 말의 존재를 알게 된 한무제의 군사가 대완국을 침략해 마지막 군사 한 명까지 전사하는 처절한 전투 끝에 대완국 종마를 뺏어다 키우기 시작했다. 원나라 때 와서 여러 목축장 중의 하나, 제주도에서 키운 대완마들이 1276년부터 1백 년 동안 계속 원으로 차출됐다.

고려말 공민왕 때 제주도는 도로 고려에 귀속되고 친명정책 아래 말 관리도 직접 하게 됐다. 이때 목호들이 '원나라의 원수 명나라에 말 2천 필을 내줄 수 없다'하고 반란을 일으켜 제주도의 관리들 수백 명을 살해했다. 1374년 최영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이들을 진압했다.

▲ 성산 일대 오름에서 본 제주마들. 멀리 바다 건너 성산 일출봉이 보인다. ⓒ 안홍범

지난 봄 서귀포 부근 외돌개를 지날 때 이 바위가 최영장군의 위엄을 과시하던 역할을 했다던 말을 상기했다. 조선의 건국자 이태조와 대척점에 있던 최영장군의 흔적을 제주마와 연관해 이곳 아름다운 외돌개 바위 옆 올레 길에서 보게 된 것이다. 이성계가 타던 8필의 말 중에도 제주말이 있었다고 한다.'말을 타고 절벽을 내려올 만큼' 이태조는 말을 능숙하게 잘 타던 무인이었다는 글도 읽었다.

조선 시대 들어 제주도의 목장은 10개의 큰 목장단위인 10 소장으로 구분했다. 세종대에는 말이 구역을 뛰어넘어 도망가지 못하게 한라산 10소장 둘레에 걸쳐 쌓은 돌담인 잣성이 축조됐다. 말의 절대 수 확보를 위해 말고기 먹는 것도 금지했다.

숙종28년(1702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은 제주도 내 국방과 군민의 풍속 등을 점검한 기록을 화공 김남길의 그림 40장면과 함께 엮은「탐라순력도」라는 책을 남겼다.

이형상의 「탐라순력도」 중 1702년 10월15일(음력) 산장(山場)에서 마필 수를 확인하는 장면. '산장구마' 부분(김남길 그림). 제주목사, 판관, 감목관, 현감, 목책만드는 군인 2602명, 말을 모는 군인3720명, 목자와 보인등 214명이 동원됐다.
제주목 관아에서 제본이 아름다운 이 책 「탐라순력도」를 싸게 팔고 있어 구해볼 수 있고 국립제주박물관에도 탐라순력도가 중요한 비중을 갖고 전시돼 있다. 제주관광공사의 오창현 팀장이 이 기록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순력도의 많은 부분에 말을 점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성 안팎에 인근 목장의 말을 모아놓는 원형의 목책을 설치한 뒤, 말이 한 마리씩 통과하게 한 좁은 목책 통과로를 거치며 숫자를 세었음을 알 수 있죠. 그러면서 말의 질병, 좋은 말 선별 등의 과정을 거칩니다"

제주도에서는 서울 조정에 해마다 조공마 200필, 진상마 60필, 제주목사 등 관리에게도 몇 필, 또 3년마다 중복해서 그만큼의 말을 차출해냈다. 조정에서는 말의 상태가 좋지 않으면 관련자를 파직시키는 중징계를 취했으므로 제주에 부임한 목사, 판관 등 관리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좋은 말을 취하여 진상하려 했다.

군사의 최우선 장비인 말을 제주도 전역을 돌며 꼼꼼히 살펴 기록한 외에도 이형상목사는 제주도에 있는 불교의 500절, 무속신앙의 500당을 때려 부셨다고 한다. 관찰사이기도 했던 이형상은 무시무시한 관리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때 살아남은 무속 신들 모험담도 있어 제주도 역사의 깊이를 알게 하고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제주민속박물관 진성기관장한테서 말 관련 유물 약간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한도 끝도 없이 들을 수 있었다.

「탐라순력도」에는 활 쏘는 모임, 경로 모임, 성산의 일출, 귤이 노랗게 익은 귤림원에서 목사일행이 음악이랑 들으며 풍류를 즐기는 장면도 첨부됐다. 그러나 제주도 사람들에게는 조선 시대에 제주도 특산품인 귤을 열매 하나까지 철철이 군사들에게 감시당하고 서울 대궐로 보내느라 풍랑 이는 제주해협을 건너다 바다에 빠져 죽는 제주사람들의 고생스런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었다. 서울에서는 임금이 성균관 유생들에게 귤을 나눠줄 때 서로 받으려다 죽는 인사사고까지 났다. 귤이 그럴진대 말을 기르고 보내는 것은 더 심한 규제와 압박이 가해졌다.

좋은 말을 갖는다는 것은 특별한 자랑이었는 듯, 홍 씨 집안의 한사람은 '평소 뇌물을 안 받다가 말 한필은 유혹을 이기지 못해 받아가지고 파직된 고조할아버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역사상 제주도에 말이 가장 많았던 시기는 고려말-조선초에 걸쳐 2만두가 방목되던 때이다. 탐라순력도에 나오는 국가 소유의 말은 9372필, 소 703필, 인구수는 4만3515명이다. 민간이 소유한 말은 얼마나 됐는지 모른다.

"세월이 가면서 우수 마필이 빠져나가고 또 척박한 환경에 적응해 가는 동안 제주도의 대완마들이 점점 왜소해지니 종마를 데려다 개량하자는 건의가 숙종, 영조 때 나오죠" 이종언 박사가 말했다.

자동차의 등장이후 말의 전통적 용도가 급격히 폐기됐다. 1984년 제주도 순종말은 1천 마리가 못되었다. 1986년에 혈통이 바른 제주마 순종 몇십 마리가 천연기념물로 정해져 보살핌을 받기 시작했다. 2011년 현재 제주도청의 집계로 제주마가 1392마리(혈통이 등록된 순종은 200마리), 서러브렛이 4179마리, 혼혈종 한라마(제주산마라고도 한다)가 1만6692마리, 모두 2만2223마리가 있다. 제주도 내 1157농가에서 기른다. 매년 1000마리가 도축된다.

▲ 현대인의 일상에서 말은 경마나 승마 같은 스포츠를 통해 사람들과 가까이한다. ⓒ 이종언


▲ 중문의 말고기 전용식당에서 차려나온 말고기 양념구이. 육회서부터 불고기까지 다양하다. ⓒ 안홍범

말 산업은 현대인의 레저인 경마와 승마, 식용고기와 말기름 비누, 가죽 같은 가공산업으로 바뀌었다. 1980년대 이후 제주에 뭍사람들 출입이 많아지면서 말고기 식당이 늘어나 현재 50군데 말고기 식당이 있다. 소고기 비슷한 맛이었다. 경마는 제주마를 되살린 특효처방이기도 했다. 제주 경마장에는 특별히 제주마들만 출연하는 경마코스도 있다. 혈통이 등록돼 칩이 장착된 제주마가 국립축산원을 통해 매년 80필에서 90필씩 생산돼 경마용으로 훈련된다. 등에 70kg에서 80kg의 짐을 지고 달리는 제주마 지구력 대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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