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잠실 경기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장면이 나왔다. 9회말 0-3으로 뒤진 LG의 공격, 2사 주자 2루에 둔 상황에서 SK 투수가 정우람으로 바뀌었다. 세이브 상황이었다. 야구에서 아웃카운트 하나도 못 잡고 3점을 내주는 일은 흔히 일어난다. SK로서는 당연히 할 수 있는 투수교체였다. 반면, LG로서는 충분히 따라잡을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정우람이라도 사람이다. 가끔이지만 볼넷도 내주고 홈런도 맞는다. 볼넷 하나와 홈런 한 방이면 동점, 볼넷과 안타에 홈런 한 방이면 역전도 가능했다. 끝까지 남아서 응원한 LG팬들은 대기타석의 박용택을 향해 열광적인 응원의 원기옥을 모아 보냈다.
그런데 이때 LG 벤치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벌어졌다. 김기태 감독은 박용택을 불러들이고 대타로 신인투수 신동훈을 내보냈다. 조계현 수석코치가 결사 만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신동훈에게 남들이 못 본 타자로서의 재능이라도 발견한 것일까. 그게 아니었다. 김 감독은 이어 대기타석에 있던 정의윤도 벤치로 들어오게 했다. 신동훈은 타석에 전봇대처럼 선 채 가운데 들어오는 직구를 바라보기만 했다. 4구 삼진. 그대로 경기는 끝났다. 같은 시각, 평행우주에서 펼쳐진 LG와 SK의 경기에서는 9회말 2아웃 이후 3연속 안타와 홈런으로 LG가 대역전승을 거두고 있었다. 물론 박용택이 정우람에게 삼진을 당하며 경기가 끝나는 평행우주도 존재했다. 김기태 감독은 하필 그 수많은 평행우주 가운데, 최악의 것을 집어들었다.
▲12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12 팔도 프로야구 LG 트윈스와 SK 와이번스의 경기에서 9회말 2사 2루 상황 LG 박용택 대타 신동훈이 스탠딩 삼진되고 있다. ⓒ뉴시스 |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김기태 감독의 '소신'이었다. 김 감독은 "SK에서 LG를 기만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SK에서 9회말 1사 후에 박희수를 내리고 이재영을 올린 게 "장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박희수가 8회 공 7개를 던졌다면 9회 끝까지 던져 세이브를 하거나, SK가 최선을 다한다면 정우람을 9회 처음부터 냈어야 한다"며 투수기용의 새로운 '불문율'도 제시했다.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할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하지도 않았다"며 굳은 소신도 드러냈다.
SK 이만수 감독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김기태 감독의 눈에 '페어'로 보인 공은, SK 입장에서는 파울이었다. 박희수는 올해 혹사에 시달리는 중이라 보호가 필요했다. 이재영은 (김기태 감독 눈에는 장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좌타자와 LG를 상대로 무척 강했다. 이진영 상대로 내보낼 만한 투수였다. 아웃카운트 2개 정도는 충분히 기대해볼 만했다. 또 이만수 감독 입장에선 굳이 정우람을 쓰지 않고 경기를 끝내고 싶은 의도도 있었다. 정우람은 최근 컨디션이 좋지 않다. LG를 상대로 기만이나 농락을 하기는커녕, 꺼내들 수 있는 최선의 카드를 전부 사용해 가며 전력을 다한 셈이다. 그리고 그런 야구야말로 지금까지 SK가 지켜온 SK야구의 '소신'이었다. 그런 소신이 있기에 지금까지 SK는 꾸준하게 강팀의 면모를 유지해 올 수 있었다.
소신이라면 LG 김기태 감독도 어디가서 뒤지지 않는다. 선수 시절부터 굳은 의지와 자존심으로 최고의 왼손 강타자로 군림했다. 강한 카리스마로 후배들을 휘어잡았다. 일본에서 코치 연수를 하면서도, LG 2군 감독으로 있는 동안에도, 김기태가 리더로서 높은 평가를 받게 만든 것은 강한 자존심과 한 번 정한 길은 돌아보지 않고 밀어붙이는 소신이었다.
김기태 감독의 소신은 올해 LG 감독을 맡은 뒤에 긍정적으로 발휘되어 왔다. 주축 선수들이 몽땅 빠져나간 '9년 연속 4강 실패' 팀을 맡아서도 한탄보다는 긍정적인 신념을 선수단에 불어넣었다. 단기적인 성과보다는 큰 그림을 바라보는 선수단 운용을 뚝심있게 밀어붙였다. 단적인 예가 시즌 초반 리즈의 '16구 연속 볼' 사건이다. 일찌감치 투수를 교체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상대 입장에서는 '기만'으로 여길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 나무보다는 숲을 본다고 해서 팬들에게 '숲기태'라는 별명도 얻었다. 김 감독의 소신에는 분명한 이유와 원칙이 있었고,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그 소신은 초반 LG의 돌풍을 주도한 힘이기도 했다. LG는 예상을 깨고 시즌 초반 상위권을 질주하며 프로야구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비록 시즌 중반 이후 전력의 한계를 드러내며 하위권으로 추락했지만, LG는 일찌감치 시즌을 접고 리빌딩 모드에 돌입하지 않았다. 선수 기용에서는 젊은 신예들을 위주로 기용하며 '미래'를 대비하는 운용을 했지만, 실제 게임에 들어가서는 '이기는 경기'를 추구했다. 누가 봐도 4강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도, 김 감독은 한 번도 자신의 입으로 '4강에 가기 어렵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LG는 시즌 막판 들어 다시 힘을 냈다. 8월 29일부터 두산-롯데-삼성과 펼친 6경기에서 3승 1무 2패로 고춧가루를 잔뜩 뿌렸다. 롯데와의 첫 경기에서는 연장 12회까지 0-0 혈투를 펼치며 상대의 진을 뺐다. 갈길 바쁜 5위 KIA와의 3연전에서는 싹쓸이를 달성하며 호랑이 가죽을 벗겼다. 9월 10일까지 7경기 5승 2패. 끝까지 시즌을 포기하지 않는 소신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라인에 걸친 파울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페어가 된다. 김기태 감독은 "상대가 농락한다"고 했지만, 최근 9경기에서 6승 1무 2패를 거두고 있는 팀을 상대로 '농락'하거나 '장난칠' 팀은 어디에도 없는 법이다. 그 경기를 지켜본 사람 중에 누구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설령 이재영 투입이 LG를 우습게 보고 한 '장난'이었다고 쳐도, 그렇다면 흠씬 두들겨서 경기를 승리로 이끌면 '응징'이 될 일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다가 다시 죽인다"는 생각은 소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망상'에 가까웠다.
사실 SK 입장에선 장난은커녕 목덜미에 칼이 들어온 상황이었다. 2아웃 이후에 나온 2루타. 타석에는 강타자 박용택. LG 타자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상대를 몰아붙인 결과, 이만수 감독이 어떻게든 쓰지 않으려고 했던 정우람을 마운드에 끌어올리는데 성공했다. 정우람의 좋지 않은 컨디션을 감안하면, 박용택과 후속 타자들이 공략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했다. 상대의 의도야 어찌되었든 '괴롭히는데' 성공한 것이다. 설령 경기가 동점이나 역전까지 가지 못하더라도, 정우람이 많은 공을 던지게 해서 다음날 등판이 어렵게 만들면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게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경기를 한다는 김기태 감독의 소신을 지키는 길이었을 게다.
하지만 김기태 감독은 전혀 엉뚱한 쪽에서 소신을 지키느라, 정작 자신이 시즌 내내 지켜온 가장 중요한 소신을 잊어버렸다. 이만수 감독을 향해 시즌 내내 쌓아온 감정이 순간적으로 폭발한 결과 7000여 명 관중들의 존재를, 백만 LG 팬의 존재를, 그 결정이 가져올 파장을, 어쩌면 자신이 하는 경기가 '야구'라는 사실마저도 망각했다. 소신은 다른 사람도 납득시킬 수 있을 때만 소신인 법. 그날 김기태 감독이 보여준 고집은 본인 혼자만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독특했고, 개인적인 감정에서 나온 즉흥적인 돌출행동이었다. 소신이 '아집'으로 돌변한 것이다.
강준만 교수는 저서 <인간사색>에서 "성찰 없는 신념은 재앙"이라 썼다. 지금 김기태 감독에게는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신념보다는,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돌아보는 성찰이 필요하다.
www.futuresball.com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