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명실상부한 스포츠 강국이다. 2012 런던 올림픽에서 한국은 금메달 13개를 따냈다. 축구로 세계 네 손가락 안에 들기도 했다. 프로야구는 흥행 돌풍을 맞고 있고, 선전을 보이는 종목도 날이 갈수록 늘어난다. 그러나 "한국이 스포츠를 즐기는 나라이냐"는 물음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엄밀히 말해 한국에서 체육인구는 선수로 자라나는 극소수와 성인이 된 후 건강관리에 집중하는 일부 어른 뿐이다. 이처럼 극단적으로 이원화된 한국의 체육정책은 스포츠인구 부족, 체육시설 미비 등의 부작용을 낳고 있다. 특히 은퇴선수들에게는 불안한 미래만을 남겨두고 있다.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생활체육 개선을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편집자> |
이제는 논란의 해설이나 SBS 오락 프로그램 <강심장> 출연으로 더 익숙한 전 스피드 스케이팅 국가대표 제갈성렬(42). 그는 지난해 11월 8일을 잊지 못한다. 2002년부터 감독으로 재직했던 춘천시청 빙상팀의 해체 통보를 갑작스럽게 받은 날이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확정 이후 한국의 '빙상 메카'라는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논란이 일어났음에도 결국 지난 3월 이 팀은 해체됐다.
감독과 선수 모두 갈 곳을 잃었다. 평생 운동밖에 모르고 산 사람들이다.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이자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의 대들보로 불리던 여상엽은 군 입대를 선택했다. 팀 해체 소식이 알려진 후 그가 "죽고 싶다"고 남긴 글은 파문을 일으켰다. 최진용은 소속 팀 없이, 코치도 없이 홀로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제갈 전 감독은 할 일이 없어 세차장으로 향했었다. 그는 "배운 건 운동밖에 없고, 살아갈 돈은 필요했다. 뭐든 해야 했다"고 말했다. 박사 학위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시간강사 월급은 얼마 되지 않는다. 운 좋게 새로운 직업(고급 헬스 클리닉 이사)을 구했으나, 구원의 손길이 없었다면 한 때 한국 체육 최고의 엘리트였던 이의 인생이 어떻게 됐을지는 누구도 알기 어렵다.
'운동 기계'의 불안한 삶
그나마 제갈 전 감독은 성공한 사례다. 아이들은 진로를 운동으로 택하는 순간부터 일상과 멀어진다. 학원 체육 개혁이 지속적으로 시도되고 있고, 성공사례도 나오곤 있으나, 여전히 엘리트 스포츠는 학원 스포츠와 완전히 괴리돼 있다.
경기도의 한 중학교에서 역도부 활동을 하는 김동진(15, 가명) 학생의 일과는 다른 아이와 완전히 다르다. 새벽 한 시간 동안 기초체력 훈련을 받은 후 오전 수업에 들어간다. 지쳐서 보통 잠만 자기 일쑤다. 오후 수업은 훈련을 받느라 완전히 빠진다.
"역도부 형들 빼곤 친구가 없다"고 동진이는 말했다. 반 아이들과는 PC방도, 미팅도 나가보지 못했다. 동진이는 사재혁 선수를 좋아한다. "잘 생겼고, 성공한 국가대표 선수라서" 좋단다. 동진이도 사재혁 선수만큼 성공하고 싶지만, 그러기 위해선 더욱 열심히 훈련해야 한다는 걸 안다. 더 열심히 훈련해야 한다는 건, 더 '비일상적인' 삶을 감내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삶이 끝나고 나면? 그 후의 삶은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동진이가 사재혁 선수처럼 되기 위해선 태릉선수촌에 입소해야 한다. 한국에서 국가대표 선수로서의 경력은 선수촌 입촌으로부터 시작한다. 입촌하는 순간 외부와는 철저히 담을 쌓은 삶이 열린다.
제갈 전 감독의 경우 중학교 2학년이던 지난 1987년부터 2001년 은퇴할 때까지 국가대표생활을 했다.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의 경우, 시즌은 3월 종료된다. 그리고 4월 한 달 간 휴식을 취한다. 나머지 11개월 내내 모진 훈련이 이어진다. 외부와의 접촉은 철저하게 차단된다. 친구들과 미팅을 나가는 것도,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마음 놓고 여행을 가는 것도 어려웠다. 그는 이 생활을 14년 간 했다. 운동 외엔 배운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었다.
제갈 전 감독은 "대부분 국가대표 선수들이 한창 혈기왕성한 시기에 선수촌에 입촌한다. 어마어마한 심리적 고통을 겪는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기가 힘들다"며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는 무단이탈 등이 심심치 않게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비록 체육 정책 선진화를 위한 노력이 국가적으로 많이 시행됐으나, 기본적인 엘리트 스포츠 육성 방식은 전혀 변한 게 없다.
▲운동선수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위태롭다. '성직자'와 같은 자기와의 싸움을 이겨내야 하며, 은퇴 후에는 불안한 삶과 마주해야 한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뉴시스 |
불행의 사슬, 이제는 끊을 때
그나마 메달을 따면 다행이다. 이제 금메달 몇 개를 따든 연금 수령액은 정해져있다곤 하지만, 그래도 미디어의 주목을 받고 은퇴 후 그나마 다양한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나 메달 획득에 실패하면, 선수촌에서 흘린 땀을 보장받을 길이 막막해진다.
제갈 전 감독은 "메달을 못 따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평생을 바친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며 "이 선수들이 은퇴하면 무얼 할지, 어떻게 살지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개탄했다.
은퇴한 선수들의 불행한 미래는 이미 익숙한 레퍼토리가 됐다. 지난 4월에는 전직 프로야구 선수 A와 전직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 B, 탁구 선수 C가 조직폭력배와 함께 사기도박판을 벌이다 경찰에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국가대표 출신 전직 프로축구 선수 김동현은 승부조작으로 축구계에서 쫓겨난 후 전직 프로야구 선수 윤찬수와 함께 부녀자를 납치한 혐의로 구속됐다.
이들처럼 범죄에 빠지지 않더라도 상당수 운동선수 출신이 불안한 미래에 흔들린다. 국가대표선수협의회 측에 따르면, 상당수 은퇴 선수들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 이들 중 적잖은 이는 막노동판을 전전하거나 단순 기술직을 배우기 위해 사회생활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물론 성공하는 사례도 많다. 그러나 실패가 압도적으로 더 많은 게 현실이다. 가장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는 원인이 수업 배제다. 2009년 체육과학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이 해 81.1%이던 중학생 선수의 수업이수율은 고등학교로 가는 순간 58.5%로 급격히 떨어졌다.
정희준 동아대 생활체육학과 교수는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을 못 다루는 학생이 태반이다. 운동선수로 길러진 학생은 사회가 요구하는 업무를 수행할 능력을 배우지 못 한다"며 "보통 사람이 살 수 있는 '소박한 삶'에 진입하기가 굉장히 힘들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단순히 수업에 참여하지 않아서, 곧 배우지 않아서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수업에 흥미를 잃고 학업을 게을리 하는 학생은 운동선수가 아니라도 많다. 문제는 단순히 수업 참여의 유무가 아니라, 급우들과의 '일상적 하루'에서 배제된다는 점이다. 운동선수가 가지는 사회화 과정과 다른 학생의 길이 다르다는 얘기다.
정 교수는 "운동선수들은 체육계의 조직생활밖에 해본 적이 없다. 이 세계의 폭력적인 논리 외에는 배운 적도, 체험한 적도 없다"며 "이들이 선수생활을 그만두고 나면,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서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그 생활의 논리에 적응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말했다.
체육 이원화 정책을 폐기하라
운동선수의 은퇴 후 삶이 불안해지는 보다 현실적 이유는 또 있다. 갈 곳이 없다는 점이다.
배운 거라곤 운동밖에 없는 선수들이 찾을 제2의 삶은 결국 지도자밖에 없다. 그런데 엘리트 체육과 생활 체육이 철저하게 이원화된 한국의 운동선수는 극히 적다. 일본의 경우 축구 등록선수는 93만여 명이며 야구는 115만 명에 달한다. 탁구 등록선수도 30만 명이 넘는다.
반면 한국의 축구선수는 2만 명이다. 핸드볼과 필드하키, 탁구 등 비인기종목 등록선수는 채 2000명이 되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코미디 같은 일도 일어났다. 육상연맹은 지난 달 10일 '5대 희망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그 중 하나로 유망주 조기 발굴을 꼽았다. 최동호 스포츠평론가는 이에 대해 "한 마디로 말해 운동을 하겠다는 아이가 없으니 전국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스카우트하겠다는 것"이라고 평했다. 엘리트 중심 체육정책에 빨간불이 켜진지 오래라는 점도 중요하지만, 당장은 선수가 없어 은퇴한 선수들이 갈 곳도 부족하다는 뜻이 된다.
정 교수는 "그나마 태권도의 경우 김운용 대한체육회장 시절 태권도장 붐을 일으켜 은퇴자들이 먹고 살 길은 터 놨다. 그러나 다른 종목, 특히 레슬링 등의 선수들이 갈 곳은 없다"며 "엘리트 체육 정책 때문에 선수들이 은퇴 후 인생의 막다른 길에 몰린다는 지적도 가능한 지경"이라고 말했다.
▲부녀자 납치 강도 혐의로 검거된 전 프로야구 선수 윤찬수는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김동현과 함께 지난 4월 26일 새벽 차량에서 내리는 부녀자를 칼로 위협해 납치하고 경기 용인, 분당, 성담 일대를 끌고 다니며 피해자 카드로 현금 인출을 시도하는 등 103만원 상당을 강취해 특수강도 혐의로 검거됐다. 이들의 은퇴 후 삶은 어떠했을까. 왜 이들은 이런 범죄에 쉽게 노출되는가. ⓒ뉴시스 |
"예전에 울산에 지도자 강의에 가서 겪은 일이다.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하니 한 지도자가 '아이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도 대학에 못 가고, 운동을 해도 대학 가기 어려운 건 마찬가진데, 그러면 차라리 운동을 계속하는 게 낫지 않느냐'고 했다. 당장 유명 스포츠선수들이 '학부모의 입장'에서 현재의 학생 리그제(엘리트 체육의 대안으로 나온 주말리그제)에 반대한다는 인터뷰를 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나마) 운동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다. 실패한 자의 목소리는, 실패했기 때문에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스포츠 개혁을 요구하는 전문가들은 하나 같이 엘리트 육성 중심의 한국 체육정책을 일본처럼 과감히 생활체육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간이 들더라도, 선수들이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밟아 은퇴 후 삶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고, 엄격한 훈육 중심의 국가체육 정책을 극복해야 한다는 얘기다.
정 교수는 "당장 답이 안 나오더라도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며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엘리트 체육의 벽을 허물고 저변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병호 잠신고 교사(체육교사)는 "스포츠영웅의 활약만 기뻐하고, 감동하는 게 체육의 본질이 아니"라며 "이런 체육 정책이 학교 체육의 왜곡된 현실을 재생산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보편 교육을 지향하는 학교교육의 일환으로 학교 체육이 자리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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