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강 침략의 상황에서 "자유"는 일차적으로 "국권 유지" 내지 "국권 회복", 즉 국가/국민/민족의 자유를 의미했으며, 이차적으로는 체벌, 고문이라든가 연좌제 그리고 화석화된 성리학 등 "고인(古人)의 구(舊) 사상"으로부터의 자유였다. "인권"이라는 신조어가 소개되고, "국민 단결"이라든가 "폐습 타파" 차원에서 노비제 유습의 철폐와 같은 문제들이 "자유"의 맥락에서 간혹 언급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자유는 개인이나 계급보다 국가/국민/민족의 문제였다. 1907년에 조직된 신민회(新民會)는 이례적으로 공화제의 이상까지 품고 있었지만, 대다수 계몽주의자들의 "입헌" 역시 권력과의 투쟁을 통한 권리의 쟁취라기보다는 "국민 단결"을 목적으로 한 제한적 참정권의 청원에 머물렀다.
일제 시대에 접어들어 당연하게도 자유민주주의적 지식인에게는 "민족의 독립"부터 "민족의 실력 양성"까지, 개인의 권리나 계급적 권익보다는 거대한 "민족적" 프로젝트들이 훨씬 더 중요했다. 1920년대의 <동아일보>는 자유민주주의를 사시(社是)로 내걸고 학교의 과도한 체벌부터 경찰에 의한 고문까지 개개인의 권리 침해에 항의했지만, 관심의 중심 역시 "물산 장려"와 같은 토착 지배 계급 위주의 거대한 "민족적 프로젝트"였다. 그런 의미에서, 1930년대 중반 이후에 <동아일보> 유의 매체들이 너무나 쉽게 일제 군국주의 자장(磁場)으로 흡입돼 그 선전 기관이 된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권보다 국권을 우위에 두는 그 기본적인 세계관에, 그렇게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해방 이후에 남북한 양쪽은 각각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표어로 내걸었지만, 양쪽 모두 "민주주의"는 표피에 지나지 않았다. 강약과 구체적 성향, 외부적 환경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남북 모두 강력한 중앙 집권적인 동원 국가를 지향했던 것이다.
요즘 이승만을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원조쯤으로 보려는 사람들이 간혹 보이는데, 작년에 나온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만 봐도 그 당시 "자유민주주의"의 수준이 대체로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노동당과 협력하려 했던 신민당에 잠시 입당한 적이 있었다고 해서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는 젊은 사업가 김대중을 납치하다시피 하여 죽도록 팬 우익 단체부터(1권, 63~64쪽), 선거 때에 자유당만 무조건 지지하라고 지역 노동조합 간부들을 체포하고 감시하는 경찰까지(1권, 92~93쪽), 자유민주주의를 지켰다기보다는 대다수 피(被)통치자들의 동의를 얻을 수 없었던, 외세에 무조건 기대야 했던 부패한 기득권 피라미드를 뒷받침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승만을 정점으로 했던 과두(寡頭) 독재는 그나마 허약하기라도 했지만(1권, 114~115쪽), 박정희가 1970년대 초반에 들어 구상한 병영 체제는 일제 말기의 총동원 체제 이상으로 공고했다. 1971년 대선에 대해서 당사자였던 김대중 자신이 "선거에서 이기고 투·개표에서 졌다"(1권, 250쪽)고 평가할 만큼, 정보 정치와 지역 감정 조장의 시대에 형식적 선거, 제도적 "자유민주주의"는 거의 의미를 잃었다시피 했다. 그 의미를 복원한 것은, 김대중 자신이 선두에 나서서 온갖 희생을 치르며 주도해온 민주화 투쟁이었다.
그 투쟁의 성과가 컸다는 것을 김대중을 비판해온 좌파도 인정한다. 최초의 진정한 정권 교체와 함께 그때까지 추상적 원칙 수준에 머물렀던 민주주의가 그나마 내실화된 것을 최고의 성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미 100여 년 전에 <독립신문> 지면에서 처음에 요구된 고문이나 연좌제의 근절이 비로소 이뤄진 것도 한국 근대사 전개의 일대 경사라 할 수 있겠다. 또한 1950년대에 조봉암(1898~1959년)이 외쳤다가 법살(法殺)을 당하고 만 "평화 통일"을 위한 첫걸음으로서 햇볕 정책이 실시돼 북한이 "반국가 단체"에서 졸지에 협력 대상자로 바뀐 것도, 지난 반세기 동안 조봉암, 최근우(1897~1961년) 등 억압 받아 비명에 돌아가신 수많은 지사들의 꿈이 부분적으로나마 현실화된 것이다.
이외에 1997~1999년간, 즉 김대중 통치 시기에 이루어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합법화(2권, 68쪽)를 커다란 업적으로 꼽아야 할 듯하다. 합법화된 전교조의 장기적 노력의 결과로 결국 진보적 성향의 교육감들이 선출될 수 있는 기반이 다져진 것이고, 체벌 등에 대한 여론이 점차 바뀌어서 최근 일부 지역에서 이루어진 체벌 금지 등 학생들의 인권 확립이 가능해졌다. 사망이나 부상으로 이어지는 식민지 학교 체벌들을 이미 1920년대의 <동아일보> 등이 반대한 점을 상기하면, 김대중 집권이 계기가 되어서 자유, 인권 차원의 하나의 해묵은 과제가 풀릴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김대중도서관 |
즉, 여러 측면에서 김대중의 집권은 자유민주주의 차원에서 한국적 근대의 누적된 과제들의 해결을 시도한 것이고, 그렇게 한 만큼 분명히 일정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면 과연 김대중의 집권으로 1980년대 말까지 거의 내실을 갖추지 못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완성을 봤다고 볼 수 있는가?
김대중 집권기에 자유민주주의는 상당한 진척을 봤다고 보는 편이 맞겠지만, "완성"은커녕 과거 족쇄들의 상당 부분을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필자의 평가다. 하나의 실례를 들자면, "개인 권리냐 국권이냐"의 문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인 척도는 신념, 사상, 양심 자유의 폭이 제한돼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파시즘, 인종주의 등 역사적으로 "반(反)사회적"이라고 확고히 단죄된 일부 신념/사상에 대한 법적인 제한을 가하는 것까지 자유민주주의 질서 차원에서는 가능하겠지만, 원칙상 자유민주주의란 개인에 의한 신념/사상의 자유 선택을 의미한다. 그 어떤 "국가적 이유"도 그 선택의 폭을 제한시켜서는 안 된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유럽 국가마다 그 강령에 "무장 혁명"까지 제시하는 급진 좌파 정당들이 거의 모든 경우에 합법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필자가 한국 국적자임에도 불구하고 당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노르웨이의 (공산당 격인) 적색당의 강령만 봐도 "혁명"은 명기돼 있다. (☞바로 보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에서 적색당은 합법적 활동의 권리가 보장돼 있고, 전국적으로 평균 약 2~3%의 지지를 받고 있는 공공 정당이다.
김대중 정권에 의해서 많이 개선됐지만, 과연 김대중, 노무현의 10년 집권 이후에 한국에서 이와 같은 강령을 갖고 있는 정당이 합법적 활동을 할 수 있을까? 김대중 자신도 그 자서전에서 국가보안법 철폐 실패를 자신의 큰 패배로 인정했지만(2권, 428~429쪽), 사실 이 실패는 그가 실행할 수 있었던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김대중도 노무현도 철폐시키지 못한 국가보안법에 의해서 현재에도 오세철(연세대학교 명예교수) 등 사노련(사회주의노동자연합) 활동가들이 한국에 국제적 망신을 가져다 주는 "사상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의 극우적 정권 하에서야 일어날 수 있는 민주주의 후퇴라고 보는 이들이 많겠지만, 사실 (북한과 완전히 무관한) 사회주의자 등 "이단 분자"에 대한 야만스러운 마녀 재판들은 김대중 치하에서도 벌어지곤 했다. 한 예를 들자면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등 일련의 "이적 표현물"들을 번역, 출판한 출판사 책갈피의 대표 홍교선이 1999년에 국가보안법으로 실형을 받아 옥살이를 한 적이 있었다. 해당 "이적 표현물"의 원저자인 영국 요크 대학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등 전국 유명 대학에서 초청 강의를 하고 있었을 때에 그 강의 교재인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을 출판한 국내인은 옥고를 치르고 있어야 했다(☞관련 기사).
필자의 노르웨이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면 아무도 믿지 못할 이 희대의 희비극은, 국가보안법 사형수 출신의 김대중이 한국을 통치하고 있었을 때에 일어났다. 보안 기관의 판단 기준이 "급진 사회주의 사상이 국가를 위협한다"는 저들의 통념이었는데, "위협"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국가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개개인의 사상을 탄압, 통제해도 된다는 사고를 국가가 아직도 공인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 "자유민주주의"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단지 하나의 사건만 가지고 김대중 정권의 성격을 논하기가 어렵다는 반론이 제기될지도 모르지만, 김대중 치하에 국가보안법으로 옥중에서 허송세월(虛送歲月)해야 했던 피해자들이 수두룩했다. 1998~2000년만 해도 국가보안법 사건 관련 구속자들은 약 870명에 달했다. 물론 이와 동시에 전두환, 노태우 등 자유민주주의를 짓밟아온 살인자들이 사면으로 감옥에서 풀려 나왔다. 그들이 상징했던 권위주의 시대의 잔재는, 김대중의 국가를 위협하지 않았다고 봐야 되지 않나 싶다.
1971년에 피지배층의 표를 성공적으로 모아 박정희를 실제로 압도했다가 선거 조작의 벽에 부딪치고 만 김대중은, 원래 제한적이긴 하지만 적극적 재분배 정책을 지지해온 "친(親)노동자적" 정치인의 면모를 지녔다. 대중을 오로지 동원 대상으로만 봤던 개화기, 일제 시절의 "자유민주주의자"들이나 윤보선(1897~1990년), 장면(1899~1966년) 등 주류 "재야"의 원로와 구별되는, 김대중의 인기를 보장하는 전향적 입장이었다. 김대중은 박정희 시절의 "기적과 같은 고성장"이 단순히 임금 착취, 20세기 역사에서 거의 전례 없는 장시간, 고강도 노동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점을 간파했으며 (1권, 240~241쪽),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대중 (大衆) 경제"를 제시했다. 박현채(1934~1995년) 등 좌파적 성향의 학자들의 자문을 받아 만들어진 이 이론은, 적당한 국가적 복지부터 산업 민주주의, 사원지주제 등 지금으로서도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대안들을 포함했다.
그런데 과연 이와 같은 1970년대 초기 김대중의 "진보적 민주주의", 즉 사회민주주의적 측면이 있는 민주주의 담론의 흔적이라도 대통령으로서 김대중의 통치 행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국제통화기금(IMF)의 불가항력(不可抗力)의 강제가 있었다고 변명하기도 하지만, 대량의 외자(外資) 유입에 의한 민영화와 같은, "대중 경제" 정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정책을 김대중 정부는 IMF의 요구 이상으로 열정적으로 추진했다. 한국통신, 한국중공업 등 11개의 초대형 공영 기업들이 팔려나갔으며, 4만2000명 정도의 공영 부문의 종사자들이 그 일자리를 잃었다.
민영화된 기업들의 수익성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그 비결 중의 핵심은 김대중 자신도 1970년대 초반에 그토록 비판했던 임금 착취의 극대화였다. 한국통신 등 민영화된 기업들은 정규직을 감축시켜나가며 비정규직을 양산해내기만 했는데, 살인적 착취에 노출된 비정규직들의 투쟁을 김대중 정권이 무시하거나 철권으로 짓밟곤 했다. 정부 중재의 노력은 전무하고, 점거 등 급진 투쟁에 정부가 초강경 진압으로만 대응하곤 했던 한국통신 비정규직의 2000~2002년 장기간 파업 투쟁 등은 김대중 시절에 가장 취약한 노동자들이 직면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관련 기사)
"대중 경제" 대신 한국 노동계를 급습한 것은 초강경 신자유주의 정책과 경찰 국가식 탄압뿐이었다. 기초생활보호급여 제도의 신설 등 일부 복지 정책은 실시되긴 했지만, 한국은 여전히 "복지 꼴지"의 악명을 피하지 못했다. 즉, 1995년에 국민총생산의 3,2%에 머물렀던 공공 사회 지출은 김대중 통치 시기를 거쳐 2005년에 6,4%의 수준에 올랐지만, 이는 멕시코의 수준(6,8%)에도 미달한다. 스웨덴(29,1%)는 물론, 미국(15,8%)과의 비교마저도 아직 불가능하다(☞바로 보기).
▲ 2010년 아시아 유럽 정상 회의를 개최한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도서관 |
복지 등의 장밋빛 색깔의 공약은 물거품이 되고 한국은 여전히 사회적 민주주의를 논의할 수 없는 초과 착취의 "반(反) 노동적 국가"로 남아 있다. 하나의 계급으로서 노동자는 종합적으로 그 위치가 하락하고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양분돼 무력화되는 반면, "부동산 경기를 활성화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에 의해 과열된 부동산 경기를 잘 탄 거액 부동산 소유자와 투기 세력, 건설 업체들이 엄청난 이득을 챙기면서 지배층 안에서의 핵심적 그룹으로 그 위치를 굳혔다. 토지 공개념의 사실상의 폐지, 각종 건설 관련 규제 완화, 분양가 자유화 허용 등의 김대중 정부 시절 "친(親) 건설 정책"으로 인해 치솟은 땅값과 아파트값을, 그 뒤에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사실, 부동산 관련 정책으로 본다면 김대중 정부와 현재 이명박 정부는 생각보다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요약하자면, 햇볕 정책이나 사형 집행 중지, 전교조 합법화 등을 위시한 일부의, 물론 큰 의미를 지니는 진척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인으로서의 김대중은 크게 봐서 반(半) 이상 실패했다. 김대중과 그의 후계자 노무현의 통치 시기를 지나간 한국은, 여전히 "이단 분자"를 감옥에 집어넣는 경찰 국가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초과 착취로 기업의 이윤을 보장해주는 "반(反) 노동적 국가", 거액 부동산 소유주와 집 한 채 없는 서민으로 양분된 "양극화 국가"로 남아 있다. 여전히 개개인의 사상, 양심의 자유도, 노동계급 전체의 권익도 국가와 기업들은 각각 무참히 짓밟고 있는 형국이다.
이는 김대중 개인의 실패라기보다는, 그가 대표하는 보수 자유주의 야당의 구조적 실패다. 아무리 친(親) 민중적 공약을 내놓아도, 실제로는 극소수 재벌과 관벌의 이해관계만을 대표하는 보수야당 정치인들은, 대한민국을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국가 내지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만들 이유도 없고 만들 수도 없다.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완성을, 오로지 노동자, 농민, 영세민을 대표하는 진보 정당만이 해낼 만한 잠재적 힘을 보유할 수 있다. 단, 그들이 심하게 분열돼 있고 그들 중의 상당 부분은 아직도 보수적 야당 세력의 "도우미" 역할에 스스로 만족하려 하는 점, 즉 그들의 실질적 정치력이 아직도 그들의 사명만큼 크지 못한 점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 필자 박노자는, 블라지미르 티호노프라는 이름으로 구소련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으며, 레닌그라드국립대 동양학부 극동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모스크바국립대에서 박사학위를 각각 받았다. 애당초 전공은 한국고대사였지만, 1997-2000년 국내의 한 사립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받은 현재 한국 사회에 대한 충격이 너무 강한 나머지 학술적 관심마저도 궁극적으로 근현대 역사 및 사회로 집중됐다. 2001년에 한국 시민권을 취득했으며, 2000년부터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동아시아 및 한국 관련의 여러 과목들을 가르치면서 산다.
* <프레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널리 구합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중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과제 등에 관한 진솔한 생각을 담아 webmaster@pressian.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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