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대선 패배가 분명해지던 시점인 2007년 7월 4일 만들어졌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보편주의에 기반한 '역동적 복지국가' 모델을 우리 사회가 나갈 방향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그 당시 '복지국가'라는 담론에 대해서 소위 진보정당은 개량주의라는 시각이 절대적 우세였고, 당시 열린우리당(통합민주당)은 너무 급진적이라는 시각이, 당시 한나라당은 빨갱이 같은 소리라는 시각이 우세였다.
한국정치에서 복지국가 담론의 변화 - 상전벽해(桑田碧海)
그간 한국정치에서 복지 예산과 복지 정책에 대한 요구는 있었지만, 단 한번도 '국가 모델'로서 보편주의 복지국가가 의제화 된 적은 없었다. 그것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마찬가지였고, 소위 진보정당이 2004년 원내진입을 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출범한 지 2년 후인 2009년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이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라고 선언한다. 또한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의 무상급식 정책이 이슈가 되고, 지방선거 이후 치러진 민주당의 2010년 10월 전당대회에서 정동영 의원은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그간 주장했던 '역동적 복지국가' 담론을 정치적으로 차용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의 모든 정치세력은 너도 나도 '복지국가' 담론을 내세우며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집권당이며 동시에 2004년 이후 원내과반의 의석수를 가졌던 참여정부 시절, 법인세와 특별소비세의 '감세'를 주도하고 금산분리 완화, 의료민영화 도입, 기업도시법 제정, 경제특구 지정, 출자총액제 완화 등을 주도했던 당시 열린우리당이 마치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지금은 민주통합당의 이름으로 보편적 복지, 재벌개혁, 경제민주화를 의제로 꺼내들었다. 더 놀라운 것은 여기에 한나라당이 동참할 기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너도 나도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를 만장일치로 찬성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국이다. 총선을 앞두고 여야 정당들은 이제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가 금방이라도 실현될 것 같은 환상을 심어주는 것 같다. 심하게는, 마치 대한민국에서 오래지 않아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식 복지국가가 실현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야흐로 '레토릭 진보'와 '레토릭 복지국가' 담론이 한국 정치판을 평정한 셈이다. 한마디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요, 상전벽해(桑田碧海)이다.
복지국가는 고위 수준의 '정치전략' :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정치철학'의 중요성
민주당은 2010년 6.2지방선거 직후 치러진 2010년 10월 전당대회를 통해 '보편적 복지'를 강령에 삽입하고 보편적 복지국가가 민주당의 정체성이라고 선언하였고, 최근 민주통합당은 △보편주의 복지국가 △경제민주화 △한반도 평화체제 실현을 3대 핵심 노선으로 정비했다. 이는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고, 칭찬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많은 국민들의 시각에서 보면, '과거'에 대한 해명과 사과가 없었다는 점에서 진정성의 부족이 우려되고 있지만, 또 한 가지 우려스러운 것은 '철학'과 '전략' 부분이다.
그것은 가령 이런 것들이다. 도대체 보편주의 복지국가, 경제민주화, 한반도 평화체제 사이에는 무슨 '내적 연관'이 있는 것인지, 셋 중에서 무엇이 가장 상위가치인지, 무엇이 우선하는 가치인지, 이것들이 지지층의 동원과 유권자 동원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등에 대한 '정치철학적', 혹은 '정치전략적' 논의가 좀 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복지국가 유형론으로 유명한 덴마크의 사회학자인 에스핑 안데르센은 스웨덴 사민주의의 이념적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그것은 바로 △개혁주의(=점진주의) △의회주의 △다수자정치연합이다. 이중에서 한국적 현실에서 특히나 중요한 것은 '다수자 정치연합'의 원리이다. 예컨대, 스웨덴이 처음부터 복지국가를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에 기반을 둔 정치적-사회적 권리의 확대를 기본 방향으로 하되, '다수자 정치연합'의 원리를 전략적 마인드로 관철하다보니 보편주의 복지국가로 귀결된 것이다.
이러한 스웨덴 사민주의 역사가 오늘날 한국의 복지국가 건설 논의에 시사해 주는 실천적 교훈은, 보편주의 복지국가는 단순한 '정책 꾸러미'의 나열이 아니라 '정치전략'이라는 상위의 가치를 전제로 할 때만, 올바로 실천되고 현실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보편주의 복지국가 △경제민주화 △한반도 평화체제의 '내적 상호관계'에 대해서 충분히 고민하고, 토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민주정부 10년 동안 선의를 가지고 추진하였던 개혁 정책들의 상당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중에서도 보편주의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의 상호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윤리적'으로 옳은 정책을 넘어, '정치적'으로도 옳은 정책이어야 한다
우리는 먼저 △윤리적으로 옳은 것 △논리적으로 옳은 것 그리고 △정치적으로 옳은 것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가 2004년 소위 '4대 개혁 입법'으로 추진되었던 국가보안법 폐지의 좌절이다.
2004년 총선은 한국 정치사상 최초로 민주파의 원내 과반을 실현한 선거였다. 그래서 매우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게다가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의 의석을 합치면 170석이 넘었다. 그러나 4대 개혁 입법은 좌절되었고, 국가보안법은 폐지는커녕 개정에도 실패했다. 이러한 실패에 대해 우리가 환기해야 할 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가장 중요한 원인인데, 국가보안법 폐지라는 의제는 '윤리적'으로는 옳은 것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현명하지 못한 의제였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당시 국민들은 "먹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상황이었다. 즉, 국민들 입장에서는 민생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 국민들에게 국보법 폐지는 그 윤리적 옳음에도 불구하고, '이념적' 접근으로 오해되기에 충분했다. 즉,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엘리트주의적 오만함'이 개혁 좌절의 본질적 이유였다. 한마디로 의제 설정(Agenda Setting)에서 실패했다.
둘째,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국가보안법에 대한 '박물관 발언' 이후에,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이적표현물과 불고지죄 등을 포함한 '7조 개정'에 대해서는 당론으로 확정했다. 이에 당시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은 '7조 개정'에 대한 양당의 서면합의를 이뤄냈다. 왜냐하면, 당시 이부영 의장이 보기에 열린우리당은 중도-보수적인 색채를 가진 분들까지 있었기에 추진 동력이 약하다고 봤던 것이다. 그런데, 열린우리당의 운동권 출신 '탈레반'들은 이를 의총에서 부결시켰다. 그들의 논리인즉, 국가보안법 폐지만이 옳은 것이고, 개정은 타협이라는 것이다. 또한 당시 진보정당 역시 국보법 폐지만이 옳은 것이라며 국회 앞 농성에 돌입했다.
그런데 국가보안법 구속자의 90% 가까이가 7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만일 우리가 '7조 개정'을 이뤄낸다면, 국가보안법을 사실상 사문화(死文化)시킬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국가보안법 폐지는 '윤리적'으로 옳은 것일 수는 있지만, 취약한 국민적 동력과 원내 동력을 감안한다면 7조 개정이 윤리적으로도 옳고, '정치적'으로도 옳은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옳다'는 것의 본질 – 다수자 정치연합과 국민적 지지와 엄호
이러한 4대 개혁 입법의 좌절과 국보법 폐지의 좌절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실천적 교훈은 무엇인가? 압축하면 그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국민적 지지 여론'이 동원 가능한 방법론을 채택할 때만 개혁의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주체적-객관적 지형지물에 대한 지혜로운 판단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우리는 늘 상기해야 한다.
최근 경제민주화 담론이 부상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경제민주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리고 삼성을 비롯한 '재벌 체제'가 한국 사회 기득권 체제의 본질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적극 동의한다. 이것은 모두 '논리적'으로 충분히 동의되는 주장들이다. 그러나 재벌체제가 한국 사회 기득권 구조의 '핵심'에 해당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들과의 싸움은 매우 장기적이고, 매우 강력한 국민적 에너지의 동원을 필요로 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보편적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의 상호관계에 대한 '정치전략적' 이해와 실천은 더더욱 중요해진다. 우리가 각종 개혁적 조치들, 그것도 매우 중요하고 규모가 큰 것일수록, 이것을 관철시킬 수 있는 근본 동력은 '다수자 정치연합'에서 나온다. 즉, 국민적 지지와 엄호이다. 우리는 이 점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올바른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국민적 에너지를 가장 강력하게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국민들이 '가장 고통 받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수자 정치연합'을 이룰 수 있는 정책적 의제에 우선적으로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이 바로 보편적 복지 의제들이다. 예컨대, 국민적 동의가 높은 △무상의료 △주거복지 △대학등록금에 대한 무이자 전면후불제 실시 △김상곤 식 혁신학교의 대대적 확대 △무상보육 및 국공립 보육시설 확대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해소 △자영업자에 대한 복지 확대 등의 정책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무상의료 등의 정책은 '국민의 지지를 받는' 재벌과의 한판 싸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생각해보면 매우 자명한 것인데, 국민적 동의가 높은 정책의제들이 실현되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된다. 먼저 무상의료 정책을 살펴보자. 무상의료 정책은 현재 60% 수준인 건강보험 보장성을 OECD 평균인 85-90% 수준으로 높이는 정책이다. 국민들은 본인이 부담해야 할 40% 부분에 대한 의료비 불안으로 인해 민간보험 상품을 구입하고 있다. 그래서 삼성생명, 대한생명, 교보생명 등에 가입하고 있는데, 이중에서도 시장점유율 1등을 고수하는 곳은 바로 삼성생명이다.
삼성그룹의 기업지배 구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삼성생명은 이를테면, '국민적 의료 불안'을 상품화하는 것을 통해 시장지배력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무상의료 정책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세력은 삼성생명을 포함한 민간보험 업체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보수언론을 비롯한 기득권 엘리트 세력이 무상의료 반대의 전면에 나서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상의료 정책의 실질적 추진은 '국민 다수'를 한편으로 하고, 재벌-보수언론-이와 연계된 엘리트 정치세력을 한편으로 하는 재벌 옹호세력과의 '정책적 내전'(內戰)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2010년 지방선거와 오세훈의 무상급식 주민투표 논란에서 쟁점이 되었던 무상급식의 예산규모가 약 2조 원 내외였다. 그런데 무상의료는 추가적 예산규모가 12조 원 내외라는 점과 정치ㆍ사회적 파급력이 훨씬 더 심대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재벌-보수언론-친여 정치세력 등 한국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결코 양보하기 쉽지 않은 의제라 할 수 있다.
무상의료 정책이 '정책적 내전'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주거복지'의 문제와 '교육복지'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용산 참사의 진짜 배후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면, 그 배경에는 포스코와 삼성건설, 현대건설 등의 '건설자본', 즉 재벌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 건설자본은 뉴타운 개발을 통해 원주민들을 내쫒는 대가로, 막대한 주택가격의 거품을 조성하여 이윤을 획득했다. 바로 이것이 용삼참사와 같은 '살인적인' 철거를 하게 만들었던 근본 배경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거복지의 확충 역시도 결국은 재벌체제 옹호세력과의 정책적 내전의 성격을 가지게 될 것이다.
교육복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작년에 크게 논란이 되었던 대학 등록금 문제에 대해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대학 등록금 무이자 전면 후불제'를 대안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의 추진은 국민 다수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반면, 사립학교 재단들 및 재벌들의 이해관계와 근본적으로 '충돌'하는 측면이 있게 된다.
보편적 복지 정책의 '정치사회적' 파괴력 - 재벌공화국을 민주공화국으로
요컨대, 보편주의 복지국가는 그 자체로 '정치전략'이며 동시에 '경제민주화 전략'이기도 하다. 물론 경제민주화라는 당면 과제는 부당내부거래와 중소기업에 대한 부당한 지배 등 별개의 독립적 의미를 가지는 측면도 있다. 이러한 정책은 그 자체로 추진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 정책의 성공은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을 때 성공할 수 있기에, 정책 실현의 우선순위는 "국민들이 가장 고통 받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특히, 한국 사회를 '삼성공화국'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중요한 것은 삼성공화국, 혹은 재벌공화국을 바꿀 수 있는 '힘-동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이다.
'자본주의'에서 권력의 근원이 '자본'이라면, '민주공화국'에서 권력의 근원은 '국민'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 복지 정책의 도입은 그 자체로 자본의 힘으로 생활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권력'에 맞서는 '국민권력'의 대항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편적 복지국가를 위한 정책적 실현 과정은 '재벌공화국'인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만드는 과정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재벌공화국을 실질적인 민주공화국으로 바꾸는 과정은 단지 '레토릭 진보'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그 과정은 철저하게 권력의 본질이 '국민'이라는 점을 뼈아프게 각성한 상태에서, 정치적 지혜와 국민과의 소통, 그리고 신뢰구축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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