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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정부, '평화의 약속'에 동참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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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정부, '평화의 약속'에 동참할 때

[창비주간논평] 위안부 문제 해결은 평화의 출발점

갑자기 날아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소식은 우리의 일상이 불현듯 뒤흔들릴 수 있다는 실존적 불확실성을 상기시킨다. 잠시나마 주가가 크게 출렁였고, 남북관계와 북미협상의 전망이 다시 불투명해졌으며, 이미 한참 후퇴한 통일의 전망은 또 어떻게 될지 가늠하기 어려워졌다. 먹고사는 데 바쁜지라 잠시 미루어두었던 세상 걱정과 나라의 앞길에 대한 우려가 다시금 저녁자리의 화제로 오른다. 물론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2차대전이 끝나고 또 냉전체제가 종식된 뒤 한참 시간이 흘렀음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 지역에 평화를 안착시키는 일은 왜 이렇게 지난한 것일까?

경제에 강한 동북아가 평화에는 취약하다는 안타까운 현실은 20년을 지속해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수요시위에서도 다시금 확인된다. 1992년 1월 8일부터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벌어지는 침묵시위는 어느새 1000회가 되었지만, 일본정부의 시계는 '1965년 한일협정'에서 멈춰서 있다. 한국 대통령이 일본의 책임있는 태도와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양자협의를 강력하게 제안했음에도 철저히 이를 외면하는 일본정부의 대응은 한국인들의 분노뿐 아니라 전세계적인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미 팔순이 넘은 위안부 할머니들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다시금 일본대사관 앞에 모여 평화비를 세우고 일본정부의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 14일 1000회 수요집회를 맞아 설치된 위안부 평화비를 끌어안은 위안부 피해자들. ⓒ프레시안(최형락)

일본군 위안부 문제, 전쟁의 폭력성을 함께 기억하는 것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엄청난 고통과 용기, 그리고 분투의 과정은 단지 반일감정이나 애국주의로는 다 표현될 수 없는 더 큰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독도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사과는 구분될 필요가 있다. 일본 식민지배의 청산이라는 맥락은 같다 하더라도 독도 문제가 영토와 주권에 관한 것이라면, 일본군 위안부 사건은 전쟁의 폭력성을 단죄하고 인간의 존엄성, 여성의 인권을 되살리고자 하는 인류 모두의 염원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의 한결같은 요구는 일본정부의 범죄 인정과 의회의 사과, 진상규명과 법적 배상, 역사교과서 기록과 위령탑·사료관의 건립, 책임자 처벌이다. 이러한 요구는 개인의 사적인 복리나 이익을 취하려는 차원을 이미 넘어서 있다. 혹여 경제적인 보상을 받는다 한들 할머니들의 여생을 생각한다면 제대로 된 보상이 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일본의 사과를 받기 전에는 억울해서 눈을 감을 수 없다'는 절규는 빼앗긴 삶에 대한 한(恨)의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물론 가해자의 사과를 통해 피해자가 겪은 과거의 고통을 위로받는 것은 정의를 회복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이들의 분투는 더 큰 뜻을 담고 있다. 전쟁의 폭력성과 군국주의 범죄 피해를 한국과 일본의 시민, 더 나아가 인류 공동체가 함께 기억하는 것은 곧 미래의 평화를 약속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요시위에는 한국시민뿐 아니라 할머니들의 외침에 공감하는 일본의 학생이나 시민도 찾아온다. 평화에 대한 공감대는 국경을 넘어 확산되어왔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일본의 인권단체·시민단체와 활발하게 연대활동을 해왔다. 일본의 우익 역사교과서가 가해의 역사를 삭제하는 것에 대응하여 한국과 일본의 여성학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대안적인 역사교과서 <여성의 눈으로 본 한일 근현대사>(2005)를 발간하기도 했다. 적어도 시민사회의 차원에서 본다면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공동노력은 상당기간 축적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평화의 가치에 무감한 동북아의 현실

그러나 다른 한편, 세계 최장 시위기록이라는 1000번의 수요시위를 통해서도 여전히 문제 해결이 요원한 현재의 상황은, 경제성장과 안보체제에는 목숨을 걸면서도 평화의 가치와 기반 확립에는 무성의하고 무능한 동북아의 답답한 현실을 폭로하는 것이기도 한다. 한국정부 또한 오랫동안 이 문제에 미온적이고 소극적인 대응을 해왔다. 일본이 정부 차원의 배상을 거부하자 우리 정부가 군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기초적인 생활지원을 제공하는 법을 제정한 바 있지만, 이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에 나서지는 않았다.

지난 8월에는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청구권과 관련해 구체적 해결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피해자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헌행위"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왔다. 정부가 어떤 부당한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음(부작위)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이 보기 드문 결정은 '국민을 보호하는' 정부의 책임을 준엄하게 상기시킨다. 일본정부에 대한 공개적인 요구와 더불어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물밑에서의 보다 정교한 외교적 접촉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FTA 체결이나 안보 문제뿐 아니라 인권과 평화 문제도 중요한 외교 현안으로 삼아야 하며, 구체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세부 단계를 마련하는데 진정성있는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

이 모든 논란의 중심에 있는 것은 가해국인 일본정부다. 사과 촉구를 외면한 채 평화비의 철거를 요구하는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의 대응은 위안부 할머니들과 그에 공감하는 한일 양국의 시민들이 염원해온 '평화의 약속'을 송두리째 저버리는 것이다. 한국보다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이 강한 일본이 46년이나 묵은 한일협정을 내세워 형식적인 국제법 논리에 안주하는 것은 결국 강자의 논리일 뿐이다. 어느 나라나 국익을 수호하고 국가 자존심을 지키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역사의 가장 어두운 그늘에서 끔찍한 고통을 겪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거의 반세기 동안 생활고에 시달리고 침묵을 강요당했던 군위안부 할머니들에게조차 똑같은 강자의 논리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국경을 넘는 '평화의 약속'에 동참하라

일본사회는 지금 위기에 직면해 있다. 버블 붕괴와 장기적인 경제침체, 동일본 지진 피해로 경제대국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으며, 새로운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정치 리더십의 부재가 도마에 올라 있다. 일본사회의 새로운 희망 찾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이 시점에서 보편적인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대승적으로 수용하는 정치적 리더십의 결단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인가?

유대계 독일인으로서 2차대전을 경험했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정치행위의 본질이 '약속하기'라고 통찰했다. 이때 약속이란 영웅적인 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서로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킴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공존과 제휴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며, 현실정치에서 약속하기는 입법활동으로 나타난다(서유경 '약속의 정치학: 한나 아렌트의 로마커넥션과 그 함의', <정치사상연구> 17집 2호, 2011). 지난 20년 동안 참혹한 피해를 이겨내고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외쳐온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 그들을 지원하는 한국의 사회운동과 시민들, 그리고 인권·평화를 옹호하는 일본과 국제사회의 NGO와 많은 단체들이 이미 국경을 넘어 서로간의 약속을 만들고 또 확산시켜왔다. 이제 한국과 일본 정부가 평화의 약속에 동참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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