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그래미상 시상식 사회를 맡은 엘엘 쿨 제이의 주도로 청중들은 휴스턴을 기리는 기도를 올렸고, 특별 공연을 연 스티비 원더는 "하늘로 간 휘트니에게 사랑한다는 얘기를 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미국의 오디션 프로그램 <아메리칸 아이돌> 출신 가수 제니퍼 허드슨이 휴스턴의 최고 히트곡 '아이 윌 올웨이스 러브 유'(I Will Always Love You)를 부르기도 했다. 휴스턴의 사망 소식이 타전된 후 그가 과거에 불렀던 곡들은 음원 사이트 아이튠스 판매 1위에 올라섰다.
가정 불화와 약물 중독에 시달리면서 지난 10여 년간 연예 가십 기사에나 주로 등장했던 그의 죽음을 미 주요 언론들이 대서특필하는 건 1980~1990년 대 '팝 디바'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 휴스턴을 기억하는 팬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최근 몇 년간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 재기를 위해 발버둥치던 그의 삶이 허무하게 끝나면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12일 휘트니 휴스턴이 인생 전반기에 이뤘던 영광과 그 이후의 몰락을 다루는 부고 기사를 냈다. 휴스턴은 큰 성공을 거둬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인종차별을 극복한 상징으로 부각되기도 했지만 스스로는 그에 대한 자각이 크지 않았다고 신문은 전했다.
신문은 많은 유명인사들이 몰락을 경험하지만 휴스턴의 몰락은 더욱 극적으로 전개되었다면서 갑작스런 그의 죽음이 '미국의 연인'으로 찬사 받던 과거의 영광과 대조돼 더욱 슬픈 현실로 다가온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이 기사의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원문 보기)
▲ 1997년 연인 바비 브라운과 함께 찍힌 휘트니 휴스턴. ⓒAP=연합뉴스 |
휘트니 휴스턴만큼 아름다운 목소리를 타고난 가수는 별로 없다. 그리고 그처럼 좌절과 무관심으로 재능을 낭비해 결국 삶의 끝으로 향했던 이들은 더욱 적다. 그는 20세기 어느 여성 팝스타보다 많은 앨범을 팔았고 많은 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몇 해 동안 자신의 노래를 하고픈 의지를 꺾고 엉망으로 만들었던 마약 중독의 늪에 빠져 있었다.
48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그의 앨범은 다시 앨범 차트 순위에 오를 것이다. 그를 1990년대에 최고의 상업적 성공을 거뒀던 문제 많은 인물로만 알고 있는 젊은 세대에 그의 음악이 다시 소개될 것이다.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최고의 뮤지션이었고(그의 재능은 종종 단조로운 성인 취향의 곡에 낭비됐다), 단순한 히트송 제조기 이상이었다. 당대 어떤 가수보다 우위에 있었던, 흠잡을 데 없는 기교와 세련미로 찬사를 받았다.
휴스턴은 가스펠 훈련을 받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알앤비(R&B), 팝, 발라드에도 어울렸고 그 스스로도 각 장르 스타일에 익숙했다. 그가 1992년에 커버했던 돌리 파튼의 '아이 윌 올웨이스 러브 유'는 가장 큰 성공을 가져다 준 발라드곡이였다. 가장 파워 넘치는 곡 중 하나로 남아 있는 이 노래는 전 세계에 1200만 장이 팔렸고,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싱글 중 하나가 됐다. 그의 총 앨범 판매량은 1억7000만 장으로 그의 감성과 기교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온을 포함한 슈퍼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휴스턴은 역경을 극복하는 내용을 가사로 담은 드라마같은 곡을 종종 불렀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영향력이 유지되는 '팝 디바'(pop diva) 장르를 창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또 당시 거의 백인 가수들만 출연하던 <MTV>의 흑인 차별을 뚫은 최초의 흑인 여성이다. 이 방송이 그의 뮤직비디오를 비중있게 편성하면서 그는 미국의 중산층에 친숙한 얼굴이 됐고 그의 매력과 재능, 친숙함으로 인해 흑백을 막론하고 수백만 10대 소녀들의 우상이 됐다. <US 매거진>의 편집자는 그에게 "최초의 흑인 출신 미국의 연인"(the first black America's sweetheart)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휴스턴의 성공은 그를 부자로 만들었고, 그가 30~40대에 접어든 후 수 년 동안 앨범 제작을 할 수 없게 만들었던 코카인 복용을 가능케 했다. 2000년대 후반 마약을 끊은 그는 과거를 돌아보면서 "돈이 많았기 때문에" 마약을 사기 쉬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노래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고, 순회공연을 위해 복귀했을 때 그 후유증이 드러났다. 그는 무대에서 자주 숨을 헐떡거리거나 노래를 중단했다. 2010년 그는 컴백 공연을 열었지만 그가 무대에 서 있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혹평을 받으며 실패했다. 그리고 불안했던 그의 공연 영상은 TV 뉴스에 등장했다.
미 뉴저지 뉴어크에서 태어난 휴스턴의 집안은 뮤지션 가족이다. 모친은 가스펠 스타 시시 휴스턴이었고, 그의 사촌은 디온 워윅이었으며, 대모는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11살 때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시작했고, 모친의 콘서트 무대에도 함께 올랐다. 그의 목소리는 관심을 끌었고, 15세가 되자 그는 모친과 함께 샤카 칸의 1978년 히트곡 '아임 에브리 우먼'(I'm Every Woman)의 백코러스를 함께 맡았다.
그는 루 롤스나 저메인 잭슨의 작업에도 보컬로 참여했으며, 동시에 모델로도 성장했다. 동안의 매력을 가진 그는 카메라 앞에서 성공을 거뒀다. 당시 패션잡지는 표지에 흑인의 얼굴이 거의 실지 않았지만 미국 잡지 <세븐틴>은 1981년 그의 얼굴을 역대 두 번째로 표지에 냈다. 이러한 파격에 대한 '대비책'으로 휴스턴의 옆에 백인 모델을 세웠지만 말이다.
10대 후반이 된 휴스턴은 디스코 음악 작곡가 폴 자바라와 뉴욕의 아방가르드 펑크 밴드 매터리얼의 앨범에 보컬로 등장했다. 당시 그의 보컬 스타일은 완전히 형태를 갖췄는데, 매터리얼의 곡 '메모리스'에서 그는 10대로서는 기묘하게 보컬 톤의 풍부함과 침착함, 정확성이 균형을 이뤘다. 그는 곧 레코드 취입 제안을 받았고, 그의 가수 경력 내내 함께 한 아리스타 레이블과 계약했다.
그에게 대스타가 될 자질이 있다고 확신한 아리스타 레이블 대표 클라이브 데이비스는 휴스턴의 첫 앨범 녹음을 직접 감독했다. 데이비스는 또 1983년 '머브 그리핀 쇼'에 휴스턴과 함께 출연해 미국 대중에게 그를 선보였다. 휴스턴은 마이클 잭슨이 출연했던 뮤지컬영화 <마법사>(The Wiz, 1978)의 사운드트랙 중 '홈'(Home)을 불렀는데, 그의 노래는 나무랄 데 없었지만 유행에 뒤떨어진 주름치마와 단발의 자연스러운 헤어스타일은 아리스타 레이블이 생각했던 상업적으로 성공할 이미지는 아니었다. 1985년 그의 첫 앨범이 나왔을 때 그는 대변신을 했다. 앨범 커버사진에 실린 그는 윤기 나는 머리칼에 흰 드레스를 우아하게 입은 금빛의 요정이었다.
데뷔 앨범 제목을 자신의 이름으로 정한 휴스턴이 호응을 얻은 것은 예상치 못한 댄스 팝 장르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21살의 가수가 보여주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롤링스톤>은 이 앨범이 "명백하게 스타덤을 추구한다"라고 평했다. 그의 데뷔 앨범은 발매 첫해 미국에서 300만 장이 팔렸고 결국 전 세계에서 2500만 장이 팔렸다. 그는 이 앨범으로 그래미상도 받았는데 이후 그가 받은 6개의 그래미상 중 첫 수상이었다.
이후 몇 년간 그는 7곡을 싱글차트 정상에 올리며 비틀즈가 세웠던 기록을 경신했고 미국에서 가장 수입이 많은 흑인 여성 연예인이 됐다. 라디오와 TV 도처에서 들리는 그의 노래는 메리 제이 블라이즈나 데스티니스 차일드(Destiny's Child) 같은 이들이 성공하게 되는 길을 터줬다.
모든 연령대와 다양한 문화적 배경에 걸쳐 있던 그의 인기는 블라이즈같이 상대적으로 상품화가 쉽지 않은 뮤지션들을 도왔지만 그는 동시에 연예인이기도 했다. 넬슨 만델라의 7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콘서트에 출연하는 등 인종차별 정책과 싸우는 일에 때때로 말려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활동가는 아니었다. 정치와 인종 문제에 대한 그의 사적 견해가 어떻든 그의 공적인 모습은 항상 침착하고 건전했다. 역설적으로 1990년에 나온 앨범 '아임 유어 베이비 투나잇'(I'm Your Baby Tonight)에서 그가 선보였던 도시적인 솔(soul) 사운드는 몇몇 흑인 비평가로부터 회의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상업적으로 그를 가장 널리 알린 건 1992년에 나온 영화 <보디가드>로, 휴스턴은 영화배우로 출연해 삽입곡까지 부르고 케빈 코스트너가 보디가드로 출연한다. 최악의 연기자를 뽑는 라즈베리 시상식은 그해 휴스턴에게 최악의 여주주연상을 안겨줬다.(하지만 휴스턴은 이후에도 몇 편의 영화에 더 출연해 더 나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부른 이 영화의 OST는 전 세계에서 4400만 장이 팔리면서 그의 음반 커리어 중 최고의 성공을 안겼고, '아이 윌 올웨이스 러브 유'를 탄생시켰다. 이 곡은 미국 음반 순위에서 14주 간 1위에 랭크되었으며 다른 국가 순위에서도 상위에 머물렀다.
같은 해 휴스턴는 보이밴드 출신의 가수로 나중에 겪은 추락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비난받게 되는 바비 브라운과 결혼했다. 휴스턴은 나중에 이 결혼을 두고 "공주님이 악동과 결혼했다"고 스스로를 비꼬았다. 그와 브라운 사이에서 바비 크리스티나가 태어났다. 그러나 브라운은 아내의 성공을 질투했고, 정서적으로 폭력적이었다. 휴스턴의 약물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고 1996년경이 되자 그는 매일 약물을 복용했다. 그는 1998년 호평을 받았던 앨범 <마이 러브 이스 유어 러브>(My Love Is Your Love)를 냈지만, 21세기로 접어들면서 그녀의 행동에 대한 소문들이 만연해졌다.
휴스턴은 공연에 지각하거나 일정을 아예 놓치기도 했다. 2000년 아카데미상 축하무대 리허설에서는 정상이 아닌 상태를 보이면서 결국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 마리화나를 소지했다가 체포되는가 하면 2001년 마이클 잭슨 헌정공연에서는 해골처럼 마른 몰골로 등장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몇몇 유명인사들이 굴욕적으로 몰락하며 고통 받았지만 휴스턴의 경우는 충격적이었다. 마약 문제와 가정 불화는 그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그의 목소리에서 고음을 빼앗았다.
휴스턴의 모친은 2006년 그를 강제로 재활원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이듬해 휴스턴은 브라운과 이혼한다. 그의 마지막 앨범 <아이 룩 투 유>(I Look to You)는 2009년 발매돼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다. 그는 여전히 앨범 홍보를 위한 순회공연 티켓을 대부분 팔아치울 정도로 스타 파워를 유지했다. 하지만 많은 팬들이 그의 목소리가 더 이상 혹독한 순회공연 일정을 소화하지 못한다고 불평했다.
2011년 5월 휴스턴은 추가 재활치료를 받았다. 지난해 가을 그는 1976년 영화 <스파클>(Sparkle)을 리메이크한 영화에 미국의 오디션 프로그램 <아메리칸 아이돌> 출신 조딘 스팍스와 함께 출연하기 위해 복귀했다. 세 명의 자매 이루어 졌던 그룹 '슈프림스'의 명성과 약물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최근 완성됐다.
휴스턴은 그래미상 시상식 전날 참석한 파티 리허설 장소였던 로스앤젤레스의 한 호텔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바로 밝혀지지 않았다. 쓸모없이 낭비된 몇 년이 지난 후 이런 일이 생겨야만 했다는 것은 '미국의 연인'이라 불렸던 그의 화려한 순간을 떠올렸을 때 슬프게 대조된다. 휴스턴는 모친과 두 오빠, 그리고 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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