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보통선거'와 비슷한 역사를 지니게 될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 시민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정한 소득이 보장돼야 한다는 '기본소득(Basic income)' 주장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는다.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이라 해서, 투표권을 제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전혀 일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또 이건희 삼성 회장과 같은 부자에게도 매달 일정한 돈이 지급된다. 얼핏 들으면 황당하다. 여성과 흑인에게도 투표권을 줘야 한다는 주장이 한때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기본소득은 상당히 깊은 이론적 배경과 역사적 뿌리를 지니고 있다. 예수는 아침부터 일한 사람, 저녁 늦게야 일을 시작한 사람에게 똑같이 1데나리온씩 나눠준 포도원 주인에 대해 말했었다. 맑스주의자들 역시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질서가 근본적인 위협을 받으면서, 기본소득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프레시안>은 기본소득네트워크와 함께 기본소득 관련 기획을 진행한다. <편집자>
1. 노동자는 이제 '하나'가 아니다
'20대 80의 사회'나 '노동의 종말' 같은 말로 하나의 시대를 요약하려던 책들이 낡은 느낌의 수사학적 과장으로 여겨지기 시작할 무렵이었을 것이다. 비정규노동자가 본격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 그들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차지하게 된 것은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몇 달 전 99%의 이름으로 1%의 착취를 비판하는 시위가 뉴욕에서 시작되었다. "월가를 점령하라!" 20대 80에서 1대 99로 어느새 밀려가 버린 것이다!
'노동의 종말'이란 말에 대해 동의를 하든 반박을 하든, 그 문제를 보는 시각은 무엇보다 자동화와 컴퓨터화를 필두로 하는 새로운 기술의 전면화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러한 기술들의 전면화가 노동 자체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종류의 일자리를 만들어내 새로운 종류의 노동을 늘려갈 것인지가 그때 주된 논쟁의 자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본이 실제로 선택한 길이 그와 달랐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같았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였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으며, 어쩌면 그것이 중심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정보통신망을 통해 공장의 벽을 넘어 확장된 생산의 장은, 때로는 일자리를 줄이기도 하고 때로는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기도 하면서, 직접적인 생산과 소비, 유통과 보관 등을 하나의 '라인'으로 엮으며 피드백에 의해 조절되는 새로운 생산망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사는 물건이 바코드를 읽어 POS로 입력되면, 그것은 유통과 보관만이 아니라 생산되는 상품량의 조절, 그리고 새로운 상품의 기획까지 조절하는 자료가 된다. 생산의 유연성이 극대화되며, 그에 따라 소비자들의 취향 변화마저 반영하는 '다품종 소량생산'의 유연한 생산체계가 가능하게 된다. 한때 이를 두고 '포스트 포드주의'라면서 새로운 생산의 낙원을 향해 난 길인 것처럼 찬양하던 사람들도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유연한 생산체계가 가능하려면 물자와 노동력의 수급이 그만큼 유연해야 함을 뜻한다. 그러려면 물자를 대는 하청기업은 필요하다면 급속히 물자공급을 늘리고 필요없다면 줄이는 가변성을 감당해야 했고, 노동자들은 필요한 때엔 고용되었다가 필요 없으면 해고되는 변덕을 감수해야 했다. 물 위를 우아하게 떠가는 백조의 몸놀림 밑에서 미친 듯이 움직여야 하는 두 발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노동의 종말'은 노동이 사라져가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정규적이고 정상적인 양상이 사라져가는 방식으로 왔다.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노동자가 아닌 존재, 사실은 항상적인 잠재적 실업상태에 있으면서, 필요한 때에만 고용되는 비정규노동자들. 그들은 노동자와 하나인 동시에 노동자와 하나-아닌 존재다. 이는 단지 비정규노동자의 임금이 정규노동자의 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일단 비정규노동자로 시작한 사람은 정규노동자가 되기 극히 어렵다. 양자 사이에는 높은 문턱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정규직 노동자들은 바로 옆에서 같이 일을 하는 경우에조차 비정규노동자들을 자신들의 노동조합에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현대자동차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을 자식에게 '세습'할 수 있게 해주는 항목을 교섭사항에 넣었던 악명 높은 사례를 많은 사람들이 아직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또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결성이나 투쟁에 대해서도 정규직 노동자들은 호의적이지 않다.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이 필요 없던 시절에서, 그 말이 소용없는 시절로 바뀐 것이다. 노동자계급이 하나 아닌 두 개의 층으로 분해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의 종말과 함께 노동자계급의 종말이 도래하려는 것일까?
2. 프레카리아트, 혹은 21세기 프롤레타리아트
가장 표면적인 수준에서 볼 때, 비정규노동자는 정규노동자와 실업자 사이에 있는 존재다. 그들은 노동자이지만, 노동자의 규정에서 부분적으로 배제된 노동자고, 충분히 노동자가 되지 못한 노동자다. 그들의 노동은 비정규적일 뿐 아니라 비정상적(abnormal)이다. 즉 노동이란 그들의 삶에서 '비정상적인' 어떤 것이다. 그들의 삶에서 '정상적인 것'이란, 노동과 다른 것, 즉 비노동의 상태다. 그들은 노동하다가 일시적으로 노동하지 않게 되는 존재가 아니라, 비노동의 상태로 살면서 일시적으로 노동하게 되는 존재인 것이다. 그들에게 '노동의 대가'가 지불되는 방식은, 그들에게 주어지는 노동조건은 정확하게 이를 보여준다.
무산자화되고 있는 노동자, 아니 이미 무산자의 지대로 축출된 노동자를 뜻하는 이들을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이 단어는 '불안정함'을 뜻하는 '프레카리오(precario)'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를 합성하여 만든 말이다. 이 말이 광범하게 쓰이는 일본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뿐만 아니라 실업자, '니트(NEET, 구직활동도, 구직훈련도 하지 않는 실업자)'는 물론 '히키코모리'나 비혼모, 가정폭력도피자(DV), 노숙인, 부랑인까지 포함하여 노동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노동하는 자'라는 규정을 갖지 못한 사람들, 다시 말해 노동자계급의 규정성이 소멸되거나 삭제된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범주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노동자가 아니라 무산자로서, 이미 넘어서기 어려운 무산자의 지대에 들어선 자임을 보여주는 개념인 셈이다.
사실 엄밀히 따져보면,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은 '노동하는 계급'보다는 차라리 이들 프레카리아트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단어는 토지를 갖지 못한 로마 시대의 최하층 자유민을 지칭하던 말 프롤레타리(proletari)에서 연원한 것으로, 맑스의 초기 저작인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1843)에서 처음 사용된다. 거기서 맑스는 이 개념을 계급이 아닌 '계급'이란 의미에서 '비-계급'으로 규정한다. "철저하게 속박되어 있는 한 계급, 시민사회의 계급이면서도 시민사회의 어떤 계급도 아닌 한 계급, 모든 신분들의 해체를 추구하는 한 신분", 그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것이다.
노동자계급보다는 무산자,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에 더 가깝고, 노동자계급조차 되지 못한 자에 더 가까운 자들. 그래서인지 <자본론> 1권에서 이 단어가 주로 사용되는 곳은, 인클로저(enclosure)로 토지를 잃고 부랑하던 사람들이나 실업자들이 등장하는 곳이다. 하지만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라는 슬로건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가 '노동자계급'을 뜻하는 것이 되었기에, 노동자도 되지 못한 이질적인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기 위해 '프레카리아트'라는 새로운 단어가 필요했던 것일 게다. 하지만 그 뜻을 본다면, 애초에 맑스가 주목했던 집단은 바로 이들 프레카리아트에 가까운 존재들이었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노동자계급의 혁명성에 대한 연구는 이들 프레카리아트를 통과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3. 노동의 비정규화,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향
프레카리아트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언제나 무산자에서 시작하여 언제든지 무산자로 되돌아갈 수 있는 자들을 지칭한다. 고용되었든 고용되지 않았든, 임노동을 향해 열려 있는 무산자의 상태에 있는 자들을. 노동자는 고용되어 있어도, 잠재적으로는 언제든지 무산자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무산자에 속한다. 비정규노동자는 일시적으로 노동하는 무산자다. 프롤레타리아트란 이 잠재적인 무산자를 뜻한다. 이런 점에서 노동자계급도 프레카리아트와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에 속한다. 이 점에서 양자는 둘이 아니다. 현재 고용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가 양자를 가른다. 이런 점에서 노동자와 비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계급과 프레카리아트는 하나가 아니다.
그런데 노동자가 프레카리아트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프레카리아트가 노동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비정규직의 길은 정규직과 달라, 일단 한번 들어서면 정규직이 되기 매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양자는 하나의 경사면의 양 끝 같은 것이다. 정규직이 프레카리아트로 굴러내려 가는 것은 쉽지만, 프레카리아트가 정규직이 되려면 그 경사면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특별한 기회나 동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자본가들 역시 이와 유사한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비정규직을 쓰는 데 맛을 들인 자본가가 정규직을 굳이 고용하려고 할 가능성은 극히 적다. 더구나 요즘처럼 생산의 유연성이 중요한 시기에 정규직을 안고 간다는 것은 고용의 유연성을 포기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 일을 하지 않아도 임금을 지불해야 하는 부담을 져야 함을 뜻한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 상품에 대한 정보나 가격정보 등의 경쟁이 글로벌한 차원에서 격화된 조건에서, 개별 자본가가 정규직을 쓴다는 것은 시장에서 불리한 경쟁조건을 안고 시작해야 함을 뜻하기에, 정규직화하는 것에는 또 다른 부담이 따른다. 따라서 자본가들 또한 비정규노동자를 정규직화하는 것은 저 경사면을 거슬러 올라갈 특별한 이유가 없이는 기대하기 어렵다.
물론 모든 자본가들이 '정규직화'를 선택한다면, 경쟁조건에서의 개별적인 핸티캡을 부담하지 않아도 되기에 정규직화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빠져나가는 몇몇 자본가들만으로도 그것은 와해되고 만다. 오프사이드 트랩처럼 위반에 벌칙이 가해지는 '보편적인' 강제 없이는, 즉 법적이고 국가적인 강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케인즈주의적 분배정책이나 '복지국가' 정책 이상의 강한 국가적이고 제도적인 강제만이 비정규직 철폐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70년대 이래 자본주의의 역사는 케인즈주의적 정책조차 자본주의가 감당할 경제적 여유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런 국가적 강제는, 이윤율의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고선 기대하기 어렵다.
여기에 또 다른 난점은, 자본가들의 경쟁이 전 지구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국가적으로 정규직화를 강제하는 경우에도, 일본이나 대만 등 다른 나라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역시 경쟁조건에서의 핸디캡을 지고 가야 한다. 이는 자본가들이나 부르주아 국가에 기대하긴 쉽지 않은 일이다. 역으로 한국이나 일본처럼 발 빠른 나라에서 비정규직의 확대가 더없이 급속한 것은, 노동자의 희생을 통해 '국민경제'를 살리고 자본가들의 경쟁력을 서포트하는 오래된(!) 전통 덕분일 것이다.
기술적인 이유에서 추구되는 '노동의 종말'이나 계급적 이유에서 진행되는 비정규직화와 더불어 이런 요인들을 생각해 보면, 노동자의 비정규직화는 이미 지금의 자본주의에서 피하기 어려운 하나의 경향이 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그것은 노동자를 '과잉인구'로 만드는 '자본축적의 일반적 법칙'(맑스)에 따라, 노동자를 더욱더 무산자화하는 하나의 '역사적 경향'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4. 프레카리아트와 기본소득
정규직의 절반에 그치는 소득, 언제 짤릴지 모르는 불안정한 고용상태, 빈번하게 옮겨야 하는 일자리, 안정성도 예측 가능성도 보장되지 않은 미래... 이 모든 것이 비정규노동자를 힘겹게 한다. 그래서 다들 비정규직의 철폐를 원하고 또한 요구한다. 비정규직의 고통과 설움, 불안을 안다면, 그런 요구에 동의하지 않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 것인지는 다른 문제인 것 같다. 비정규직화가 지금 자본주의를 통해 작동하는 역사적 경향이라면, 정규직화란, 일시적이고 개별적인 '예외'를 제외하고는 쉽게 기대할 수 없다. 그것은 차라리 불가능한 요구고, 그 불가능성이야말로 그런 요구를 의미 있게 한다. 정규직화된 고용조차 불가능한 지금 자본주의의 한계지점을 드러내는. 그러나 그것은 정확히 그런 위상에 있는 것임을 알 때에만 유의미한 요구일 것이다. 그것을 통해 비정규직의 현재의 고통이 해소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고 남도 속이는 것이 될 것이다.
맑스는 역사적 경향을 통해 세상을 보고, 그것을 통해 운동의 방향을 찾는 유물론적 사고방법을 알려주었다. 노동자의 비정규직화가 기술적인 면에서나 계급적인 면에서 거스르기 어려운 역사적 경향이라면, 비정규직의 고통을 해결하는 것도, 운동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도 모두 그런 역사적 경향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공동체의 해체나 무산자화가 더없이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문제의 해결이나 노동자계급의 운동을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향 위에서 사고했던 것처럼.
역사적 경향 속에서 비정규직의 문제를 본다는 것, 그것은 비정규직을 정규직이라는 '정상상태'에서 벗어난 일시적 '예외상태'가 아니라 점차 확대될 '정상상태'로 보는 것이다.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함으로써 사라질 존재로서 보는 게 아니라 비정규직인 채 살아가야 할 존재로 보는 것이다. 정규직 노동운동이나 조직을 모델로 비정규직 노동운동이나 조직을 다루는 게 아니라, 비정규직의 존재조건에 부합하는 새로운 운동과 조직의 모델을 만드는 것이고, 역으로 정규직의 운동과 조직조차 그런 비정규직의 운동과 조직을 통해 재구성하는 것이다. 맑스가, 대개는 그 비참함을 보고 고통에 공감하던 '무산'의 상태에서 역으로 "잃을 것이라곤 족쇄밖에 없다"며 그 강점을, 혁명성을 보게 해주었던 것처럼, 비정규직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을 넘어서, 그 속에서도 새로운 강점을 찾아내고 그러한 존재방식 자체를 긍정할 수 있게 될 때, 비정규직이나 프레카리아트에 대해 혁명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일차적인 것은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이 비정규직인 채, 비노동자가 비노동자인 채 살 수 있는 조건을 생각하고 만들어내는 것, 그런 조건을 요구하고 현실화하는 것일 게다. 어차피 자본가들에게 노동을 정규직화하는 것조차 기대할 수 없다면, 비정규직으로 사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 된다면, 비정규직이 비정규직이어도 살아갈 수 있는 최소조건을 확보해주어야 한다. 고용 여부에 의해 생존의 최소조건마저 흔들리고 와해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고용 여부와 무관하게 생존의 최소비용을 '기본소득'으로 제공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그 이상의 소득이 필요하거나, 아니면 '노동'하고 싶다면 더 찾아서 하면 된다. 그럴 수 없거나 최소수준의 생존이 보장된 조건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자 한다면, 기본소득으로 생존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돈이 되든 안 되든 간에. 이런 조건이 현재 비정규직이나 실업자인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주어져야 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모든 이들은 무산자화될 가능성 속에 있기 때문이고, 무산자의 잠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조건은 돈에 상관하지 않은 다양한 활동을 가능하게 할 것이고, 그런 활동은 지식이든 예술이든, 기술이든 놀이든, 혹은 사회운동이든 '봉사활동'이든 수많은 영역에서 새로운 창조적 성과들을 산출할 것이다. 이미 러셀이나 라파르그가 '게으름'이란 이름으로 지적했듯이, 자본에 의해 강제되는 노동의 영역 바깥에서, 새로운 창조적 성과를 산출해 온 역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하지 않을까? 노동해방이, 자본에 의해 강제되기에 어떤 창조성도 말살되고 마는 그런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면, 돈을 받고 하거나 돈을 바라고 하는 그런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면, 기본소득은 혁명 이전에 이미 노동해방의 과정을 슬그머니 시작하는 포텐셜을 갖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기본소득은 비정규직, 프레카리아트란 이름이 노동이 사라져가는 세계의 고통의 상징이 아니라, 노동으로 벗어난 세계를 예견하고 준비하며 그것을 긍정하게 하는 창조적 존재의 상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 장면.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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