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 시범공연의 방점은 '오성홍기'에 있지 않았다. 미국문화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파격적으로 보여준 2, 3부에 있었다. 한편 북한은 금년 2월 남측의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적십자 실무접촉 제안에 대해 전화통지문 수령조차 거부했다. 나아가 '동까모'를 거론하며 대남 적개심 고조와 보복 위협으로 '수령결사옹위정신' 강조와 내부결속을 다졌다. 그리고 지난 8월 9일, 북한은 이명박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을 비밀리에 제안한 사실을 공개했다. 그리고 5.24조치 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를 이산가족 상봉의 선결조건으로 내세웠다. 남측의 제안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북한의 이와 같은 행보는 김정은 체제의 대외관계 설정과 조타 방향을 가늠케 한다. 중국과의 협력관계를 돈독히 하는 가운데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대신 남측과는 적어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는 당분간 긴장과 대결 국면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김정은 체제의 대외관계 설정 구도는 특별히 새로운 틀은 아니다. 김정일 사후 8개월 남짓 지난 현재의 북한은 엄밀한 의미에서 김정은 시대라기보다는 여전히 김정일의 유훈통치로 작동되고 있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 체제도 그랬다. 따라서 북한의 대미, 대중, 대남 정책 역시 기본적으로 김정일 시대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김정은 체제의 대외환경이 김정일 시대와 동일할 수는 없다. 그리고 북한의 대외정책 구사는 상대편 국가의 국내정치 및 대외정책 변화와 맞물려 있다.
때문에 김정은 체제의 대외정책에서 일정한 변화와 역동성을 상정하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 특히 금년 중으로 한국을 비롯하여 미국과 중국 등이 모두 대통령 선거와 새로운 지도부 선출이라는 중대한 국내정치적 변화를 목전에 두고 있다. 어차피 북한의 대외정책 전망은 이와 같은 각국의 국내정치 변화와 이들 상호간의 조합이 만들어낼 대외환경과 맞물릴 수밖에 없다.
1. 중국과의 협력과 대미접근
북한은 자신의 대외관계 설정에서 핵심 당사국인 중국과 미국을 향해 적극적인 행보를 보여 왔다. 북한은 최근 들어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매우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8월 5일 김정은이 중국 후진타오 국가 주석의 특사 자격으로 방문한 왕자루이 당 대외연락부장과 면담했다. 그 다음날에는 모란봉악단 시범공연에서 중국곡 '오성홍기'를 통해 북중관계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앞줄오른쪽)와 중국의 왕자루이(王家瑞) 공산당 중앙위 대외연락부장(왼쪽)이 지난 2일 평양에서 함께 건배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특히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 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 8월 13일부터 5일간 핵심 경제관료 등 대규모 방문단을 대동하고 중국을 방문한 것은 양국관계의 긴밀함을 보여 준다. 장성택의 방문은 김정일 사후 고위급인사의 첫 방중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장성택의 방문으로 지난 4월 로켓 발사를 둘러싼 입장차로 인한 북중 간의 경색 국면도 일정하게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국 간의 경협이나 중국의 대북 지원 문제는 이렇다 할 진전이 없다. 한마디로 실질적인 방중 성과가 별반 보이지 않는다. 중국은 무엇보다 북한의 붕괴가 초래할 미국의 개입이나 대량난민사태 등 안보적, 경제적 재앙 사태를 피하는 데 큰 전략적 이해를 갖고 있다. 때문에 김정일 사후 김정은 체제의 조속한 안착을 위한 지지와 경제 지원을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정경 연계성 대북 경제지원이나 협력은 그와 같은 재앙적 사태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중국 자본의 대규모 대북 투자나 양국 간의 경협 확대는 대외무역과 외국기업과의 협력사업에 대한 시장시스템의 적용을 전제로 한다. 이번 장성택의 방중 시 중국 정부가 북중경협의 활성화 이전에 북한이 개선해야 할 요구 조건을 제시한 것도 그 예다. 따라서 북한이 중국의 개선요구를 적절하게 수용하지 않는 한 북중경협의 실질적인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중국이 요구한 시장시스템의 적용은 북한으로서는 민감한 사안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북중간의 경제협력 문제만 하더라도 협력의 외양 속에 긴장 요소가 없지 않다.
한편 지난 3월 미국 뉴욕을 방문한 북한의 리용호 외무성 부상이 시라큐스대 세미나와 미국외교정책 전국위원회(NCAFP) 간담회에서 "우리의 새 지도자는 미국과 다툼을 원치 않는다. 평화를 원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미국이 우리와 동맹을 맺고 핵우산을 제공하면 당장이라도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할 용의가 있다"는 파격적(?) 발언을 한 바 있었다*. 북한의 의도는 미중 간의 상호 경쟁 및 견제 심리를 이용하여 미국에의 편승 가능성을 시사, 미국에 적극적인 추파를 보내는 것이다. 동시에 중국에게는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상기시켜 중국으로부터 북한이 필요로 하는 경제적, 외교적 지지를 확보하고자 하는 이중전략으로 풀이된다.
(*사실 북한의 대미관계 설정과 관련한 이와 같은 파격적 발언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고 역사적 뿌리를 지니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1981년 4월 김일성은 중국 심양 영빈관에서 등소평과 대미관계 개선과 관련하여 대화하면서, 쿠바의 관타나모처럼 통일 후에 진해항을 미국에게 내줄 용의가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또한 1992년 1월 미국을 방문했던 김용순 노동당 비서는 아널드 캔터 미 국무부 차관에게 주한 미군을 인정하고 미국의 맹방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2007년 2월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을 만나 미국이 북한에 대해 전략적 관심이 있는지를 묻고, 미국이 북한과 전략적 관계를 맺고 제한적 핵무장을 용인한다면 북한도 미국의 대중견제 전략에 협조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중국은 북한을 이용만 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미국이 중국의 대북한 영향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면서 미국이 지난 6년간 핵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에 의존했지만 해결된 무엇이 있는지 반문했다. 사실 북한은 1974년 3월 북미 평화협정 체결 제안 이래 적극적인 대미접근 및 미국으로부터의 인정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왔다. 위에서 예를 든 '파격적 발언' 역시 돌출적이라기보다는 그와 같은 맥락에서 위치지우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주)
또한 북한은 지난 5월 22일에 외무성 대변인이 조선중앙통신사 기자와의 문답을 통해 "원래 우리는 처음부터 핵시험과 같은 군사적 조치는 예견한 것이 없었다"고 강조했다. 이 역시 대미접근을 적극 희망하는 신호이다. 이어 7월 6일 앞서 살펴 본 모란봉악단의 시범 공연을 통해 거듭 강한 대미접근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리고 북한은 8월 초 싱가폴에서 미국과 북미대화와 북핵문제 등에 대해 비공식접촉을 가졌다.
또한 지난 4월 북한의 로켓 발사 이후 단절되었던 미국과의 비공식 채널도 여전히 가동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8월 13일 미 국무부는 클리퍼드 하트 미국 6자회담 특사와 한성렬 유엔 주재 북한 차석 대사 간의 채널을 유지 중이며 필요할 때마다 연락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북한은 미국과의 접촉 사실을 공개하며 국제여론의 주목을 끌고자 했다.
북한이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미국에게 관계개선의 강한 신호를 보내는 것은 북한이 미국과 중국 간에 존재하는 견제와 경쟁의 측면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북한은 자신의 전략적 가치를 극대화하여 생존과 발전을 도모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마치 북한이 1960년대 중소분쟁시 중국과 소련을 상대로 '양다리 외교'를 구사했던 상황을 연상케 한다. 오늘날 북한은 중국이 우려하는 미북 간의 전략적 담합 가능성을 내비침으로써 중국의 대북지원을 확보하고, 미국이 우려하는 핵확산에 대한 협력 의지를 내보임으로써 북미수교를 교환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하간 지난 수년 동안 북한의 대중 의존 확대는 북미관계의 장기적 경색 속에 북한이 부득이 취할 수밖에 없었던 선택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북한이 대미, 대중 관계에서 균형을 유지하여 자신의 독자적 공간을 확보하고, 양자를 적절히 활용하여 북한의 전략적 가치와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전략과 배치되는 상황이다. 어쩌면 최근 북한이 보인 일련의 행보는 지나친 대중 의존을 경계하고, 양자 간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시도로 독해하는 것이 합당한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면 균형 유지를 위한 대미 유화 제스처에 무게가 실린 모란봉악단 공연을 본격적인 대외 개방을 향한 사인으로 보는 것은 과도한 해석일 수 있다.
2. 대남전략의 의도와 전망
북한은 금년 들어 남측을 더욱 압박, 위협하고, 내부의 갈등 촉발을 유도하면서 남측의 국내정치에 깊숙이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6.15 남북정상회담 개최 12주년을 즈음한 지난 6월 11일,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이하 '조평통') 서기국은 새누리당을 상대로 공개질문장을 통해 박근혜, 김문수, 정몽준 등 새누리당 주요 대선 예비후보들을 공격한 바 있다.
또 이보다 앞선 지난 6월 4일에는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가 공개통첩장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과 일부 보수 언론사에 대해 "우리 군대의 타격에 모든 것을 그대로 내맡기겠는가, 아니면 뒤늦게라도 사죄하고 사태를 수습하는 길로 나서겠는가"라고 위협했다. 4월 23일에는 북한 인민군 최고사령부 특별작전행동소조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쥐××"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가했다. 이와 함께 "역적패당의 분별없는 도전을 짓부셔버리기 위한 우리 혁명무력의 특별행동이 곧 개시된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북한이 최근 남측의 이산가족 상봉 제안을 거부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명박 정부의 남은 임기 내에 대화채널 복원이나 남북관계 개선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게 보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이는 지난 4여년 동안 남북관계 단절과 상호 간의 불신의 골이 그만큼 깊이 패여 있다는 반증이다. 또한 보다 근본적으로는 북한이 남북관계를 미국이나 중국과의 관계에 비해 후순위로 설정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는 징표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하면 북한의 대남정책은 12월의 대통령 선거를 통해 차기 정부의 대북정책 구상과 로드 맵이 가시화될 때 까지는 지금과 같은 기조와 전략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런데 다른 각도에서 보면 현 북한의 협중통미봉남(協中通美封南)은 북한의 의도적인 선택과 확고한 정책 방향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남북관계가 악화된 상황에서 북한이 취할 수밖에 없는 잠정적인 대외 행보로 볼 수도 있다. 북한 역시 남북관계 개선이나 남한의 협력 없이 북미관계 진전이나 북중 경협의 질적 발전, 그리고 대외관계 개선을 통한 발전 전략 모색이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와 더불어 내년 초 한국에서 여야 어느 쪽이 신정부를 구성하더라도 침체된 남북관계 개선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면 지금은 남북관계에 먹장구름이 잔뜩 끼여 있지만, 내년부터는 이를 걷어낼 일진청풍이 불 가능성이 남북한 모두의 필요에 의해 높다고 할 수 있다.
3. 북한의 대외정책 어디로?
흔히 한반도의 평화프로세스의 진전을 위해서는 남북관계-북미관계-한미관계가 선순환 관계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명박 정부에서 목도할 수 있듯이 남북관계 경색과 북미관계 악화 구도 속에서 한미관계 만으로는 한반도의 불안정성을 제거할 수 없다.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남북관계 개선과 더불어 궁극적으로는 북미관계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경우에 따라 이런 구도가 중국의 입장에서는 중국 포위구도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중국이 포위구도로 인식하는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순항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남북미 관계의 선순환을 넘어 미중협력, 한중협력, 북중협력을 포괄하는 난해한 다원고차방정식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북한의 '양다리 외교'는 한반도문제를 둘러싸고 미중이 협력하는 국면보다는 미중이 갈등하거나 상호 견제하는 상황에서 그 효과를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 미중협력 구도에서는 북한이 소외 또는 부차적 대상이 되거나 북한의 독자적인 공간이 축소될 수 있다. 2010년 천안함사태를 계기로 미중 양국이 부딪히는 상황에서 미국은 아시아 중시 정책과 동맹체제 강화를 시도해 왔다. 북한은 이와 같은 상황에 우려의 눈초리를 보내는 중국의 전략적 이해와 입장을 누구보다 잘 간파하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북한은 미국과 중국의 동북아의 세력균형 구도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지정학적, 전략적 가치를 적절히 활용하여 중국으로부터의 지원을 추출함은 물론, 대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주지하듯 북한은 궁극적으로 한반도 평화체제와 북한의 체제안전 보장 문제는 미국과의 직접 담판을 통해 풀고자 한다. 북한은 중국과 우호관계 유지를 통해 국가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수취하면서도, 한반도 평화협정과 체제안전 보장 문제에 중국이 관여하는 것을 결코 환영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적어도 북한의 입장에서는 북중관계나 남북관계는 기본적으로 북미관계의 종속변수 내지 매개변수임을 부인할 수 없다.
북미관계와 관련해서, 북한은 미국에 대해 1974년 3월 북미간 평화협정 체결을 제안한 이래 미국에 대해 일종의 인정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이 바라는 인정 투쟁의 최소치는 미국의 북한에 대한 관심 표명과 북미협상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북미국교정상화와 대북체제안전 보장이다. 북한으로서는 미국으로부터의 인정 획득이라는 문턱을 넘어야 비로소 인민경제를 위한 개혁, 개방 등 정상국가화를 향한 조치를 제대로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북한의 인정 투쟁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않는 한 북한의 미사일 발사, 핵 실험, 각종 무력도발 등 인정투쟁을 위한 수단인 위기조성전략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또 그에 따라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은 불안전성을 띨 수밖에 없고 한반도의 위기는 지속될 것이다. 따라서 동북아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뿐만 아니라, 북한체제를 개방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라도 북미관계 개선이 핵심이다. 북미관계 개선이 없거나 병행되지 않고서는 국제사회가 희망하는 방향으로 북한을 진화시킬 정책 대안이 거의 없다. 때문에 불원간 북미직접협상 국면의 도래는 불가피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국면에 대비한 한국 정부의 대북, 대미, 대중 정책의 검토와 정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소장 이수훈)가 발행하는 <한반도포커스> 2012년 9·10월호(제20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번 호의 전체 주제는 '김정은 체제의 북한: 어디로 가나?'입니다.
* 원제 : 김정은 체제의 대외정책 전망: 북미, 북중, 남북관계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