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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마음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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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마음의 예술

〈김봉준의 붓그림편지 21〉



▲ ⓒ프레시안

그동안 바빴습니다. 그림편지도 제 때에 못 보내드려 죄송합니다. 휴일이 돌아와도 쉬지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하며 객지에서 바쁘게 살았습니다. 가족부양 책임이 위중하여 직장도 새로 잡았습니다. 임시직이지만 작년에 이어 축제일을 또 맡았습니다. 실학축전 총감독 직을 맡아 다시 수원으로 출퇴근 합니다. '실학축전2006' 기대해 주십시오. 올해는 추사 김정희 특집입니다. 실학축전 개막은 9월 중순입니다. 그런 중에 틈틈이 강원도 미술인단체를 결성하는 일을 강원미술인 벗들과 함께 했습니다. 이름 하여 '강원민족미술인협회'입니다.

강원도에는 일할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강원도 인재들이 서울 등 대도시로 떠났습니다. 나는 거꾸로 서울을 떠나 강원도 산골에서 10여 년을 살고 있으니 저도 이제는 강원도가 고향인 셈입니다. 어떤 이는 고향을 일찍이 떠났으면서도 고향 연고권을 강조하는데 사실 떠난 사람보다 찾아온 사람이 애향인입니다. 떠났다가 잊을 만하면 명절날에나 찾아오는 이들보다 그 지역에 주민들과 같이 살고자 오는 이들이야말로 고향민에 다름 아닙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그림은 우리 동네입니다. 내가 사는 곳은 그림 맨 위쪽에 보이는 집입니다. 젖소와 사슴 목장이 많은, 축산이 한창인 농촌입니다. 늘 부지런한 농부들과 풋풋한 자연이 어울리는 곳, 내가 찾은 고향이랍니다.

강원도에도 예술단체들이 여럿 있습니다만 저와 뜻이 맞는 단체가 없어서 외톨이처럼 산골 화실만 지키며 살다가 이제야 비로소 뜻을 같이하는 벗들과 아우들과 모임을 갖기로 했습니다. 사람은 혼자서 살기도 하지만 같이 살아야 살맛이 나는가 봅니다. 여럿이 함께 가는 길을 찾고자 합니다.

강원민족미술인협회 창립 성명서를 쓰면서 다시 옷깃을 여미는 마음입니다. 1982년 미술동인 두렁에서 시작하여 서울 민족미술인협회, 다시 부천의 노동미술위원회 시절을 거쳐 강원도에 정착했습니다. 1993년 여름 모든 화구를 들고 강원도 두메산골로 들어온 12년은 자발적 고립의 시대였습니다. 이제 이 고립시대도 털어버립니다. 다시 저자거리에 나온 기분입니다. 사고다발지역 같은 저자거리에서 조신해야 하면서도 용감무쌍해야 하는 진검승부 같은 인생을 다시 살아야 하나 봅니다.

이제 다시 논쟁도 피하지 않고 사랑도 마다하지 않으며 다중과 함께하는 삶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개나리봇짐에 검정고무신 신고 서울역에 내려 두리번거리던 촌사람 같습니다. 어리벙벙합니다. 그래도 산골에서 익힌 디지털매체 덕분에 적응에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다만 이런 때 간직하고 싶은 화두가 하나 있습니다. 명심(冥心), 연암 박지원 선생이 왜 명심을 강조하셨을까? 이를 테면 아득한 마음, 어둡고 그윽한 마음인데 이 마음이 왜 자꾸 요즘 밤낮없이 내 마음에 들어올까.

어둠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귀로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다는 말인데 외적인 물상에 현혹되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진실을 찾아가는 마음입니다. 요즘 자꾸만 이 화두가 떠오릅니다. 개나리봇짐의 시골 총각 같은 맑은 영혼의 마음이기도 하지만 어둑한 할머니 같은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더 나가자면 마음이 아득하여 창망하게 세상을 보는 마음입니다. 맑은 영혼으로 보이는 세상뿐만 아니라 그 너머 보이지 않는 세상까지 바라보는 것이지요.

나는 지금 처음처럼 맑은 영혼으로 미술계와 강원도를 향하여 소리치는 것 같아서 겁납니다.'강원도민족미술인협회'라는 이름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 회원들 마음에 아름다운 영혼이 깃들기를 바라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문을 써보았습니다. 이 글을 발췌해서 보냅니다. 읽어 보시고 댓글도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강원미술인이 가려는 길에 격려도 부탁합니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아름다운 영혼의 미술이여, 자연연대여 !
- 강원민족미술인협회 창립선언문-

우리는 강원도에 사는 미술인이며 수려한 강원도 자연의 품에서 살고 지는 지역주민의 한사람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아름다운 영혼의 눈으로 보려고 누구보다 노력하는 이름 그대로 미술인입니다.

우리는 자기 삶의 자리에서 묵묵히 창의적 장인수련을 하면서 자신만의 색깔 있는 미술을 위해 노력 해 왔고 그것이 강원도 문화의 정체성을 밝히고 겨레의 문화예술을 풍요롭게 한다는 소신으로 살아 왔습니다. 또한 우리는 현실의 아픔과 희망을 외면하지 않음으로서 삶에 필요한 미술, 삶의 질을 높이는 미술, 삶의 희망인 미술, 즉 '삶의 미술'을 만들려고 애써 왔습니다.

'민중적 내용을 민족적 형식에, 민족적 현실을 민중적 소통으로' 실천할 것을 주창하던 저 '80년대의 치열했던 민중미술시대는 이제 갔습니다. 이후 민족·민중미술은 지나친 사변론과 정치이념주의와 세속적 자기이기심에 기울어 초발심을 잃어갔습니다. 처음처럼 미술이 삶의 미술로 돌아가자던 미술인들의 진정성은 세월이 가면서 점점 빛을 바랬던 것 같습니다.

미술계도 시대가 변화하면서 시대에 뒤쫓아 가기 급급했습니다.'90년대 들어 또다시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왔고 미학의 부재, 기초예술교육의 실패, 장인학의 실종으로 문화산업은 목소리만 높고 창의성은 부재한 시대를 겪게 되었습니다.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제국주의에서 나왔지만 동양 자신의 문화 이데올로기화한 지 이미 오래 되어 우리는 전통문화에 대한 편견에 젖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인류문명은 위기에 있다고 입을 모읍니다. 그러나 가치관의 변화, 패러다임의 전환을 말하는 담론들은 쏟아지지만 아직도 인류는 미명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21세기의 벽두부터 우리는 나라 안팎으로 대혼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빈부 양극화, 신자유주의 시장지배와 자원 독점화, 지구 생태계의 급격한 파괴, 괴질과 기아에 허덕이는 최빈국 문제 등 인류 역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문명과 생태의 이중적 지구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 안팎의 정세는 물론이고 예술과 인문학의 위기도 깊어지고 가치관의 혼란이 만연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지역을 떠나고 있고 대학생들의 절반은 다시 태어난다면 조국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하며 해외로 유학이나 이민을 가고 싶다고 합니다. 고시공부에만 매달리는 학생들이 한해 수만 명에 이르는 등, 자기 직업문화가 없습니다. 생활인으로서 자긍심조차 상실해 가고 있습니다.

위기의 원인은 분명히 물질만능주의입니다. 그것의 물적 구조는 금융자본주의의 독점적 지배구조입니다. 세계를 경쟁과 투쟁으로 독점 지배하는 산물로 보느냐, 너와 내가 더불어 생존하기 위한 공생의 관계로 보느냐의 차이는 분명히 다릅니다. 존재론의 궁극적 목적이 독점이라면 관계론의 목적은 공생입니다. 그 둘 중에서 우리의 삶은 선택의 고뇌에 휩싸입니다. 생존을 위해 시장경쟁에 나아가야 하며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관계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되는 지독한 이율배반의 생활양식이 자기 안에서 공존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지역미술인들은 상대적으로 경쟁 위주의 물질주의에 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시류에 유혹되기보다 삶의 진정에 답하려는 소박한 예술인이 많았습니다. 자연이 가르쳐 준 덕분에 영혼이 맑은 예술인들입니다. 우리들은 지역문화의 소외와 푸대접을 견뎌내며 묵묵히 자신의 예술을 키워 온 것도 사실입니다. 조직적 활동은 미약하였으나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강원도 산천 속에서 '자발적 고립'도 자처하며 가난과 싸우며 예술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80년대 민중미술과 서구 모던이즘의 수용기에서 놓쳐버린 건강한 삶의 예술, 맑은 영혼의 미술을 새로운 활로로 모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화시대, 지방화 시대를 맞이하였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미술인에게 또 다른 시련을 주고 있습니다. 서민에게는 생존마저 위협하는 엄혹한 양극화의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 강원도만 하더라도 민중의 삶은 더욱 생존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와 다를 바 없는 미술인의 삶도 생존의 위협 속에서 예술을 지키고 있습니다. 경제에 발목 잡힌 예술은 과거처럼 표현의 자유 없는 시절보다 '자유의 표현'이 없는 시대, 이제는 사람이 아니라 영혼(예술)이 감금되는 물질주의 시대에 있습니다.

독점적 세계자본의 파고는 더욱 거세고 한국의 문화예술계는 자본 독점화와 문화 권력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작금의 한국예술계는 서울 중심으로 불어오는 배금주의가 서서히 지역까지 만연해 문화예술의 창달은 물론 예술가의 마지막 배수진인 자존적 영혼마저 잃어가고 있습니다.

강원미술은 서울의 주변부로 전락하여 지역미술 고유의 색깔을 찾지 못하고 능동적 대응 없이 답보상태로 구태의연합니다. 이제 강원미술계는 이 침체와 아류의 늪에서 빠져나와 공동으로 새로운 활력을 찾아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원지역의 미술적 정체성을 찾고 자생력을 키우는 것은 강원문화예술과 한국문화예술의 사활을 가름하는 숙제인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이면서도 함께입니다. 서로 도와가면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야 합니다. '나를 살리고 서로 살리고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합니다. 우리 미술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힘을 내서 생존의 길을 찾고 지혜를 모아서 직업인으로 성공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대로 살길을 찾아 강원미술문화의 방향을 정립하려 합니다. 회원들은 이 중 어느 방향의 선택이든 그 다양성을 존중하고 상부상조할 것입니다.

삶에 치유와 활력과 필요가 되는 삶의 미술,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생명·생태미술, 민중미술의 정통성을 계승한 민중·민족미술, 삶의 안에서 풍류를 살리는 멋의 미술, 개인의 무한한 창의성이 살아 숨쉬는 영혼의 미술, 전통의 창조적 계승의 미술(入古出新), 외래문화에 대하여 개방적 수용성을 갖되 중심을 잃지 않은 주체적 지역미술, 국가주의 한계를 넘는 자연연대(From United Nation to United Nature)의 미술 등으로 방향을 열어놓을 것입니다.

(…)

우리는 더 이상 미술문화현실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며 취지에 동의하는 미술인들이 가능한 한 많이 참여연대하기를 바랍니다. 시민들도 생활미술과 축제미술, 미술교육프로그램과 체험미술, 주민자치문화와 시민교양예술문화 과제 등을 펼칠 수 있게 장을 열어 놓고 있습니다. 미술을 좋아하는 시민들의 참여를 환영합니다. 시민회원들과 전문미술 회원들이 함께 강원주민자치문화를 가꾸어 가고자 합니다. 회원의 개성 있는 예술 활동이 바로 강원도 문화의 역사성이고 정체성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존의 어느 예술인이나 예술단체들과 우호와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문화예술활동의 상호 격려와 선의의 경쟁으로 지역문화 발전에 함께 기여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강원지역의 문화예술계, 문화단체, 대학, 산업계, 지역주민자치회, 행정당국, 개개인 등과 네트워크하며 사업과 협의를 제안할 것입니다. 강미협은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표방하는 방향에 동의하시고 화이부동(和而不同)이면 누구와도 손잡고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전문성과 포퓰리즘을 걱정하지만 더 이상의 걱정은 검증이 되지 않은 '묻지마 식 전문주의'입니다. 전문성은 실용성과 심미성과 생태·생명 가치를 준거로 강원주민의 삶에서 검증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다고 정치적 보혁논쟁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며 시대를 길게 보며 문화의 질적 성숙을 키워갈 것입니다.'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지혜를 키워가며 문화예술계에서 종사하렵니다. 중장기적 계획을 가지고 인내와 끈기로 작은 것부터 한가지 씩 성취하는 신중하면서도 힘찬 행보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다고 범부의 일상에서 안주하지는 않으며 꿈을 꾸며 살 것입니다. 삶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세속의 진창에 발을 담그면서도 세간에서 탈속의 미를 찾고자 합니다. 고난의 길이며 동시에 명예의 길입니다. 무거운 짐일수록 함께 맞들어야 가벼워지듯이 이왕 가는 길 즐기며 기꺼이 가겠습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요. 내가 너(대상)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은 정으로부터 나와 대상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가지며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하는 아득한 마음입니다. 젊음의 신명도, 피붙이에 대한 정도, 신산고초를 겪고서야 비로소 보이는 세상에 대한 아득한 마음(冥心)도 모두 아름다움의 마음입니다. 이런 몸과 마음으로 수심해서 맑은 영혼을 키워야 진정 미술인이 아닐까 합니다.

정선아라리는 우리네 삶에서 '풍진 속 초탈'의 예술 정신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습니다. 우리단체는 5인의 조사님을 모시렵니다. 강원미술인 신사임당, 차강 박기정, 박수근, 권진규, 무위당 장일순 님들은 예술과 삶의 일치로 아름다운 영혼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가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조령(祖靈)의 뜻을 받들고 같이 가는 벗들이 있어 외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함께 가다가 보면 작은 길도 큰길이 될 것입니다.

풍진 속 초탈은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역설의 진리입니다. 아니 진리는 본래 모순의 평화적 통일이며 대립의 창조적 조화입니다. 그것이 바로 역동적 균형, 즉 아름다움의 세계입니다. 자연은 계절이 바뀌어도 연대하고 있습니다. 홀로 선 저 나무가 연대하면 숲이 되듯이 우리는 홀로 서서 개성으로 빛나며 더불어 연대하여 아름다운 문화를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이 궁벽한 지역주의와 풍진 속 초탈의 예술이 만나면 이 땅이 왜 희망의 문화가 되는지를, 왜 이 길이 아름다움의 길인지를 이제 작은 소리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큰소리로 외치고자 합니다.

다시 또다시 이어 달리리
여럿이 함께 노래 부르리
정선 아라리가 노래하는 신령한 나라
스승의 영혼이 살아 계신 곳
이웃이 좋고 자연이 좋아 사는 우리
백두대간이 우뚝한 산하
강원에서 다시 만나 거듭 나리
아, 아름다운 영혼으로
아리 아라리 만나리


네, 여기까지입니다. 평소 미술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에서 못다 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정의 미학'입니다. 사랑도 정에서 옵니다. 부모님이 서로 정이 있어서 나라는 사람도 태어났습니다. 사랑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만듭니다. 지금은 너무 메마른 예술계를 봅니다. 차가운 이성주의 비평문화와 기획주의에 끌려 다니는 요즘은 사랑보다 돈이 앞서는 것 같습니다. 예술인은 누구보다도 창조적 영혼을 가진 자입니다. 사랑을 맑은 영혼으로 승화시켜 예술로 꽃피우며 그 향기가 퍼져서 아름다운 세상에 밑거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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