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국장이 길거리 '열린편집국'으로 출근하게 된 근본적 이유는 결국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다. 꾸준히 정수장학회와 박근혜 후보와의 관계를 비판하고 장학회의 완전한 사회 환원을 요구해 온 부산일보 노조의 목소리는 지난해 11월 18일, <부산일보> 1면에 실린 정수장학회 사회 환원 촉구 기자회견 기사로 부산 시내에도 크게 울렸다.
뒤이어 같은 달 30일, <부산일보> 경영진은 자사 기자들이 정수장학회 지분과 관계된 회사 문제를 다시금 비판하는 기사를 작성하자 신문 발행을 중단시키는 초유의 사태를 낳았다. 경영진은 일련의 과정에 이 국장의 책임이 있다며 그에게 대기발령 징계를 내렸고, 회사 출입도 금지시켰다. 이때부터 이 국장은 회사 앞에 '열린편집국'을 만들고, 길거리로 꾸준히 출근하며 회사 징계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싸워왔다.
이 국장이 서울로 '편집국'을 옮긴 이유는, 이 사태를 더 많이 알리고자 함이다. 때맞춰 부산일보 노조도 정수장학회로부터 <부산일보>의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상경투쟁을 시작했다.
▲이정호 <부산일보> 편집국장은 이달 10일부로 '열린편집국'을 서울 시내 한복판에 차렸다. ⓒ프레시안(최형락) |
정수장학회 비판 기사 나갔다고 편집국장 책상 빼
이 국장은 11일 오전 10시 30분, 길거리 농성장에서 <프레시안>과 만나 "여전히 <부산일보> 경영진과 정수장학회 측은 박근혜 후보나 민주통합당 관련 기사가 나오면 편집권을 침해한다"며 "간단히 말해, 박 후보에 불리하게 보이는 기사, 민주통합당에 유리해 보이는 기사에는 반드시 '태클'이 들어온다"고 말했다.
부산일보는 언론사 중에서 가장 먼저 편집권 독립을 이룬 회사다. 지난 1987년 민주화 열기가 폭발하자, 부산일보 노조는 6일 간의 파업 끝에 편집권 독립을 단협안에 명시하고, 편집국장 추천제를 이뤘다. 기자들이 3명의 편집국장 후보를 추천하면, 사측이 이 중 한 명을 뽑는 방식이다. 현재까지도 <부산일보>는 이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가장 민주적인 언론사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 <부산일보>다.
그런데, 유독 '박근혜' 앞에서는 이 원칙이 먹혀들지 않는 셈이다. 이미 부산일보사는 정수장학회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이호진 노조위원장을 해고한 바 있다.
이 국장은 "박 후보의 대선 출마가 임박했던 지난해 말부터 유독 사측의 견제가 심해졌다"며 "언론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편집권 독립이 힘에 의해 이처럼 흔들리는 이유는 결국 정수재단이 구태를 벗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국장은 두 건의 관련 기사 발행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사측과 끈질긴 싸움을 벌여야 했다. '편집권 독립'이라는 용어가 먹혀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18일자 기사가 나갈 때다. 곧바로 '기사를 빼라'는 경영진의 지시가 내려왔다. 결국 기사가 발행되자, 회사는 단협안에 근거해 이 국장을 '명령불복종'으로 징계위에 회부했다.
▲"'박근혜' 관련 기사가 나가면, <부산일보> 노사 단협안은 무용지물이 된다." ⓒ프레시안(최형락) |
이 싸움에선 이 국장이 이겼다. 올해 2월 13일, 법원은 이 국장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회사는 4월, 앞서 내린 징계를 철회하고 다시금 징계를 내렸다. 이번엔 '단협'에 근거하지 않고 '사규'에 근거해 그를 징계했다.
이 국장이 출근을 이어가자, 회사는 다시금 직무정지에 더해 출입정지 가처분신청까지 냈다. 그리고 지난 7월 11일, 법원은 이번엔 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이 국장이 지난 7월 13일부터 회사가 아닌 길거리로 출근하게 된 과정이다.
이 국장은 "정수재단이 부산일보사 경영진을 선임하는 현 구조에선 아무리 단협 조항에 '편집권 독립'이 명시돼 있어도 이를 이룰 수 없음이 드러났다"며 "이제 대선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이대로 이 문제를 덮어둘 순 없어 서울로 올라왔다"고 강조했다.
"박근혜는 상식에 맞선다"
이 국장은 박 후보가 "상식에 굴복할 줄 모른다"고 힐난했다. 정통성 없는 정권이 강탈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는데도, 여전히 간접적으로 재단을 지배하고 많은 비판에는 '모르쇠'로 대응하는 그의 태도는 상식 이하의 수준이라는 얘기다.
이 국장은 "법적으로야 박 대표가 재단 등기부등본에 이름이 안 올라가 있으니 문제가 없을 수 있다"면서도 "그런데, 예를 들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나는 이 회사와 아무 관련 없다'고 하면 누가 믿겠느냐"고 지적했다. 실제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은 지난 2월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박 후보와의 친분 관계를 강조했으며, 최근 부산일보 노조 사태에 대해선 "직장폐쇄도 할 수 있다"는 강경한 발언까지 서슴지 않아 주위를 놀라게 한 바 있다.
이 국장이 보는 박 후보는 "3공화국 시절이 '정당하다'는 쪽으로 생각이 고착화된 사람"이다. 인혁당 문제에 대한 그의 상식 이하의 발언도 이 때문에 나왔다는 얘기다. 이 국장은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정수장학회 문제는 이념을 떠나 상식적으로 판단해 사회에 제대로 환원하는 게 맞다"면서 "그러나 박 후보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상식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입장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부산일보 노조와 정수장학회의 싸움은 거의 1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대선이 다가올수록 이 문제는 더 치열해질 것이다. 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이 국장이 회사로 돌아올 수 있을 가능성은 그만큼 더 줄어든다. 당장 대기발령 징계가 끝나는 다음달 18일 이후, 그는 해고될 수도 있다.
▲이정호 <부산일보> 편집국장. 민주화 투쟁 이후 언론계에 입사한 첫 세대다. ⓒ프레시안(최형락) |
이 국장은 "정당성이 없는 권력은 반드시 언론부터 장악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이고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이 그랬다. 나치와 일제도 그랬다"며 "한국 정치의 정점에 오르겠다는 사람은 민주 사회의 상식을 따라야 한다. 이제라도 정수재단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강택 언론노조 위원장은 과거 "<부산일보>는 한국 언론 운동을 가장 앞에서 이끌어온 신문"이라며 이 회사 편집권 쟁취 투쟁의 의의를 강조한 바 있다. 정수장학회, 나아가 박 후보 앞에 흔들리는 <부산일보>의 편집권은, 우리 언론의 민주화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서 버텨왔는가를 상징한다. 이 국장의 길거리 편집국은, 언제 다시 부산시 동구 부산일보사 빌딩 안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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