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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의 '보라색'과 '시민'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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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의 '보라색'과 '시민' 유감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노동 없는 민주주의" 꿈꾸는 통합진보당

통합진보당이 새로운 당 이미지를 선보였다. 보라색 물결 세 개를 굽이치게 그어놓았다. 세 개의 물결은 노동자·농민·시민을 상징한단다. 아쉽게도 색깔도 의미도 어정쩡하고, 뭘 하는 정당인지 확 안 드러난다.

통합 전 노동자 중심성이 강했던 민주노동당의 당색은 밝은 주황색이었고, 전문직·자영업자의 중산층 중심성이 강했던 국민참여당의 당색은 노란색이었다. 주황색과 노란색이 합쳐져 보라색이 되었는데, 세계 어느 당을 둘러보아도 보라색을 자기 이미지 색으로 삼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노동자와 농민, 즉 민중의 색깔은 빨간색이다. 그래서 세계 각국의 진보정당은 빨간색을 자기 색으로 삼는다.

▲ 통합진보당의 로고와 심볼. ⓒ통합진보당 화면 캡처

정당인가, NGO인가

통합진보당은 보라색이 "역사적으론 평등과 인권의 상징이며 유럽·남미·한국 등의 인권단체들의 고유 색상"으로 소개하지만, 아전인수(我田引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권단체인 국제사면위원회(Amnasty International) 로고는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체와 촛불 그림을 쓴다. 역사적으로 평등의 색깔은 빨간색이다.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정당은 인권단체 같은 NGO가 아니다.

물결 세 개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물결은 깃발을 연상시키면서 역동적이고 힘찬 이미지를 준다. 그런데 그 세 개가 뜻하는 바는 노동자-농민-서민이 아니라, 노동자-농민-시민이란다. 국민 다수를 이루는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인 세상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노동자 농민을 내세우는 것은 당연한데, 갑자기 시민은 뭔가? 노동자 농민은 시민이 아니란 말인가? 반대로 통합진보당이 개혁하려고 하는 재벌-고위관료-부유층들은 시민이 아니란 말인가?

당 이미지가 어정쩡한 이유는 당이 내세우는 바가 어정쩡하기 때문이다. 특히 노동 문제와 관련해서 보면 더욱 그렇다. 며칠 전 통합진보당 지도부가 민주노총 지도부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는데, 노동개혁과 관련하여 정치적·정당적 비전을 제시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5대 핵심기조에도 못낀 노동 문제

통합진보당이 19대 총선공약 5대 핵심기조라고 내세운 문건과 그 해설을 살펴보면, 노동문제가 당 내에서 "중국집 단무지 신세"로 전락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노동문제가 핵심기조(△주권 확립, △공공성 강화, △정치 개혁, △평화통일 추구, △생태주의 지향)의 어느 하나에도 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12월 중순 나온 통합진보당의 기관지 <진보정치>를 보면 5대 핵심기조 설명이 나오는데, "노동 분야의 사회안전망 확충"에 '노동' 단어가 나온 게 노동이란 말을 언급한 전부다. 보수야당인 민주당도 자기 목표의 하나로 "노동가치 존중사회"를 내세우는 정국인데, 진보정당을 자처하는 통합진보당에서 노동문제는 내년 총선 공약의 방향에서조차 찬밥이다.

정치에서 노동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첫째, 일하는 사람들이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문제는 국민 다수의 이해관계와 직결된다. 임금을 올리고,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북돋우는 데 도움을 주는 정치는 전체 국민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자신들의 삶이 나아진 경험을 통해 의식이 향상된 노동자들은 민주주의와 사회진보의 충실한 버팀목 역할을 하게 된다.

▲ 지난 11일 통합진보당 출범식에서의 심상정, 이정희, 유시민 공동대표. ⓒ연합뉴스

'정당 정치' 부재의 원인은 '운동 정치'의 부재

둘째, 정당 정치만으로는 정치조차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운동 정치의 과잉, 정당 정치의 부재를 우려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정당 정치가 부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운동 정치가 과잉이라는 분석은 현실에 맞지 않다. 오히려 운동 정치가 부재하다 보니, 정당 정치조차 지리멸렬한 것이다. 1987년 민주화 항쟁이후 24년 동안 보수여당이 14년 권력을 쥐었고, 보수야당이 10년 권력을 쥐었다. 그 동안 빈부격차는 심해졌는데, 특히 김대중-노무현 보수야당 집권 10년을 거치면서 불가역적으로 구조화되었다.

한나라당이 소수당으로 전락하고 민주당과 진보당이 다수당이 되더라도,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등 사회운동이 활성화되지 않는다면, 2012년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진다하더라도 김대중-노무현 10년의 한계, 즉 정치적 민주화(시민적 민주주의)에 자족하면서 사회경제적 민주화(노동자 농민 등 민중적 민주주의)를 억제하거나 무시했던 문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다음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이 원내교섭단체가 될 만큼 의석을 챙긴다고 '노동 없는 민주주의'에서 '노동 있는 민주주의'로 저절로 이행하는 것은 아니다. '조직 노동'과의 의사소통·교류·협력이 문서와 수사(修辭)로만 존재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조직체계 정비와 정책 개발 그리고 연대사업을 소홀히 한다면, 통합진보당이 20석을 넘어 50석을 확보해도 '노동 있는 민주주의'는 요원할 것이다.

정책적으로 노동자 중심성을 거부하고 있는 통합진보당은 노동운동이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부문운동의 하나라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구조적으로 노동자가 애매모호한 '시민'으로 존재를 변이할 순 없다. 오히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노동과 자본의 모순은 더욱 격화되었고, '시민'은 해체되고 있으며, 시민과 중산층 심지어는 서민이라는 모호한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노동자들의 계급성이 자기 모습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에릭 홉스봄, "계급 정치와 노동운동은 계속 된다"

이런 현상을 분석하면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올해 초 출판된 <세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빠르게 산업화하는 '신흥 경제들'에서 제조업 노동이 퇴조할 가능성은 없다. 노동운동이 이미 존속하고 있는 구(舊)자본주의 부자 나라들의 경우, 노동운동이 대부분 공공 부문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기는 하지만, 신자유주의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 자체가 쇠퇴하는 기미는 없다. 마르크스가 예언했듯이, 경제활동인구의 대다수가 임금과 급여에 의존해 살아가고, 이들이 임금 지불자와 임금 수령자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서구의 (노동)운동들은 살아남았다. 따라서 양자 사이에 대립이 일어난다면, 이는 임금 수령자들에 의한 단체행동을 뜻한다. 그러므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힘을 실어주는지 여부를 떠나, 계급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더군다나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회계층들 사이의 빈부 격차는, 그 계층들을 '계급'이라고 부르든 말든,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다. 일이백년 전의 사회적 계급·계층들(social hierarchies)과는 매우 다를지라도, 계급 정치가 부분적일지는 모르지만 정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국민국가가 소멸의 길로 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노동운동은 계속된다. 국가와 여타 공공기관들은 인간적 측면에서 사회적 생산물을 사람들 사이에 분배하고, 시장이 만족시킬 수 없는 인간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역량을 가진 유일한 제도로 남아 있다. 정치는 사회 개선을 위한 투쟁의 필수불가결한 차원으로 남아왔으며, 지금도 역시 그렇다.

2012년 후에도 '노동 없는 민주주의' 계속할 것인가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새로운 전환을 맞고 있는 엄중한 시대에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당'을 자임하는 통합진보당이 "보라색"과 "시민"이라는 회색의 영역으로 숨어들면서 '2012년'이 요구하는 역사적 과제, 즉 '노동 정치'의 발흥(發興)을 외면하고 있다. 그 이유가 통합진보당의 의지 부족이든 능력 부족이든 간에 한국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우려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정권교체로 탄생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실패 원인은 다름 아닌 "노동 없는 민주주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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