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셀타 비고는 강팀이란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역대 최고 성적은 프리메라리가 4위를 차지하며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따 낸 2002/2003시즌이다. FA컵 격인 코파 델 레이에서도 준우승만 세 차례를 기록했다. 긴 역사 동안 1부 리그와 2부 리그를 수 없이 오간 전형적인 에스컬레이터 클럽이다. 올 시즌 다시 1부 리그로 돌아오기까지 다섯 시즌 동안 2부 리그에 머물렀다.
국내에 팬 층조차 없는 이 클럽이 주목을 받고 있다. 박주영(27)의 새 소속팀이 됐기 때문이다. 박주영은 유럽축구의 여름이적시장 마감 직전이던 8월 31일 원소속팀 아스널에서 셀타 비고로 1년 간 임대됐다. 2011년 여름 장밋빛 희망을 안고 명문팀 아스널로의 이적을 택했지만 주전경쟁에서 밀리며 끝 없는 추락을 경험했던 박주영은 임대를 통해 희망의 탈출구를 찾아나섰다.
지난 15일 발렌시아와의 리그 4라운드 원정 경기에 교체 투입되며 프리메라리가 데뷔전을 치렀던 박주영은 일주일 뒤 헤타페를 상대로 홈 팬들에게도 인사했다. 그리고 박주영은 교체 투입된 지 3분 만에 이날 경기의 결승골이 된, 감각적인 리그 데뷔골까지 쐈다. 셀타 비고의 홈구장 발라이도스에서 1년 간 끊겼던 유럽에서의 성공 스토리를 다시 써내려 가기 시작한 것이다.
악몽 같았던 아스널에서의 1년
누구나 인생의 갈림길에 선다. 2011년 여름 박주영도 그랬다. 2008년 AS 모나코에 입단하며 유럽 축구로 진입한 그는 뛰어난 득점 감각과 축구 지능으로 빛을 뿜어냈다. 첫 시즌에 35경기에서 6골을 기록하며 적응을 마쳤고 2009/2010시즌에 33경기에서 9골, 2010/2011시즌 33경기에서 12골을 기록하며 매 시즌 발전을 이어갔다. 프랑스 축구계는 박주영을 명실상부 모나코의 에이스로 인정했고 유럽의 주요 클럽들도 그의 이름을 주목했다.
2010/2011시즌 모나코가 리그 18위로 강등을 당하자 박주영은 새로운 팀을 찾아 나섰다. 당초 박주영은 프랑스 리그1(리그앙)의 새 강자 릴OSC 입단이 유력시됐다. 2010/2011시즌 리그 챔피언이었던 릴은 몇몇 주전들의 이탈로 인한 공격 보강을 위해 박주영 영입을 타진했고 대부분의 이적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런 상황에서 예상보다 낮았던 박주영의 몸값(300만 유로 추정, 옵션 별도)을 확인한 아스널이 끼어들었다. 아스널의 아르센 벵거 감독은 이적시장 막바지에 박주영 측에 러브콜을 보냈고 박주영 역시 릴에서 메디컬테스트가 진행되는 과정에 급히 런던으로 날아갔다.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라는 새로운 무대로의 도전이었다. 릴 측은 계약 직전 돌연 틀어버린 박주영의 행동을 비판했지만 이미 아스널 유니폼을 입은 뒤였다.
하지만 성공적일 것만 같았던 아스널에서의 시간은 박주영에게 악몽이 됐다. 아스널은 박주영에 등번호 9번을 줬지만 그것은 아무 것도 보장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박주영은 벵거 감독에게 최후의 보험과 같은 존재였다. 원톱 시스템을 쓰는 아스널에서 박주영은 로빈 판 페르시, 마루앙 샤막에 이은 제3의 옵션이었다. 벵거 감독은 부상이 잦은 판 페르시와 시즌 중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참가를 위해 팀을 떠나야 하는 샤막의 공백에 대비해 박주영을 데려왔던 것이다. 결국 상황은 벵거 감독에겐 최상, 박주영에겐 최악으로 흘러갔다. 판 페르시는 시즌 내내 별 부상 없이 리그 38경기에 모두 출전해 30골을 터트리며 득점왕에 올랐다. 상황종료였다. 박주영에게 주어진 기회는 리그 1경기 교체 출전, 리그컵 3경기 출전이 전부였다. 리그컵에서 볼튼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었지만 입지 변화에는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꾸준한 출전이 어려워진 박주영의 경기 감각은 점점 떨어졌다. 조광래 감독에게서 최강희 감독으로 지휘봉이 넘어간 A대표팀에서도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3월에는 모나코 장기체류권을 얻어 본인 의사에 따라 병역을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병무청의 발표까지 나오며 그의 병역 기피 의혹이 일기도 했다. 위기의 박주영을 구출한 것은 홍명보 감독과 올림픽이었다. 홍명보 감독은 주변의 만류와 여론의 공격을 감수하고 박주영을 올림픽대표팀 명단에 포함시켰다. 박주영은 기자회견을 통해 "반드시 병역 의무를 수행하겠다"는 약속을 한 뒤 올림픽을 위한 몸 만들기에 나섰다. 결국 올림픽에서 박주영은 스위스전 동점골과 동메달을 결정 짓는 일본과의 3, 4위전에서의 선제골로 홍명보 감독의 믿음에 보답했다. 올림픽에서의 인상적인 활약은 셀타 비고가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촉매제가 되기도 했다.
▲박주영이 지난 1일(한국시간) 스페인 비고에 위치한 셀타의 홈구장 발라이도스에서 열린 입단식에 참석해 임대 이적을 확정했다. 입단식을 마친 박주영이 수 백명의 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뉴시스 |
치유의 땅 스페인, 가짜 9번이 돼야 하는 박주영
스페인은 이탈리아와 더불어 한국 축구에 아직 성공이 허락되지 않은 유럽 축구의 주요 무대 중 하나다. 이천수(레알 소시에다드, 누만시아)와 이진호(라싱 산탄데르), 두 명의 선수가 과거 프리메라리가에 도전했지만 모두 성공을 거두는 데 실패했다. 두 선수의 실패는 하나의 전례가 됐고 한국 선수에 대한 이미지를 남겼다. 잉글랜드나 네덜란드, 독일과 달리 비유럽권 선수에 대한 제한 규정이 있는 스페인은 이후 한국 선수 영입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셀타 비고가 100만 유로라는 클럽 규모를 상회하는 임대료를 지불하면서까지 박주영을 데려온 것은 그를 중용하겠다는 의지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박주영은 입단식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았고 파코 에레라 감독은 그의 전술적 역할을 "패스 게임을 마무리하는 해결사"로 명확히 한 상태다.
4-2-3-1 포메이션을 가동하는 셀타 비고는 최전방에 장신에 힘이 좋은 전형적인 타깃맨 대신 작지만 골 감각과 기술이 좋은 공격수를 선호하고 있다. 다섯 명의 미드필더가 펼치는 패스 플레이의 마침표를 영민한 판단력과 마무리로 결정짓길 원하는 것이다. 현재 세계 축구의 주요 화두 중 하나인 '가짜 9번(False nine)'의 역할이다. 가짜 9번이란 과거 전형적인 공격수의 상징이었던 9번 자리에 창조적인 움직임을 지닌 섀도우 스트라이커와 공격형 미드필더 스타일의 선수를 기용, 점유율 중심의 패스 게임의 위력을 극대화시키는 전략이다. 세계 최강으로 통하는 FC바르셀로나와 스페인 대표팀이 모두 가동하며 전세계적으로 이 전략이 확산되고 있다.
셀타 비고도 '가짜 9번' 전략을 택했다. 현재 그 자리에는 이아고 아스파스가 주전으로 기용되고 있다. 지난 시즌 2부 리그에서 23골을 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했던 아스파스는 176cm의 비교적 단신이지만 뛰어난 테크닉과 공간 침투 능력을 지녔다. 플레이 스타일 면에서 박주영과 흡사하다. 아스파스는 섀도우 스트라이커와 공격형 미드필더로도 투입될 수 있다. 결국 에레라 감독은 박주영 투입 시 아스파스를 내려서 배치하며 팀의 공격력을 극대화하겠다는 의도다. 팀 내 신뢰가 절대적인 아스파스는 박주영과 경쟁보다는 공존해야 할 관계다. 박주영으로선 팀의 제2 공격수 자리를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베테랑 공격수인 마리오 베르메호, 엔리케 데 루카스와의 경쟁이 중요하다.
헤타페전에서의 골은 여러 면에서 박주영이 셀타 비고에서 밝은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음을 보여줬다. 우선 골이 지니는 가치가 특별했다. 4라운드까지 1승 3패를 기록했던 셀타 비고는 박주영의 결승골로 승점 3점을 추가, 강등권을 탈출해 단숨에 중위권으로 솟아 올랐다. 올 시즌 프리메라리가 잔류가 절대적인 목표인 셀타 비고로서는 시즌 초반 일정 운용에 숨통이 트이게 됐다. 득점 장면도 탁월했다. 박주영은 에레라 감독이 원하는, 상대 수비와의 직접 경쟁이 아닌 영리한 배후 침투에 의한 확실한 마무리로 골을 넣었다. 올 시즌 박주영과 함께 영입된 덴마크 국가대표 미카엘 크론-델리와의 호흡이 완벽했다. 30여분의 짧은 출전 시간에도 임팩트 있는 모습을 보인 박주영은 경기 후 팀 동료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경기 최우수 선수로도 선정돼 언론과 팬들의 집중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아스널을 떠나 셀타 비고에서 축구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하고자 하는 박주영. 그에게 스페인 무대는 치유의 땅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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