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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학생인권조례를 원안대로 심의하라"

[기고] 우리 모두 역사적 순간에 서 있다

바로 어제, 서울에서 200여일 가까이 상경농성을 진행하던 현대차 사내하청 성희롱 피해자가 1년 반 만에 원직 복직되고 가해자는 해고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살기 위해' 차별과 피해를 이야기해야 순간과, 차별과 폭력의 경험을 호소할 때 그 어느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절망감 때문에 다시 '살기 위해' 침묵해야 하는 순간을 오가는, 감히 짐작하기도 어려운 200여일의 농성. 그 시간은 얼마나 눈물겹고 지난한 것이었을지, 또 한편으로 얼마나 열정 가득한 것이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여성가족부 앞에서의 긴 농성을 마무리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오후, 또 다른 곳에서는 새로운 점거농성이 시작되었다.

12월 14일 '학생인권조례 성소수자 공동행동(이하 성소수자 공동행동)'은 "성소수자와 지지자, 인권활동가들은 처음으로 시의회, 입법기관 앞에 섰습니다"로 시작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서울시의회 의원회관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성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이슈를 가지고 '최초로' 시도하는 점거농성. 학생인권조례 심의를 앞 둔 현재, 그 역사적인 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수많은 성소수자들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성소수자는 차별당하고 있다. ⓒ뉴시스

존재하는 몸, 보이는 몸으로서 말하기

그러나 살아남고자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든 우리 자신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기억한다는 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을 우리의 존재와 육체에 익숙해지지 않는 체제 안에 존재하는 몸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벨 훅스

남들이 당신을 설명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또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를 남들이 말하게 하지 말라. - 마사 킨더


성소수자 인권운동 진영에서 오랫동안 내걸었던 슬로건 중 하나는 "성소수자는 어디에나 있습니다"이다. '모르는 것'과 '없는 것'을 등치시켜온 오랜 차별의 역사에서 희미하게나마 성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들이 있었다면, 그건 언제나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어려운 성소수자들이 '우리는 여기에 있었고,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한 명 한 명 용기 내어 말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상/비정상이라는 이분법의 규범대로 설명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때로는 분투하면서, 때로는 자기혐오와 혼란을 지나면서도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성소수자들의 시의회 점거농성은 더 이상 한국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는 몸'으로써 기록될 수는 없다는 결연하고도 절박한 집단의 목소리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상기하는 것 이외에, 성소수자들의 현실에 대한 '무엇'을 보고, 기억하고, 공유하고 있는 것일까.

9만 여명에 가까운 서울시민들의 염원으로 만들어진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안의 통과 여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불투명하다. 성적지향을 비롯해 임신 및 출산이 차별금지사유에 포함된다면 동성애가 확산되고 성윤리의 '위기'가 도래할 것이라 주장하는 <학생인권조례 저지 범국민연대>, 그리고 그들이 서울시의회 의원들을 대상으로 펼치고 있는 전방위적인 로비와 압박, 반동성애 보수 세력의 집결을 부담스러워하며 구체적인 차별금지사유를 삭제한 채 '모든 차별'이라는 실효성 없는 문구로 주민발의안을 수정할 움직임을 보이는 서울시의회, 그리고 정당한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기본권을 주장하는 성소수자들의 목소리조차 '과도한 권리 요구'라고 받아들이는 한국 사회의 인권 현실…. 이 모든 것이 학생인권조례가 놓여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도 성소수자들은 무엇을 해 왔는가를 떠올려본다. '현실은 잘 알고 있고 공감하지만, 성소수자 학생들이 겪는 차별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공감대가 낮다'는 우려에 성소수자공동행동의 차별사례팀과 많은 개인들은 밤낮을 지새우며 차별사례집을 만들어냈다. 성소수자 청소년들이 모여, 인권활동가들이 모여 사례를 모으고 알리기 위한 보고대회들을 열기도 했다. (국가기관이 다양한 방법으로 소수자 인권에 대한 인식과 차별사례를 연구하고 정책 마련에 활용하는 스웨덴과는 너무나 다르다) 차별을 당하는 성소수자 학생들이 마주해 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그럼에도 하릴없이 되돌아오는 메아리는 '현실은 충분히 잘 알고 있고 공감하지만…'이다.

주민발의안을 심의하는 16일 서울시의회 교육위원회를 하루 앞 둔 오늘.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쉽게 흔들 수 없는 대중적 지지 기반이라는 걸 만들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속절없는 '자기 탓'을 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수많은 편견과 차별, 폭력에 노출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며 성소수자/청소년들이 자신의 존재를 걸고 말해왔던 결과가 '역할에 대한 책임'으로 남는다면, 이건 분명 공정하지 못하다. 너무나, 불공평하다.

간절한 마음으로, 묻고 싶다. 한국 사회는 성소수자들의 목소리에 충분히 귀 기울여왔는지, 그 목소리의 의미를 알기 위해 잠시라도 침묵해 본 적이 있는지.

위기, '결정의 시간'

농성에 참여하는 많은 성소수자 및 지지자들은 학생인권조례가 성적 지향을 비롯한 다양한 차별금지 사유들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주민발의안 그대로 제정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그리고 차별사유가 명시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될 때까지 의원회관 농성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에 성소수자 청소년이 도대체 얼마나 많기에 이들의 인권을 보장하라는 거냐' 같은 '말씀'들이 존재하지만, 남들과 다름없이 이 사회의 구성원이고 싶다는 열망을 품은 무수한 십대 성소수자들이 존재한다. '청소년기에 잠시 겪고 마는 한 때의 혼란스러운 감정 아니냐' 같은 '말씀'이 만연하지만, 이성애만 존재해야 하며 그것만이 정상이라는 규범을 거스르는 자기 존재를 철저히 고통스럽게 느끼는 십대 성소수자들이 있다. 이들이 좀 덜 아플 수 있는, 더 나은 학교 꿈꾼다. 있는 그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이 소박한 열망들이 정말 그렇게 위험한가. 정말로 지금 당장은 때가 아닌, '시기상조'의 문제인가.

지금도 의원회관의 차가운 바닥에 모여 현재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이리저리 뛰고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우리가 '어떤'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직면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인생도 변화 없이는 진보할 수 없고, 변화는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의 혼란을 수반한다. 희랍 사람들은 '위기(crisis)'라는 말을 재앙이나 파멸의 의미 없이, '결정할 시간'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 주디스 베넷

"우리가 편견에 맞설 때에야 비로소 폭력은 멈출 것입니다. 우리가 목소리를 낼 때에야 비로소 낙인과 차별은 끝날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 모두가 각자의 소임을 해야 합니다. 집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 반기문 UN 사무총장,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한 처벌 철폐" 행사


많은 성소수자들이 성소수자 운동 최초의 점거운동을 통해 '보이고자' 노력한 만큼, 기억되고 사라지지 않기 위해 용기를 낸 만큼, 인권을 지키기 위한 변화를 열망한 바로 그 만큼- '위기'를 '결정할 시간'으로 전환하기 위한 노력을, 차별과 폭력을 멈추게 하기 위한 소임의 실천을, 그 누군가는 보여주어야 할 순간이다.

우리 모두, 역사적 순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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