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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 '한국 환경영화의 흐름'과 '강, 원래 프로젝트'의 단편영화들

I. 근대 다큐멘터리 영화의 비극

2011년 5월 18일부터 25일까지 상암 CGV에서 상영되는 서울 환경영화제는 8살 되는 21세기의 대한민국 영화축제이다. 그러나 8살 되는 서울 환경영화제의 영화축제는 지금까지 유지되었던 문화관광부의 예산 지원이 끊긴 상태이다. 녹색성장을 선전하는 이명박 정부는 대한민국의 환경을 생각하기 보다는 한강을 비롯한 4대강 파괴 프로젝트를 통한 대형 건설사 살리기를 위하여 환경영화제의 지원비는 삭제한 것이다. 그래서 제 8회 서울 환경영화제는 난지도 쓰레기 소각장 위에 설치되어 있는 상암 CGV의 한 귀퉁이에서 초라하게 열리고 있다. 이것이 녹색성장을 부르짖으며, 친환경과 친서민 정책을 홍보하는 이명박 정부의 실상이다.

이명박 정부는 뉴타운 개발정책과 4대강 파괴 프로젝트가 친서민이고 친환경인 녹색성장이라고 믿는 것일까? 그들은 믿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들이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한 지난 1960년대와 70년대의 사고방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근대적 개발과 근대적 발전의 환상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보다 먼저 서구 유럽에 의하여 만들어진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근대적 개발과 근대적 발전의 프로젝트가 서우 유럽인들만을 위한 "원주민 학살 초토화 프로젝트"이듯이 이명박 정부의 뉴타운 개발정책과 4대강 파괴 프로젝트의 근대적 개발과 근대적 발전의 환상은 서구화되고 유럽화된 자본가들만을 위한 대한민국 사회와 자연의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에 다름 아니다.

대한민국 근대성의 개발과 발전의 환상이 근본적으로 한반도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의 파괴와 분열인 이유는 서울 환경영화제에서 상영하는 대부분의 영화들이 다큐멘터리 영화들인 것과 연관되어 있다. 사진은 과거의 기억을 현재에 유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사진을 나열하는 영화는 미래의 변화를 사유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변화는 곧 생성과 창조이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사회의 변화를 사유하기 위한 영화의 장르가 다큐멘터리이다. 그런데 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서 최초로 영화가 상영된 이후로 다큐멘터리 영화는 항상 비극이 되었다. 그것은 근대의 프로젝트, 즉 서구화(기독교화)와 산업화 그리고 도시화라는 서구적 근대의 문명이 곧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의 문명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개발이거나 발전이라고 믿고 있는 환상들은 지난 16세기 서구 유럽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 즉 콜럼부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나 바스코 다 가마의 "희망봉 발견"이라는 세계사에 등장하는 너무나도 유명한 역사적 구절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아메리카 대륙 발견"은 서구 유럽의 아메리카 침략이었고, "희망봉 발견"은 아프리카 대륙의 침략이었다.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지난 16세기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근대의 역사는 시대를 달리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백인들에 의한 거대하고 장기적인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이었다.

서구적 근대의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은 19세기 초반 아메리카 국가들의 독립 이후이거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 이후에 사라진 것이 아니다. 과거의 대한민국과 마찬가지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독립 국가들은 "조국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서구화 되고 제국주의화 되고 기독교화 되어, 스스로 서구적 근대의 가치들을 신봉하면서 자신들 나라의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을 더욱 가속시켰다. 서구적 근대화에 성공했다고 하는 우리의 서울과 같은 각 나라들의 중심부에는 서구 유럽이거나 미국 백인들이 이식되어 살고 있고, 대한민국과 마찬가지로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자연 중심부에는 서구 유럽과 미국의 동식물들이 이식되어 살고 있다.

II. 인천 <배다리 사람들>과 <강, 원래 프로젝트>의 동식물들

제 8회 서울 환경영화제에서 "한국 환경영화의 흐름"이라는 섹션으로 묶여있는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류무선 감독의 애니메이션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엄태화 감독의 <신봉리 우리집; 흔한 이야기>, 김소희 감독의 <배다리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서구적 근대화의 인식론은 서구와 비서구를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나누듯이 인간과 동물, 남성과 여성, 문명과 자연을 이분법으로 나누어 서구 중심, 선진국 중심, 인간 중심, 남성 중심, 그리고 문명 중심으로 세계를 인식한다. 그러나 류무선의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에서 보듯이 물과 바람이 내포하는 자연은 외딴 시골이나 지리산 골짜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시멘트가 되거나 아스팔트가 되어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통하여 시멘트와 아스팔트의 냄새로 우리의 생명과 함께 하고 있다. 그래서 그 자연과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연을 변화시킬 힘도 함께 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엄태화 감독이 "흔한 이야기"라고 명명하듯이 근대화라는 명분으로 비서구, 후진국, 동물, 여성, 그리고 자연으로 구성된 근대 국민국가 변두리의 원주민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고 밀려나 마침내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고 있다. <신봉리 우리집; 흔한 이야기>는 그렇게 밀려나고 밀려나는 것이 싫어서 스스로 서울이나 개발 도시에서 떠나 경기도 수지의 신봉리에 들어와 살았던 가족의 다큐멘터리이다. 그러나 그곳이 "신봉리"에서 "신봉동"이 되어가는 와중에 신봉리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곳에 살고 있었던 고양이 가족과 멧돼지 가족이 모두 신도시 개발이라는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의 희생자들이 된다. 나무와 흙과 돌의 바람이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아파트의 바람이 되면서 나무와 흙과 돌의 바람으로 사는 원주민들은 사라지고,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아파트의 바람을 먹고 사는 서구화 되고, 자본주의화 되고, 기독교화 된 이주민들이 원주민 흉내를 내는 것이다.

김소희 감독의 <배다리 사람들>에는 최초로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1950년 한국전쟁에서 피난을 나와 이곳으로 왔거나 혹은 도심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이곳으로 도망쳐 온 사람들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서울의 낙원동이나 돈암동의 재개발에서 밀려나 강 건너 사당동이나 방배동으로 갔다가 다시 강남 개발로 상계동이나 일산, 혹은 성남으로 밀려갔다가 다시 신도시 개발로 더 멀리 쫓겨난 사람들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아우성치는 것과 같다. 배다리 마을을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만든 이들이 그곳의 원주민들이다. 그곳을 정말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만드는 개발과 발전이라면, 그들 스스로 변화하고 발전하도록 만드는 것을 정부와 시는 도와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정부와 시, 그리고 시의회 사람들은 배다리 마을을 스스로 "역사문화 마을"로 만들어 보호하면서 변화하고자 하는 원주민들의 소리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총 다섯 개의 단편영화들로 구성되어 있는 <강, 원래 프로젝트>의 단편영화들에는 죽어가는 원주민들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19세기와 18세기의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 스페인어나 영어, 혹은 프랑스어를 하지 못한 아프리카인이거나 아메리카 인디언이듯이 한강과 낙동강의 원주민은 인간의 언어를 하지 못하는 식물이거나 물고기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이동렬 감독의 <강길>이나 <강에서...>에 등장하는 어린이들이고, 박명순 감독의 <농민 Being>에 등장하는 유기농 농민이며, 김준호 감독과 박채은 감독이 공동 제작한 <저문 강에 삽을 씻고>에 등장하는 노동자이며, 또한 김성만 감독의 <죽지 않았다>에 등장하는 환경단체에서 일하는 여성이다. 어린이, 농민, 노동자, 그리고 여성이 강에 살고 있는 동식물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그들의 삶이 자연의 동식물들과 마찬가지로 근대화와 서구 근대성이 만드는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의 희생자들이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나 시인, 혹은 영화감독처럼 어린이, 농민, 노동자, 그리고 여성과 같은 사회와 국가, 혹은 지역의 인간 원주민들이 물고기와 강 주변의 식물들, 그리고 철새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벗 삼아 삶과 생명의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다. 더욱이 살아있는 생명들이 서로 어우러져서 만드는 변화와 생성의 아름다움은 결코 인간의 기술이 만드는 개발이나 발전의 인위적 아름다움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져서 자연과 인간을 새롭게 생성시키는 우주의 아름다움은 근대적 개발과 발전의 환상 속에서 모든 아름다움을 자본과 권력으로 치환되는 근대적 개발의 과학과 철학으로 무장한 근대인들의 눈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이 땅에 살면서 서구 유럽의 가치와 미국의 자본과 권력으로 사는 것은 한반도 대한민국의 원주민이 아니라 식민지 이주민이고, 식민지에 이식된 자본과 권력의 노예이다.

자본과 권력의 이주민 노예에서 벗어나는 길은 한 때 바로 우리 자신들이었던 어린이나 소녀, 혹은 여성이나 농민, 혹은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어린이 되기, 소녀 되기, 여성되기, 혹은 농민 되기나 노동자 되기는 과거로 돌아가거나 생물학적 성을 바꾸거나, 직업을 바꾸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의 진정한 원주민들인 소수자 되기는 어린이나 농민의 느낌, 소녀의 감각, 그리고 여성과 노동자의 생산적 즐거움을 우리가 스스로 향유하는 것이다. 콜럼부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나 바스코 다 가마의 "희망봉 발견"이라고 배운 근대적 지식과 이성을 버리고 어린이와 농민의 느낌과 소녀의 감각을 향유하고, 그리고 여성과 노동자의 생산적 즐거움을 향유할 때, 우리는 뉴타운 개발정책이나 4대강 프로젝트와 같은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의 근대화 프로젝트를 "녹색성장"이니 "친환경" 혹은 "친서민 정책"으로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지 않을 때, 우리는 이명박 정부와 더불어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에 참가하는 범죄자들이 되는 것이다.

III. 모든 사라져 가는 것들에게 애도를 표하자!

서구적 근대의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은 대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미국과 캐나다는 아메리카 대륙의 일부가 아니라 서구 유럽의 섬이 되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프리카의 일부가 아니라 서구 유럽의 변방이 되었으며,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아시아의 변방이 아니라 서구 유럽 백인들의 마지막 희망이 되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서울은 아시아 대한민국의 수도가 아니라 뉴욕이나 런던, 혹은 파리나 베를린보다 더 근대화 된 서구 유럽이나 미국의 한 도시가 되었고, 청계천처럼 이 땅의 흙이나 바람, 혹은 물을 마시며 살아가야만 하는 원주민들의 생명은 시멘트나 아스팔트 혹은 아파트로 꽉꽉 막아 숨을 쉬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이러한 서울의 "원주민 학살 초토화 작전"은 이제 인천과 부산, 광주와 대구, 그리고 대전으로 이어져서 마침내 대한민국 전 국토의 "원주민 학살 초토화 적전"으로 확대하고 있다. 우리의 근대적 인식과 과학, 그리고 철학적 사유방식이 건재하고 있는 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처럼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에게 애도를 표하면서 대한민국 원주민 문화의 순례를 떠나는 일이다. 한강을 비롯한 낙동강, 그리고 다른 여타의 강들은 현재의 청계천처럼 시멘트로 범벅이 될 것이고, 그곳의 원주민 동식물들은 숨을 쉬지 못하고 마침내 사라질 것이며, 그렇게 위장된 강물 위에 현재의 청계천처럼 새롭게 이식된 동식물들이 마치 원주민처럼 숨을 쉬며 살 것이다. 이동렬 감독의 <강길>은 그렇게 사라져 가는 것들에게 애도를 표하면서 마지막으로 떠나는 순례의 길을 카메라의 렌즈로 잡았다. 그 순례의 길에 동참하자!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서울이나 인천, 혹은 부산에 남아있는 마지막 원주민들의 문화를 순례하자! 용산 서부이촌동의 골목길, 동대문 왕십리나 황학동 거리, 서대문 아현동의 언덕들을 오르내리자! 그렇게 순례의 길에 오르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 모든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사진들의 기억과 더불어 어린이, 소녀, 농민, 여성, 그리고 노동자의 느낌과 감각과 즐거움을 향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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