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스스로와의 고독한 싸움 끝에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이들로 인식되는 예술인들이, 얼핏 생각하기에 장르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르리라 생각되는 이들이 노조 설립에 나선 이유는 뭘까.
고 최고은 작가 사망 1주기를 맞아 지난해 12월 3일 서울 서교동에서 열린 문화·예술인들의 토론회 '밥 먹고 예술합시다'가 노조 설립 당위성이 공론화되는 첫 자리였다. 이 토론회에서 예술인들은 불안정한 미래를 공유한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뭉쳐서 한 목소리를 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후 이들은 긴 시간에 걸쳐 잦은 모임을 가졌고, 올해 3월 5명으로 구성된 유니온 설립 준비 그룹을 결성했다. 이들은 나도원 대중음악평론가, 이원재 문화연대 사무처장, 민정연 꽃다지 대표 등 3인의 공동준비위원장을 뽑아 다음 달 25일, 홍대 앞에서 예술인들의 고충을 나누는 토크쇼와 함께 유니온 설립 준비위원회 발족식을 열 계획이다.
이들은 올해 안에 노조 정식 발족을 목표로, 준비위원을 모으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준비위원 100명이 모이면 곧바로 상근자를 뽑고 노조를 공식 출범시킬 예정이다.
지난 22일 유니온 공동준비위원장인 나도원 평론가를 서울 마포구 이리카페에서 만났다. 나도원 평론가는 오랜 기간 밴드 활동을 하다 전업 평론가가 됐다. 다수의 매체에 대중음악 관련 글을 활발히 기고해 왔고 한국대중음악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예술인 소셜 유니온 설립 이유를 한 마디로 "예술인들의 권리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라고 들었다. 나아가 "우리나라 문화산업 구조와 정책기조를 바꾸는데도 일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도원 대중음악 평론가·예술인 소셜 유니온 설립 공동준비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
예술인이 노조라니?
예술인과 노동자는 얼핏 생각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예술'이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이미지와 '노동'에서 떠오르는 이미지가 다른 게 현실이다. 실제 지난 16일 오후 1시 서울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열린 '더 많은 수다' 토론회에 참석한 이들 중 일부도 "예술가가 과연 노동자성을 갖고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나 평론가도 부분적으로 이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예술가는 자신이 속한 사회와 사실상 고용관계를 가진다"고 설명했다. "예술가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심지어 다음 세대를 위해서까지 일하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즉, 예술의 공공성을 감안할 때, 예술가의 활동도 얼마든지 노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다.
나 평론가는 "한국 사회가 유난히 '노동자'라는 단어에 거부감이 많은 편"이라면서도 "사회가 예술가들로부터 가치를 얻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노동자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개별 예술인들이 사회 구조나 정부, 기업은 제쳐두고 '같은 동네'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유니온이 필요하다고 나 평론가는 강조했다. 그는 "음악계를 예로 들면, 인디 음악인들이 클럽 사장, 연습실 소유주와 갈등을 빚는다. 인디 안에서 인디 권력층과 싸우는 데 몰두하기 십상"이라며 "노점상인과 골목상인의 대립구도를 뛰어넘기 위해서라도 예술인 유니온이 필요하다. 예술인의 노동자성을 모두가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해외의 사례를 여럿 들었다. 이미 중세 유럽에선 13세기에 예술인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는데 왜 한국에선 안 되냐는 지적이다.
나 평론가는 "이미 1288년 중세 유럽에서 광대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예술인 노조의 뿌리가 됐다"며 "지금 우리 사회는 일을 하지 않는 자에게도 실업급여를 지급한다. 우리 사회가 누리는 예술적 산물에 대한 기본적 보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어려운 말들은 제쳐두고, 당장 이들이 노조를 만들려는 이유는 '배가 고파서'이다. 실제 활동하는 장르는 달라도 대부분 문화·예술인이 고용불안, 장시간 근로, 임금체불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출판 저자가 받는 인세는 보통 책값의 10% 수준이다. 대체로 출판사에게 유리한 이익 배분 구조다. 음원 수입 배분 비율이 창작자가 아니라 유통업자에게 과도하게 기울어 있다는 점은 이미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고 이진원)의 사망 과정에서 사회적 논란을 낳은 바 있다. 조각가 구본주 씨는 불행한 죽음 후에도 보상 수준이 무직자 수준으로 책정돼 유족이 보험사와 법적 분쟁까지 감내해야 했다.
대부분의 무명 만화가는 저작권 양도계약을 맺는다. 영화인들 절대다수는 연 1000만 원도 벌지 못한다. 아이돌 스타들도 마찬가지다. 상당수 스타들은 비정상적인 장기 노동 계약을 맺고, 상식 수준을 벗어난 과로에 시달린다.
나 평론가는 "예술인들이 처한 문제는 개개인이 나선다고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며 "각 장르별 예술인들의 문제를 유니온이 해결하기 위해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특히 "예술인들이 스스로 권리를 찾기 위해 예술인 소셜 유니온이 필요하다"며 "조직화한 예술인들이 정부를 상대로, 고용주를 상대로 목소리를 키워야 삶이 변한다. 예술인들이 조직화하지 않으면 누구도 우릴 도와주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예술인 권리 찾자
예술인 소셜 유니온은 정책위원회, 연대위원회, 조직위원회 등 크게 3개의 하부 조직을 구성할 예정이다. 이들 위원회가 유니온이 목표로 하는 정책을 설정하고, 장르별 예술인들과 연대를 강화하고, 조직화를 주도한다.
나 평론가는 "이미 그간 토론을 통해 앞으로 유니온이 집중할 주제에 대한 자료를 상당량 축적해뒀다"며 "유니온 출범 후 예술인 실태조사 등을 통해 예술인들이 삶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행동을 강화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기존 장르별 예술인 노조와의 관계는 앞으로 자연스럽게 설정해 나갈 예정이다. 당장 세종문화회관 노조가 예술인 소셜 유니온 창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나 평론가는 "예술인 소셜 유니온이 영화산업노조, 세종문화회관 노조, 개별 예술인 등을 모두 묶는 일종의 허브 역할을 할 것"이라며 "다양한 아이디어를 공유하겠다"고 밝혔다.
유니온은 '최고은법'으로 불렸던 예술인 복지법을 개정하는데 노력하는 한편, 진보정당 일각에서 논의 중인 기본소득제 논의에도 활발히 참여할 예정이다. 나 평론가는 "예술인 복지 증진은 단순히 예술인들의 권리를 증진시키는 것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며 "예술인의 복지 증진, 국민 복지의 증진이 모두 같이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예술인 소셜 유니온이 예술계 지켜야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
나 평론가는 그 스스로도 예전엔 '조직'이라는 단어 자체에 거부감을 드러냈으나 "이제는 등떠밀려서 준비위원장이 돼 버렸다"며 "예술적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참여하는 누구나 예술인 소셜 유니온에 가입할 수 있다. 많이 가입해달라"고 언급했다.
나 평론가는 '예술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얼핏 거리가 멀어 보이는 직업 종사자를 일일이 열거하며 "관심을 가져줄 것"을 부탁했다. 공연기획자, 김제동·이효리 등의 유명 방송인, 게임업계의 그래픽 디자이너 등도 모두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며 "유니온은 모두에게 열려있다"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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