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월가 점령 시위의 시발점인 뉴욕 주코티 공원을 방문해 지지 연설을 했던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24일(현지시간) <가디언> 기고를 통해 시위대들이 현 경제위기와 민주주의의 쇠퇴를 불러온 시스템의 대안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젝은 월가 점령 운동이 부자들의 탐욕 때문에 촉발됐다는 주장에 대해 현재 위기를 불러온 현 시스템의 문제를 숨기려는 의도가 있는 주장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시위대들을 향해 그는 정치 개혁을 유도해 민주적 제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또 다른 패착으로 연결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치 공간을 벗어나 누구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현 상황의 해법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현재 전 지구적인 위기 상황에 대해 '답을 알고 있지만 그 답을 이끌어내기 위한 질문을 찾지 못한 상태'라고 규정했다.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유는 그 문제가 있다고 설명할 언어가 없기 때문'이라는 그의 주장이 앞으로 전개될 시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다음은 이 칼럼의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원문 보기)
▲ '오클랜드를 점령하라' 시위대의 모습. ⓒ로이터=뉴시스 |
월가 시위 이후, 이젠 무엇을 해야 하나?
멀리 떨어진 중동, 그리스, 스페인, 영국에서 시작된 시위가 (위기의) 중심에 당도한 뒤, 이제 더 강화되고 전 세계로 퍼지는 지금 우리는 월가 점령 운동의 여파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지난해 10월 1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벌어진 동조 시위에서 한 남성은 군중들에게 이 시위가 마치 1960년대의 히피 스타일로 전개됐다는 듯이 동참을 권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계획이 뭐냐고 묻는다. 우리는 계획이 없다. 우리는 즐기려 이곳에 왔다."
그런 말들은 시위대들이 마주한 가장 큰 위험 중 하나를 드러낸다. '점령'한 장소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위험이다. 축제는 싸게 먹힌다. 축제의 가치에 대한 진정한 시험은 (축제) 다음날 무엇이 남았는지,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있다.
시위대들은 힘들고 인내가 요구되는 일과 사랑에 빠져야 한다. 이는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기본적인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금기는 깨졌다. 우리는 실현가능한 최상의 세계에 살지 않는다. 우리는 대안을 생각할 수 있도록 허용됐고, 해야 할 의무가 있다.'
헤겔의 변증법식으로 보면 서방의 좌파 진영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수많은 반(反)인종주의, 페미니즘 투쟁 등을 위한 소위 '계급 투쟁 본질주의'(class struggle essentialism)를 포기한 뒤, '자본주의'가 현재 명확하게 문젯거리로 재부상했다.
우리가 하지 않아야할 할 두 가지를 먼저 들면, 부패에 대한 비판과 금융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우선, 사람과 그들의 태도를 탓하지 말자.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라 당신을 부패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해답은 메인 스트리트나 월스트리트에 있는 게 아니라, 메인 스트리트가 월스트리트 없이 기능할 수 없는 이 시스템을 변화시키는데 있다.
교황청의 유명인사들이 위에서 우리에게 과도한 탐욕과 소비의 문화에 맞서 싸우라는 명령을 퍼붓는다. 확실히, 이 싸구려 설교의 역겨운 모습은 이데올로기적인 작업이다. 현재의 문제를 개인의 잘못, 개인의 정신적 성향이 원인인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교황과 가까운 신학자 하나가 한 말처럼 "현재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도덕의 위기"라는 얘기다.
에른스트 루비치의 영화 <니노치카>(1939)에서 나온 유명한 농담을 떠올려보자. 주인공이 카페에 가서 크림 없는 커피를 주문했다. 웨이터가 답했다. "죄송하지만 우리는 크림이 다 떨어졌습니다. 우유밖에 없습니다. 우유를 넣지 않은 커피를 드릴까요?"
1990년 동유럽 공산권 해체 과정에서도 비슷한 속임수가 있지 않았나? 시위를 벌인 민중은 자유를 원했고 부패와 착취가 없는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들이 받은 것은 자유와, 연대와 정의가 없는 민주주의였다. 마찬가지로 교황 주변의 가톨릭 신학자들은 시위대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없이 도덕적 부당함과 탐욕, 소비지상주의를 타깃으로 삼아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강조한다. 자본의 자가발전식 순환은 점점 더 우리 삶의 궁극적인 현실이 되어가고, 통제될 수 없는 짐승이 된다.
승산이 없다며 자기애에 빠지는 유혹, 숭고한 아름다움을 띤 시위가 실패하는데 경탄하고픈 유혹을 피해야 한다. 구질서를 대체해야하는 결정적인 신질서의 모습은 무엇일까? 시위의 숭고한 열정이 언제 식을까? 이러한 질문은 시위대의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요소다. 시위대들이 표현하는 진정한 분노는 사회·정치적 변화를 위한 최소한의 구체적 계획으로 변형되지 못한다. 그들은 혁명(revolution)이 없는 저항(revolt) 정신을 드러낸다.
1968년 파리 시위대에 라캉은 "너희들이 혁명가로서 열망하는 것은 새로운 주인이다. 너희들은 새로운 주인을 하나 갖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스페인의 '분노하라' 시위대에도 적용된다. 시위대들은 부인한다고 해도 자신들의 시위가 구질서를 대체하는 신질서를 위한 확실한 계획 없이 주인에 대한 히스테리성 도발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한, 그 시위는 새로운 주인을 요구하는 차원에서 효과적으로 기능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이 새로운 주인과 만났다. 아마 스페인도 뒤를 이을 것이다. 시위 진영에 전문가들의 계획이 없는 이유에 대해 답하는 것과 마찬가지 맥락에서, (각국은) 정부에 있는 정치인들을 정치색이 없는 테크노크라트(그리스와 이탈리아처럼 대부분 은행가들로 채워진)가 주도하는 '중립적'인 정부로 대체하는 추세다. 다채로운 성향의 '정치인'들은 퇴출되고, 매력 없는 전문가들이 진입한다. 이 추세는 명확하게 항구적인 위기상황이 도래하고, 민주정치가 중단되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 전개상황에서 도전과제를 찾아야 한다. 이데올로기의 가장 무자비한 형태로 나타난 정치색 없는 전문가들을 퇴출시키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 경제 조직체 대신 무엇을 제안할지를 고민하고, 대안에 대해 상상하고 시험하는 한편, 새로운 무엇인가를 잉태할 싹을 찾는 데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공산주의는 시스템이 멈춰 섰을 때 시위대들이 내세울 대안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공산주의는 조직과 규율, '고된 작업'의 새로운 형태다.
시위대들은 자신들의 적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지지하는 척 하면서 시위의 의도를 희석시키려는 못 믿을 우군도 알아채야 한다. 카페인 없는 커피, 알코올 없는 맥주, 지방 없는 아이스크림처럼 그들은 시위를 무해한 도덕적 운동으로 만들려 시도할 것이다.
복싱에서 '클린치'(clinch)라는 용어는 자신을 보호하거나, 상대방의 펀치를 방해하기 위해 팔 하나 또는 양팔로 상대방의 몸을 붙드는 행위다. 월가 시위대에 대한 빌 클린턴의 반응은 정치적 클린치의 완벽한 사례다. 클린턴은 시위대가 "종합적으로 볼 때 긍정적인 현상"이라면서도 시위대의 모호한 메시지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클린턴은 자신이 "향후 1년6개월 동안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 것"이라고 지지를 보냈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일자리 창출안에 시위대들이 지지를 표명하라고 제안했다.
이 단계에서 시위가 저항해야 할 대상은 시위대의 에너지를 '구체적인' 실용적 요구로 재빨리 변형하려는 시도다. 시위가 진공상태를 만든 건 맞다. 패권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진공상태다. 그리고 이 진공을 적절한 방식으로 채우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진공 안에는 무언가가 생겨나고 있고, 진정 새로운 무엇을 만들 수 있는 호기이기 때문이다. 시위대들이 밖으로 나온 이유는 그들이 콜라캔을 재활용하고, 기부함에 몇 달러를 집어넣고, 수익의 1%를 제3세계로 보내는 스타벅스에서 카푸치노를 구입함으로써 기분이 좋아지는 세계에 질렸기 때문이다.
경제의 세계화는 서서히, 하지만 가차 없이 서구식 민주주의의 적법성을 약화시켰다. 세계화의 국제주의적 특성으로 인해 큰 규모의 경제활동은 국민국가의 틀 안에 제한되어 있는 민주적 메커니즘으로 통제하지 못한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은 점점 더 제도 민주주의가 그들의 필수 이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이 점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마르크스의 핵심적인 통찰이 유효성을 갖는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유에 대한 의문은 정치적 공간에서 주요 위치를 차지하면 안 된다. 실질적인 자유의 핵심은 시장에서 가족에 이르는 사회관계의 '비정치적'인 네트워크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실질적인 자유를 원하는데 필요한 변화는 정치 개혁이 아니라 생산 분야의 '비정치적'인 사회적 관계가 변화하는 데서 온다는 예기다.
우리는 공장 안에서의 관계 같이 누가 무엇을 소유하는가에 대해 투표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정치 공간 밖에서 진행되도록 남겨졌다. 누군가가 정치적 공간 안에서 민주주의를 '확장'함으로써, 이를테면 민중의 통제에 놓인 '민주적인' 은행을 만듦으로써 효과적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 그런 '민주적인' 과정 안에서는 우리가 주창하는 반자본주의가 얼마나 극단적인지에 상관없이 민주적 메커니즘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해법이 나올 것이다. 우리는 이 메커니즘이 자본주의 재생산 기능을 그 누구도 건들 수 없음을 보장하는, '중산 계급' 국가가 만든 장치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일관성 있는 계획 없이 국제적인 운동이 부상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하나의 명확한 해법이 없는 위기가 더 깊어졌다는 점을 반영한다. 일종의 정신분석학적 상황이다. 환자는 답을 알고 있다(그의 증상이 답이다). 하지만 그는 무엇에 대답해야할지 모른다. 그리고 분석가들은 질문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런 치료를 통해서만 계획이 나올 것이다.
동독에서 나온 오래된 농담이다. 한 독일 노동자가 시베리아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모든 편지가 검열된다는 것을 알고 친구에게 말했다. "암호를 정하자. 내게서 받은 편지는 파란색 잉크로 쓴 것이면 진실이고, 붉은색 잉크로 쓴 것은 거짓말이다."
한 달 뒤 친구는 파란색 잉크로 쓰인 첫 편지를 받았다. "여긴 모든 게 멋지다. 상점에는 상품이 가득하고, 먹을 것도 풍부하고, 아파트는 크고 난방도 잘 된다. 극장은 서방의 영화를 보여주고, 아름다운 여자들도 많다. 구할 수 없는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붉은색 잉크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상황이 아닌가?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자유를 가졌다. 잃어버린 한 가지는 붉은색 잉크다.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지 않다고 설명할 언어가 없기에 자유로움을 느낀다. 오늘날 붉은색 잉크의 상실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현재의 갈등을 설명할 때 쓰는 '테러와의 전쟁',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 등의 용어가 모두 잘못됐다는 점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우리가 현 상황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하는게 아니라 현 상황에 대한 우리의 통찰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오늘날 우리의 임무는 시위대에게 붉은색 잉크를 건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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