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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수혈로 매독 걸렸는데, 확인할 길 없다?"

한마음혈액원, 냉동고 고장으로 혈액샘플 52만 건 변질사고

사고로 심한 화상을 입은 김모 씨(52)는 2004년 8월 5일 병원에서 적혈구 농축액을 수혈 받았다. 그 후 김 씨는 우연히 자신이 C형간염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수혈 때문에 감염됐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그는 특정수혈부작용 신고를 했고, 헌혈자 혈액샘플(보관검체)을 검사한 결과 C형간염에 걸린 사람으로부터 수혈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결국 그는 보상금 4000만 원을 받았다.

병에 감염됐을 때, 그게 수혈 때문인지를 밝힐 수 있었다는 점에서 김 씨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앞으로는 수혈로 인한 감염 여부를 확인하는 게 불가능한 경우가 상당수 생기게 됐다. 지난 4월 11일부터 20일까지 민간 혈액공급기관인 한마음혈액원에서 보관하던 '혈액 샘플' 8년치 분량이 냉동고 고장으로 상온에 노출된 사고가 벌어진 탓이다. 그 결과 한마음혈액원이 2004년부터 2011년 6월에 채혈한 52만 개의 혈액샘플이 변질됐다.

혈액 샘플(보관 검체)은 헌혈한 사람에게서 채취한 혈액 320~400가운데 일부(5)를 별도로 보관한 것이다. 직접적인 수혈에 쓰이지는 않지만, 수혈 후 부작용이 의심될 때 해당 혈액이 특정 질병에 감염됐는지 검사하는 데 쓰인다. 혈액 샘플은 10년간 영하 20도에서 냉동 보관해야 한다. 혈액 샘플이 적정온도에서 보관되지 않으면 항체가 변하고 바이러스가 죽어서 양성(감염)이었던 결과가 음성(비감염)으로 잘못 판정될 수도 있다. 변형된 혈액 샘플로는 혈액공급기관이 환자에게 질병에 감염된 피를 잘못 조달했는지 여부를 제대로 알 수 없다.

한국에서 수혈로 인해 감염된 질병이 보고된 사례로는 A형·B형·C형 간염, 말라리아, 매독, HIV/AIDS 등이 있다. 예컨대 수혈로 매독에 걸린 사람이 그게 수혈 때문이라는 점을 입증할 수 없다면, 심한 곤경을 겪게 된다. 이번 사고로 인해 이런 경우가 종종 생기게 됐다.

문제는 이밖에도 많다. 수혈로 감염될 가능성이 있는 질병 가운데 일부는 잠복기가 적게는 수년에서 많게는 십 년 이상에 달한다. 만약 교통사고를 당한 환자나 과다 출혈한 산모 등이 한마음혈액원이 병원에 공급한 피로 수혈을 받은 지 8년이 지나서야 특정 질병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떻게 될까. 2004년부터 2011년까지 보관 중이던 혈액 샘플을 유실한 만큼, 그 인과관계를 따지기가 쉽지 않다. 이번 사고를 쉽게 넘길 수 없는 이유다.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는 "사고 이후 한마음혈액원에서 (간염 등) 기존에 양성 판정을 받은 80여 개 혈액 샘플을 가지고 시험한 결과, 양성이었던 일부 검체가 상온에 노출돼 음성으로 변질됐다"고 말했다. 바이러스에 감염돼 수혈하지 않은 피 중에 일부를 검사한 결과, 감염된 피가 '감염되지 않은 것'으로 변질됐다는 뜻이다.

문 잠긴 냉동고, 고장난 외부 온도표시장치

▲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한국환자단체연합회
한마음혈액원은 2002년 대한산업보건협회가 설립한 민간 혈액공급기관이다. 국내 병원에 공급하는 혈액의 95%는 대한적십자사가 담당하고, 나머지 5%가량을 한마음혈액원이 담당한다. 우리나라 양대 혈액공급기관인 셈이다.

한마음혈액원이 대전에서 보관하던 혈액샘플 52만 개를 지난 4월 11일부터 상온에 노출시켰다는 사실을 파악한 시점은 지난 4월 20일이다. 한마음혈액원은 무려 열흘 동안 냉동고 외부 제어판의 온도표시장치가 고장 난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한마음혈액원 관계자는 질병관리본부에 알리지 않고 혈액 샘플을 수도권에서 대전으로 이전시켰으며, 자사 직원을 한 명도 대전 냉동고에 파견하지 않았다고 시인했다. 이 관계자는 "같은 계열사인 대한산업보건협회 직원이 주기적으로 바깥에서 온도표시장치의 수치를 확인했으나, (혈액 보관고) 안에 들어가서 온도를 확인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사고 당시 냉동고는 보안을 외부에 위탁해서 문이 잠긴 상태였고, 온도 이상 시 울리는 그 흔한 알람 경보도 없었다. 총체적인 관리 부실 상태였던 것이다.

한마음혈액원이 혈액샘플 유실 사고를 보건복지부와 질병관리본부에 보고한 시점은 '분기별 보고'를 하는 날인 4월 30일이었다. 사고 사실을 인지한 지 또 다시 열흘이나 지났다.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는 "혈액에 이상이 생겼을 때는 즉시 보고해야 한다는 지침이 있지만 혈액 샘플에 대해서는 관련 규정이 없어서 보고가 지체됐다"고 말했다. 질병관리본부는 사고 사실을 숨기다가 한 달이 지난 후인 지난 1일에야 밝혔다.

"혈액원이 사고 대비 매뉴얼 안 만들었다"

의사이자 한마음혈액원의 전직 직원인 A 씨는 "이번 사고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며 "혈액관리법 시행령이나 시행규칙을 보면 반드시 표준업무지침에 따라 일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는데, 혈액원이 표준업무지침을 만들지 않고 혈액관리를 주먹구구식으로 하니 사고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A 씨는 "혈액원은 사고를 대비하기 위한 매뉴얼도 만들지 않았고, 온도 모니터링 시스템, 전반적인 혈액관리 방안에 대한 계획도 전혀 없이 서둘러서 혈액 샘플만 대전으로 옮겼다"며 "그러니 사고가 나도 인지하는 데 오래 걸리고, 사고가 터지면 그때그때 미봉책을 내놓게 된다"고 꼬집었다.

대한적십자사와 한마음혈액원에서 두루 일했던 그는 "적십자나 한마음혈액원이나 돌아가는 조건이 똑같다"며 "안에서 바꿀 수 있는 게 없어서 절망하고 적십자에서 나왔는데, 한마음혈액원도 똑같아서 그만뒀다"고 고백했다.

"예를 들어 혈액을 냉장고에 넣으면 적정온도인 1~6도에 보관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혈액원이 혈액보관을 외주화해서 삼성냉장고에 맡겼다고 가정합시다. 혈액원은 삼성냉장고가 적정온도라고 보고하면 확인도 안 하고 믿습니다. 실제로 적정 온도가 지켜지는지 감시하지는 않는 거죠.

게다가 행정을 하는 사람은 위험 대비를 손해라고 봅니다. 메인 온도계가 고장 날 것에 대비해 제 2의 온도계를 사달라고 했다고 칩시다. 온도계 하나에 10만 원씩 20개가 필요하다고 보고하면, 그런 건 필요 없다고 합니다. 돈이 드니까요."


그는 "작년에도 냉장고 관리 소홀로 적십자사에서 수혈용 혈액을 버리는 사고가 났는데 1년 만에 이번에는 한마음혈액원에서 또 사고가 났다"라며 "사고가 되풀이되는 것도 문제"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7월 5일 대한적십자사 부산혈액원에서 냉장고 고장으로 수혈용 혈액 2176개가 보존온도를 일탈한 사건을 두고 한 말이다. 당시 적십자사 혈액공급팀장은 이상 온도에서 보존된 혈액을 출고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농축적혈구 416개 중 4개가 수혈됐으며, 혈소판농축액 308개 중에 검사부적격판정을 받은 12개를 뺀 296개가 환자들에게 전량 수혈됐다.

한국 전체 수혈공급의 95%는 대한적십자사가, 나머지 5%가량을 한마음혈액원이 담당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의 전반적인 혈액 관리 시스템이 미비하다는 지적이다.

"환자 본인이 수혈 감염 의심 안 하면 혈액사고는 영영 묻혀"

질병관리본부는 "이번에 노출된 혈액샘플은 (지난해 사고와는 달리) 환자에게 수혈되는 혈액이 아니므로 헌혈 혈액의 안전과는 무관하다"며 "다만 앞으로 수혈부작용 조사를 위해 사용할 혈액샘플의 안정성을 확인하고 있다"며 진화에 나섰다.

A 씨는 "진짜 수혈용 혈액이 아니라, 샘플이라서 괜찮다는 논리는 궁색하다"며 "만약 그 냉동고에 진짜 수혈용 혈액을 보관했다면 어떻게 됐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냉장고 안에 어떤 피가 들었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냉장고 관리 시스템, 혈액 보관 시스템이 그렇게 엉망으로 돌아갔다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A 씨는 2003년, 2004년에도 B형간염, C형간염, HIV/AIDS 감염 혈액이 유출됐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혈액공급기관이 감염된 피를 수혈한 사실을 알고도 은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감염병에는 잠복기가 있고 발병시점이 될 때야 환자는 감염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면서 "의사가 그 전에 발견하면 다행이지만, 환자 본인이 자신의 병이 수혈에 의한 것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면 수혈 사고는 영영 묻힌다"고 설명했다.

▲ 수혈을 통해 C형 간염에 걸린 혈우병환자들이 2004년 7월 정부, 대한적십자사, 제약사 등의 혈액관리 책임을 추궁하는 기자회견을 여는 모습. ⓒ연합뉴스

혈액원 "B형 간염 걸린 혈액 30건 미리 못 잡아낸 것 인정"

감염 혈액임에도 '정상 혈액'으로 잘못 유통된 혈액을 수혈받아 감염된 환자는 몇 명이나 될까.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최영희 전 민주당 의원은 2008부터 지난해 10월까지 총 14명의 A형간염 보균자가 헌혈했고, 이 혈액을 30대 임산부 등 2명이 수혈받아 A형간염에 감염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2010년 국정감사에서 손숙미 새누리당(전 한나라당) 의원은 2006년부터 2009년 9월까지 수혈부작용으로 인한 HIV/AIDS 의심 감염건수는 8건이었으며, 그 가운데 3건은 아직도 원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시사저널> 보도에 따르면, 한마음혈액원이 새 혈액검사 장비를 도입한 지난해 5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동안 B형 간염에 감염된 양성 혈액 중 10건이 기존 검사에서 음성(정상)으로 나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혈액은 적혈구, 혈장, 혈소판으로 나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개수는 30건으로 불어난다. 다시 말해 새 장비를 도입하기 전인 2011년 이전에는 감염 혈액이 '음성 혈액'으로 둔갑해 이미 환자들에게 수혈됐을 수도 있는 셈이다.

한마음혈액원 관계자는 "B형 간염에 걸린 혈액 30건이 나온 것은 인정한다"며 "우리가 잘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B형 간염 외에 다른 전염성 질병이 발견됐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보건복지부에서 나와서 지금 조사를 하는 만큼, 조사가 끝나기 전까지는 다른 질병에 (감염된 혈액이 발견됐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혈액 안전 위해 정부가 '국립혈액관리원' 만들어야"

혈액사업의 문제점으로 A 씨는 혈액사업에 전문성과 독립성이 확보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혈액을 채취하고 관리하고 공급하는 일은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지만, 혈액원에서 일하는 사람은 전문적인 의사가 아니라 주로 행정직이라는 것이다.

혈액원의 독립성에 대해서는 "외국에서는 혈액사업이 다른 사업과 분리돼 독립적인 것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적십자사업의 일부에 혈액사업이 들어가 있다"며 "구호 활동하던 사람, 대북 지원하던 사람들이 혈액원 원장으로 오고간다"고 비판했다.

그는 "과학지식이 있는 전문인이 독립적으로 혈액사업을 하지 않으니, 원장들이 혈액사업에서 돈만 빼먹고 흑자만 내면 된다고 생각하고 안전에는 부실하다"며 "암 환자나 장기질환자를 치료할 때는 수혈이 중요한데 혈액공급기관의 흑자를 위해서 국민, 그 중에서도 아픈 사람이 볼모로 잡혀야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대로 관리 감독할 책임이 있는 정부의 무능력도 도마에 올랐다. A 씨는 "정부는 14개 헌혈카페에 각각 15억 원씩 210억 원을 한마음혈액원에 지원했지만, 돈만 주고 제대로 운영되는지는 감시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부 공무원들도 혈액사업의 메커니즘을 잘 모른다"며 "감사하러 온 사람이 혈액원이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데 뭘 감사하겠나"라고 반문했다.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상임대표는 "전 세계적으로 혈액사업을 적십자만 하는 나라는 20여 개국에 불과하고 영국, 프랑스, 캐나다 등 상당수 나라에서는 혈액사업을 국가가 관리하고 책임진다"며 "우리나라는 국가가 혈액사업에 손 놓은 꼴"이라고 비판했다. 선진 혈액 관리 시스템 구축을 위한 대안으로 안 대표는 "헌혈자 개인의 질병정보 관리, 혈액 검사, 혈액샘플(검체) 보관 등은 적어도 국가가 직접 해야 한다"며 질병관리본부 산하에 '국립혈액관리원'을 둘 것을 제안했다. 아울러 그는 "정부가 혈액관리 정책을 제대로 만들고, 안전 감독을 철저히 시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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