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고용노동자의 고통을 증명하며 1500일 동안 싸운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착취와 저항의 상징인 현대차 비정규직, 20번째 죽음의 공장 쌍용자동차…. 재벌의 탐욕에 갈기갈기 찢겨진 노동자들이지만 함께 고통을 나누고, 함께 희망을 꿈꾸는 이들이 있어 영하 20도의 혹한에도 '희망뚜벅이'들은 마냥 즐거웠습니다.
가슴과 열정으로 써내려간 시가 낭송되고, 따뜻한 음악이 함께 흐르는 광장에서 우리들은 희한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전철역 맞은편 건물에 걸려있는 대형 현수막이었습니다.
"보수의 힘과 진보의 열정으로
비정규직 임금 근로조건 격차해소 특별법 제정 추진"
정당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아 어느 당의 후보일까 잠시 어리둥절했습니다. 총선 예비후보자의 커다란 사진과 이름 아래 아주 작은 글씨로 ①번이 적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야 그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국민들의 비난과 원성이 높아 새누리당(옛 한나라당)이라는 당명은 숨겼지만, 서민들의 고통의 핵심이 비정규직이라는 것을 간파한 후보가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위한 특별법'을 선거 모토로 내걸었나 봅니다.
ⓒ박점규 |
'비정규직 차별해소 특별법 제정' 공약의 주인공은?
더욱 놀라운 것은 이날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는 "국민 모두가 골고루 잘살도록 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지만 비정규직 문제는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과제"라며 "공정임금과 고용보장, 두 가지를 중심으로 현실적인 안을 만들었다"고 밝혔습니다.
새누리당 총선공약개발단은 2015년까지 공공기관·금융기관 비정규직 전원 정규직화와 동일노동 동일임금, 대기업 사내하도급 정규직 수준의 대우 등을 총선 공약으로 보고했습니다.
새누리당의 이날 발표는 공약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대 '변신'입니다. 전태일과 노무현이 만난 게 아니라 전태일과 박근혜가 만났다는 주장이 나올 법한 상황입니다.
사람을 미혹하는 사이비 교주들의 창궐
"말세와 종말로 갈수록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마태복음 24장)는 성경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자본주의의 말세, 재벌공화국의 종말로 가는 걸까요? 어디선가 나타난 사이비 교주들이 비정규직 차별철폐와 정규직화를 외치며 사람을 미혹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지난 4년 동안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떠들며 법인세 인하, 고환율 정책, 폐차보조금에 4대강 사업까지 국민의 세금을 털어 재벌의 곳간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들은 '해고는 살인'이라며 절규했던 쌍용차 노동자들을 경찰특공대로 진압했습니다. 쌍용차 살인진압에 자신감을 가진 자본가들은 정권의 비호 아래 금호타이어, 발레오, KEC, 유성기업, KT, 철도공사 등 전국에서 정규직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웠습니다.
재벌과 부자들의 '절친'이었던 그들이 지금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말합니다. '경제를 살리겠다'던 이명박 정권 4년, 850만 비정규직의 절망이 온 나라를 휘감고, 이명박 정권과 탐욕의 재벌 때문에 '배고파서 못 살겠다'는 노동자 서민들의 분노가 들불처럼 번져가는 것이 두려운 걸까요?
ⓒ박점규 |
"보수세력마저 급진적으로 이동하는데 진보정당은…"
'사람을 미혹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는 교주들은 새누리당만이 아닙니다.
지난 1월 31일 민주통합당은 △2017년까지 비정규직 절반으로 축소 △비정규직 정규직 임금의 80%까지 인상 △정규직 전환 지원금 △해고요건 강화 등의 공약을 발표했습니다.
공공·금융부문 비정규직 전원 정규직화와 같은 새누리당의 획기적 변신을 보지 못해 '얌전한 공약'을 냈지만, 앞으로 총선이 다가올수록 더 '쎈' 공약을 쏟아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민주통합당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노동자들의 격렬한 반대를 폭력으로 진압하고 정리해고법, 파견법, 비정규직법이라는 '3대 노동악법'을 만들어 850만 비정규직의 절망을 양산한 주범입니다.
지금은 이명박 정권의 몰락으로 반사이익을 얻고 있지만, 그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안겨준 고통은 현대차 비정규직 불법파견 투쟁 8년, 기륭전자 비정규직 1895일, 재능교육 1500일, 한국지엠 비정규직 1300일이라는 숫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민주통합당의 얌전한 공약에 대해 민주노총은 "노동정책의 방향이 부족하나마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지만 고용목표는 아직까지는 목표일뿐이며, 이를 보완하는 세부 정책이나 재원조달방안에 대한 내용은 전무한 상태"라고 평가했습니다.
이에 대해 공공운수노조 박준형 정책실장은 트위터에서 "보수세력마저도 '공공부문 비정규직 아예 없애겠다'는 정도로 급진적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진보정당들이나 노동운동은 '정책실현가능성'부터 먼저 재고, 노동자부터 스스로 세금 많이 내자는 주장까지 창궐하고 있으니, 나부터도 답답하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사이비 교주를 알아보는 법
재벌과 부자들의 친구였던 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노동자, 서민들의 친구라며 거짓 약속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연대를 외면했던 이들이 버젓이 진보정당 후보로 출마하고 있습니다. 사이비 교주들이 창궐하는 시대지만 누가 노동자의 벗인지 아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첫째, 하루 8시간, 주5일 일하는 상시적인 일자리에 비정규직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비정규직 사용사유 제한'과 '상시업무 정규직화'가 없는 공약은 가짜입니다.
둘째, 사람 장사를 용인한 근로자파견법, 2년마다 비정규직을 마음껏 해고해도 되는 ''비정규직법을 폐기하지 않고 임금만 올려주겠다는 공약은 사기입니다.
셋째, 진짜 사장은 사라지고 '바지사장'이 활개 치는 도급, 용역, 외주 등 간접고용을 금지하지 않고 비정규직 보호한다는 공약은 가짜입니다.
넷째, 회사가 멀쩡해도 온갖 수법으로 정리해고하고, 그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우고, 법원이 경영상 필요를 폭넓게 인정해주는 정리해고법의 폐지 없는 공약은 기만입니다.
다섯째, 정규직은 관리자들뿐이고, 생산직은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채워진 기아차 모닝, 현대모비스, 현대중공업 군산공장 등 야만적인 공장을 처벌하지 않는 공약은 거짓입니다.
너무 복잡하다고요? 그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2004년 노동부의 불법파견 판정에도 불구하고, 8년 동안 근로자파견법을 위반하며 1만 명의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2010년 7월 22일 대법원 판결마저 거부하며 불법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현대차 정몽구 회장을 구속시키겠다는 공약이라면 어떨까요?
여러분들의 사이비 교주 감별법을 알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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