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이러한 '형식의 파괴'가 '내용의 변화'를 모두 다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형식의 파괴'는 최소한 내용에 있어서의 변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징표로 해석될 수는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형식의 파괴'가 '내용의 변화'로 이어질수록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북한을 둘러싼 주변국들의 정책과도 직접 관련되어 있는 문제다. 과연 우리는 북한이 최근 보여주고 있는 변화에 대응할 준비를 제대로 갖추고 있을까? 어설픈 통역과 서투른 번역의 결과 잘못된 해석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저 한낱 평론가의 위치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
북한의 변화는 이미 예고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단지 최근 김정은이 보여주고 있는 파격적인 행보에서만 나타나고 있지는 않다. 비록 몇 편 되지는 않지만 그의 연설과 담화, 논문에서도 변화를 예고하는 중요한 표현들이 등장하고 있다. 지난 태양절 행사에 모두의 예상을 깨고 등장한 김정은은 연설에서 '자주'와 '선군'에 바탕한 경제건설에 역점을 두었고, 그것을 '새 세기의 산업혁명'으로 표현하였고, 자신의 시대는 이러한 '새 세기의 산업혁명'의 시대가 될 것임을 예고하였다.
또한, 그가 발표했다는 논문과 담화에서는 국제적인 교류와 세계적 추세를 따라 배울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외국에 대표단을 보내어 배워오도록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말하고 있다.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표단 일행과의 접견에서는 '경제발전과 민생개선'을 강조하고 '인민의 행복'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한다고 발언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이미 김일성 시대, 그리고 김정일 시대에도 언급되었던 내용이고 또 북한의 공식적인 주장에서도 되풀이되어 강조되었던 내용들이었다. 그럼에도 김정은의 이러한 언급과 발표가 새삼스럽게 관심을 끄는 것은 그것이 최근의 '형식의 파괴'와 결부되어 실제 이행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우선 김정은의 최고지도자 등극 이후 첫 현지지도는 '류경수 탱크사단'(일명 105 탱크사단)이었다. 이는 김정일 시대의 선군정치를 계승하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군부대 방문에서 보여주었던 행보는 과거의 '권위적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친근한 이미지의 연출을 위한 의도된 행동일 수도 있지만, 일반 병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신체적 접촉을 가졌던 것은 이미 이때부터 '형식의 파괴'를 통한 내용의 변화를 예고했다고 할 수 있다.
▲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조선인민군 항공 및 반항공군 제1017군부대를 시찰 비행훈련을 지도했다고 보도한 7일 <조선중앙TV> 화면. ⓒ연합뉴스 |
이후의 행보 역시 비슷하다. '선군정치'의 계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지만, 인민생활과 직결된 현장의 방문이 많아지고 심지어는 인민군 창건절에도 관련 중앙보고대회에 참석함과 동시에 만수교 고기상점 준공식에 참석하는 등 인민생활에 밀착한 행보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능라 인민유원지에서의 직접 풀을 뽑는 모습, 모란봉 악단의 파격적인 공연, 부인 리설주의 등장 등 파격의 연속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지금까지 군에서 관리하던 경제부문을 내각으로 이전하고, 소위 '6.28 조치'라는 새로운 조치를 통해 일종의 경제분야의 구조 조정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10월을 기점으로 새로운 경제조치가 나올 것이라는 예측이 제기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행보를 종합하면 '형식의 파괴'와 동시에 부분적으로 '내용의 변화'도 시도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개혁·개방으로 표현될 수 없는 정도라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분명 과거와는 다른 변화가 진행 중인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현재 김정은이 보여주는 '형식의 파괴'를 더 이상 연출과 이미지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현실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리영호의 해임에서도 보듯이 북한에서 벌어지는 조그마한 사건에도 체제의 균열과 엄청난 권력투쟁의 서막으로 해석하면서도, 김정은의 파격적인 행보에 대해서는 단지 '연출'로만 해석하는 것은 '해석의 균형'에도 맞지 않는다.
리영호의 해임과 그 이후의 과정에서도 볼 수 있듯이, 김정은의 권력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고한 것으로 보이며, 군부통제 역시 탄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민들에 대한 친근한 이미지, 지도자로서의 모습은 그가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동안 쉼없이 보여주어야 할 덕목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김정은이 보여주는 모습은 '연출'과 '이미지' 창출에만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자신의 생각과 변화를 조금씩 실행해나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란봉 악단의 공연은 단지 이미지의 창출만이 아니라, 주민들에게도 변화의 방향을 보여준 자신의 노선과 정책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이론적으로 따지더라도 이러한 변화의 성공을 통해 자신의 업적을 쌓고, '위대한 지도자'로 이미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점에서 이러한 변화에 대한 북한의 주장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라 하겠다. 여전히 주체의 강화이고, 인민생활의 향상이며, 세기를 '놀래우는' 혁신으로 포장되겠지만 그 방향은 분명 세계 속으로 한발 더 들이미는 것이 될 것이다.
당분간 북한은 김정은의 노선과 정책이 조금씩 구체화되면서 변화의 모습들을 드러낼 것이다. 또한, 기존의 '자주'와 '선군'의 노선과 정책도 지속될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중첩된 채로 일정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이를 과도기라 해석할 수도 있지만, 북한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자주'와 '선군' 그리고 '변화'가 양립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변화'없는 북한보다는 '변화'하려는 북한이 우리에게는 더 긍정적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북한의 변화를 '연출'로만 평가하고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쯤에서 김정은의 4월 태양절의 연설 내용 중 다음의 구절을 상기해보자.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며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하자는 것이 우리 당의 확고한 결심입니다."
"강성국가 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을 총적 목표로 내세우고 있는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에 있어서 평화는 더없이 귀중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민족의 존엄과 나라의 자주권이 더 귀중합니다."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경제건설에 평화적 환경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지만, 그 평화에 앞서 주권의 수호가 더 중요하다는 김정은 연설의 이 대목은 앞으로 북한의 변화에 '평화적 환경'이 전제 조건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역으로 이는 곧 '평화적 환경'이 마련된다면, 북한의 변화는 더 빠르게, 그리고 더 적극적인 방향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북한의 변화를 바란다면,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급선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남북한의 평화와 화해와 협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과연 우리는 이를 제대로 준비하고 있을까? 적어도 현재까지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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