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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아줌마의 강남 좌파 되기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 강형철 감독의 <써니>와 얀 사무엘 감독의 <디어 미>

I. 어린이 되기와 소녀 되기의 느낌과 감각

서구 근대화 과정에서 가장 왜곡된 학문들 중의 하나가 발달심리학이다. 유아는 어린이로 발달하고, 어린이는 청소년으로, 그리고 청소년은 청년과 장년으로 발달하여 마침내 노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통하여 어른이 아이들을 지배하고,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며, 백인이 유색인을 지배하고, 인간이 동물을 지배할 수 있다는 현실의 원칙을 제시한다. 더군다나 이런 발달심리학의 끝은 죽음이다. 이러한 발달심리학의 논리로 프로이드는 현실의 원칙에 적응하지 않고 저항하거나 새로움을 창조하고자 하는 욕망을 "죽음의 욕망"이라고 보았다. "생명의 욕망"과 "삶의 욕망"을 "죽음의 욕망"으로 전이시켜 지배의 논리에 순응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근대 지배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결코 어린이가 어른으로 발달하는 것이 아니며, 소녀가 아줌마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변화하고 새롭게 생성하는 것처럼 어린이는 어른으로 변화하는 것이며 소녀는 아줌마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과정 속에서 어린이와 소녀의 느낌과 감각을 끊임없이 생성시키는 사람이 있고, 그러한 느낌과 감각을 망각하거나 스스로 저버리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근대 국가사회를 유지시키고 있는 학교나 교회 혹은 가족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나 군대나 법원 혹은 정부와 같은 억압적 국가장치 속에서 어린이와 소녀의 느낌과 감각은 항상 배제되거나 억압된다. 이러한 근대 국가사회 속에서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어린이와 소녀의 느낌과 감각을 되살리게 하는 것이 문학과 예술이다. 그런데 문제는 말기 근대의 신자유주의 경쟁 논리 속에서 문학과 예술은 죽어가고 있고, 심지어 어린이나 소녀들에게조차 경쟁과 싸움의 논리를 강요하고 있다. 무상급식을 어른의 논리로 재단하고, 대학 등록금 문제를 권력과 경쟁의 논리로 재단한다. 어른의 논리나 권력의 논리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어린이나 소녀는 죽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초등학교 반장선거에 어른들의 권력관계가 개입되고, 여중생이나 여고생의 집단 난투극이 어른 깡패집단보다 더 요란하다. 발달 심리학을 비롯한 근대의 이데올로기적 지식을 통하여 형성된 어른의 세계가 만든 근대의 비극이다. 이러한 근대의 비극에서 벗어나는 길은 대립과 갈등의 근대적 지식에서 탈영토화하여 변화와 생성을 보여주는 탈근대의 영화들을 통하여 잃어버린 어린이와 소녀의 느낌과 감각을 탈근대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II. 유호정의 소녀 되기와 소피 마르소의 어린이 되기




2009년 <과속스캔들>로 데뷔한 강형철 감독의 <써니>(2011)는 이 세상에서 부족할 것 하나 없는 강남 아줌마 "나미"(유호정 분)가 우연히 병실에 누워있는 고등학교 친구 "춘화"(홍진희 분)를 만나면서 1980년대의 고등학교 소녀 "나미"(심은경 분)가 되는 이야기이다. 이와 더불어 프랑스의 얀 사무엘 감독의 <디어 미(With Love ... From The Age of Reason)>(2010)는 투자 정보회사의 커리어 우먼으로 활동하는 "마거릿 벨"(소피 마르소 분)이 일곱 살이었을 때의 자신이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잃어버린 자신의 꿈을 다시 되찾는 이야기이다. <써니>에서 전남 벌교에서 서울로 갓 전학을 한 고등학교 소녀 "나미"의 느낌과 감각을 잃어버린 강남 아줌마 "나미"는 모든 것을 돈으로만 해결하려는 남편에게 화가 나 있고, 자신의 고민 속에 빠져있는 사춘기 소녀 딸에게도 소외되어 무기력한 삶에 젖어있다. 이와는 달리 <디어 미>에 등장하는 "마거릿"은 멋있는 남자와 결혼도 하고 남편과 함께 투자 정보회사의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으로 활동하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권력의 논리나 자본의 논리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강남 아줌마 "나미"는 집에서 딸의 교복을 입고 이리저리 으스대다가 갑자기 들어온 딸에게 창피함을 느끼듯이 고등학교 시절의 칠공주파 소녀가 되기 전에 이미 그 시절의 느낌과 감각으로 되돌아간다. "나미"가 칠공주파 소녀들을 다시 만나서 최초로 행한 일은 어른의 논리로 자신의 딸을 괴롭히는 소녀 깡패들을 혼내주는 것이고, 또한 그녀의 고등학교 시절은 교복 자율화가 이루어져 자유로운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는데 반하여 이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는 딸은 다시 교복의 시대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1980년대의 거리에서 칠공주파에서 이루어지는 칠공주파의 싸움이 민주화 투쟁의 대학생들과 경찰의 싸움으로 패러디되고 있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1980년대에는 권력의 논리나 자본의 논리에 대항하는 어린이나 소녀의 느낌과 감각을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대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족에서 어린이나 소녀가 된 할머니의 역할이나 혹은 대학생 운동권 오빠의 치기가 자본의 논리나 권력의 논리에 대항하고 있기 때문에 "나미"와 더불어 칠공주파 소녀들은 다른 깡패 소녀들과는 달리 더불어 사는 소녀들의 느낌과 감각을 더욱 많이 간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옳고 그름, 혹은 개인적 관계나 사회 그리고 국가의 생산성과 파괴성은 논리나 이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논리나 이성은 권력의 논리이고 자본의 논리이다. 이런 권력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에 빠져 있는 사람들만이 어린이나 소녀의 느낌과 감각을 헛된 것이거나 유치한 것이라고 치부한다. <써니>에서 권력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사람이 "수지"(민효린 분)이다. 그래서 수지는 "나미"가 지방 출신이라는 이유로, 혹은 촌스럽다는 이유로 그녀와 함께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수지를 안타깝게 여긴 "나미"가 수지의 집에 찾아갔을 때, 수지의 엄마는 진한 사투리를 쓰고 있다. 그것을 창피하게 여긴 "수지"는 "나미"가 "지역차별"이나 "지역감정"이라고 말한 것을 쉽게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잘못했다는 것을 바로 느낀다. 그런 후에 서로가 화해하고 포장마차에 가서 술을 마시며 우는 장면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배꼽이 빠질 정도다. 어른들이 술을 마시고 취해서 정치 이야기를 하거나 종교 이야기를 하면서 싸우는 추악함과 비교하여 이들이 술을 마시며 울고불고 하는 모습은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아름답다.

소녀와 어린이들의 관계가 만드는 아름다움은 상호 생성적이기 때문이다. 어른의 논리에 조금 가깝게 다가간 수지가 엉엉 울면서 "예뻐서 미안해! 나 이제 그만 예뻐질 게, 엉엉-- 네가 예뻐져!"하고 나미에게 하는 말이 소녀와 어린이들의 진실한 느낌과 감각이기 때문에 감동은 더욱 배가된다. 수지처럼 오늘날의 서울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서 지방 사람들에게 "서울에 살아서 미안해! 서울은 충분히 발전했어, 엉엉-- 이제 지방이 발전해야 돼, 그러니까 행정수도도 옮겨야 하고, 대학들도 서울과 지방이 똑같아야 해!"하고 말이다. 무상급식도 마찬가지이다. <써니>에 등장하는 칠공주파 소녀들처럼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공부를 잘하거나 못하거나와 상관없이 서로서로 어울려 하나가 되듯이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혹은 고등학생 모두가 지역과 돈 혹은 권력에 상관없이 모두 즐기는 무상급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대학 등록금 문제도 이와 같게 생각해야만 한다. 1980년대에서 2000년대로 변화함과 더불어 초중등 교육과 마찬가지로 이제 대학교육도 보편교육이 되어버렸다. 소녀의 느낌과 감각을 되찾은 강남 아줌마 "나미"는 국립대와 사립대, 혹은 B학점 이상이나 이하와 상관없이 대학 등록금도 모두 무상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디어 미>에 등장하는 "마거릿 벨"도 온갖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마침내 어린이 되기를 한다. 물론 그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써니>의 "나미"가 일시적으로 고등학교 소녀 되기의 느낌과 감각을 획득한 것과는 달리 "마거릿 벨"의 어린이 되기는 단순한 느낌과 감각의 획득을 넘어서서 그녀의 삶 전체를 바꾼다. 이러한 차이는 "나미"의 소녀 되기가 교육을 통한 사회화와 어른의 세계에 어느 정도 진입한 것과는 달리 "마거릿 벨"의 어린이 되기는 교육제도와 사회화의 세계에 진입하기 이전의 어린이, 그래서 권력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로 유지되는 어른의 세계가 완전히 잃어버린 순수한 느낌과 감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마거릿 벨이 7살 어린이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가는 곳은 아프리카이다. 권력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만이 판을 치는 투자 정보회사의 능력을 갖춘 커리어 우먼이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위한 우물 만들기 사업에 뛰어 들어간 것이다. 서구 유럽이 근대화의 과정에서 가장 왜곡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풍요로운 땅을 빈곤의 땅으로 만든 근대의 범죄를 "마거릿 벨"이 어린이가 되어 치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III. 강남 아줌마의 강남 좌파 되기

서구 근대화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왜곡된 지식이 단순히 발달심리학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만은 아니다. 어린이와 어른을 구별하거나, 혹은 근대화 이전의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원주민의 세계와 서구 유럽의 세계를 구분하는 기준이 비문자의 세계와 문자의 세계였다. 발달심리학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은 문자의 세계가 비문자의 세계보다 발전한 세계라는 가정 속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결코 문자의 세계가 비문자의 세계보다 발전한 세계가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자연의 세계가 인간의 세계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혹은 우주 은하의 세계가 지구의 세계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비문자의 세계가 문자의 세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의 세계는 비문자의 세계를 알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이처럼 문자의 세계가 비문자의 세계보다 발전한 것이고, 그래서 문자의 세계가 비문자의 세계를 개발하고 계몽시킬 수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모든 근대의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서구 근대화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왜곡된 지식들이다. 이러한 지식들은 크든지 작든지 간에 오늘날 횡행하고 있는 자연에 대한 문명의 지배, 후진국에 대한 선진국의 지배와 연루되어 있다.

<써니>에 등장하는 강남 아줌마 "나미"를 세상 사람들은 "강남 좌파"라고 부른다. 그녀가 자본의 논리와 권력의 논리에서 벗어나 고등학교 소녀의 느낌과 감각으로 "지역차별"을 이야기하고, "무상급식"을 이야기하고, 또한 "대학등록금 무상"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뜬금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강남 좌파"라고 부른다. 그것은 곧 오늘날 이야기되는 대한민국의 "지역차별"과 "무상급식"과 "대학등록금 무상"과 "남북의 평화적 대화"와 "4대강 개발반대" 등등은 권력의 논리나 자본의 논리가 아닌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느낌과 감각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나미"와 같은 "강남 좌파"의 강남 아줌마가 하나라도 더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러한 강남 아줌마의 강남 좌파가 되는 길은 강형철 감독의 <써니>나 얀 사무엘 감독의 <디어 미>라는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탈근대의 영화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어린이 되기와 소녀 되기를 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나미"와 같은 강남 아줌마들이 더 많이 강남 좌파가 될 때, 대한민국은 비로소 어른과 어린이, 남자와 여자, 서울과 지역, 그리고 남과 북의 차별 이 없는 새로운 탈근대의 나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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