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프로그램이 새로운 시즌 제작에까지 들어갔다. 전적으로 시청자의 힘이다. 24시간 내내 방송을 장악한 아이돌 음악에 질린 적잖은 시청자들이 소박한 사람들이 만드는 밴드 음악에 눈을 떴다. '디시인사이드'에는 이 방송에 열광한 이들의 자발적 움직임으로 '톱 밴드 갤러리'가 생겼고, 이 갤러(갤러리에 활동하는 누리꾼)들은 톱 밴드 페스티벌까지 추진했다.
이 열혈 시청자들의 힘은 한국대중음악상 수상에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게이트 플라워즈가 단독 공연을 열게 만들었고, 이 방송에 출연한 적잖은 밴드들이 대형 레이블과 계약을 추진토록 했으며, 결승전 특별 심사위원으로 등장한 배철수 씨의 말대로 여전히 '긴머리와 고성'으로 대변되던 옛 록 음악만이 가끔 나오던(지금도 나오고 있는) 공중파 프로그램에 "21세기 록 음악"이 울리도록 했다.
독특하게 어수룩한 서바이벌 프로그램 <톱 밴드>를 만든 김광필 총괄프로듀서(EP)를 지난 20일 오후, KBS 사옥에서 만났다. 김 EP는 1985년 KBS에 입사해 <KBS 스페셜>, <환경 스페셜> 등 자연 다큐멘터리를 주로 찍은 고참급 프로듀서다. <영원한 동백아가씨, 이미자>, <중국의 록스타 최건> 등의 음악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으며, 지난 2009년부터는 일산의 직장인밴드에서 드럼을 치는 음악 애호가이기도 하다. 이 경험이 <톱 밴드>로까지 이어진 셈이다.
김 EP는 <톱 밴드> 제작 당시 아쉬웠던 점과 시청자들에 대한 고마움을 마치 방송처럼 덤덤히 얘기했다. 시즌1에 대한 아쉬움과 새 시즌에 대한 각오, 구상 중인 새로운 포맷 아이디어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아래는 김 EP와의 인터뷰 전문.
▲"시청자들 수준이 높다더라." ⓒ프레시안(최형락) |
"당초 목표는 일회용 밴드대결"
프레시안 : 이 프로그램을 처음 구상한 건 언제인가?
김광필 : 작년 말에 연말 프로그램으로 밴드대회를 일회성으로 해볼까 싶었다. 실제로 타 방송국이 라디오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런데 단순히 일회성으로 그치면 의미가 없으리라고 봤다. 결국 화제성 때문에 서바이벌 포맷을 선택했다. 개인적으로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안 좋아하는데, 이목을 집중시키는 장치로는 좋더라.
프레시안 : 왜 하필 밴드음악이었나?
김광필 : 밴드음악이 지나치게 묻혀있는 게 현실이다. 가끔 텔레비전에 밴드가 소개된다고 해봤자, 가십성 화젯거리 이상은 아니잖나. 그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음악을 하는데 말이다. 이만큼 방송이 다루기 좋은 소재도 없다 싶었다.
프레시안 : 끝나가는 마당인데, 아쉬운 점 없나?
김광필 : 사실 '이거 꼭 시작했어야 했나'하는 후회도 많이 했다. 방송 덩치는 너무 크고, 사람들을 다루기는 너무 힘들었다. 보컬만 나오는 다른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야 MR(Music Recorded, 녹음된 반주 음악) 틀어놓고 노래만 부르게 하면 되는데, 우리는 무대를 바꿀 때마다 세팅을 새로 해야 하고, (다른 서바이벌 프로그램 보다) 네 배 이상의 사람을 관리해야 했다. 도저히 끝이 안 보이더라.
결국 초반 준비가 미흡했던 게 원인이다. 처음 적정 수로 참여자를 줄였어야 했는데 실패했다. 1차 예선에만 661팀이나 왔는데, 제대로 못 줄이다보니 통과자가 200팀이나 돼서 예선을 다시 해야 했다. 이 때문에 초반이 늘어졌다. 이 점이 두고두고 발목을 잡았다. 후반부에 스토리를 만들고 각 캐릭터를 살리는 작업을 못했다.
또 한 가지 있는데, 방영시간이 너무 짧았다. 처음에 60분으로 시작했다 10분 연장해서 70분이 됐는데, 해보니까 밴드 음악은 이 시간 안에 담기에 한계가 있더라. 나오는 인원이 많잖나. 그러다보니 시청자들이 누가 누군지 눈에 익히다가 끝나버렸던 것 같다. 이런 점도 저조한 시청률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제작비에 비해 시청률이 안 나왔다.
프레시안 : 제작진은 어느 정도 규모로 구성했나?
김광필 : 피디 네 명에 작가 열 명. 작가 수는 충분했지만 피디 수에서 부족함을 느꼈다.
프레시안 : 제작비가 얼마 들었나?
김광필 : 회당 9000만 원 정도, 다른 회사의 서바이벌 프로그램보단 적고, KBS 프로그램 중에선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시청률이 낮았음에도 광고판매는 목표치의 70%까지 이뤘다는 점이다. 최악은 아니었다.
프레시안 : 70%면 괜찮은 성적인가?
김광필 : 아마 타사 경쟁 프로그램은 거의 100% 팔았을 것이다. 어쨌든 광고주들이 밴드음악의 가능성을 봤다는 점에선 고무적이다. 어제 모 포털사이트 사람들과 만났는데, 우리 동영상에 달린 댓글을 보면 시청자들 수준이 굉장히 높다고 놀라더라. 구매력 있는, 양질의 시청자들이 <톱 밴드>를 본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OOO 밴드에 애정 가더라"
프레시안 : 초반에 참여자격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처음에는 직장인 밴드 서바이벌 포맷이었는데 본선은 이미 자작곡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인 인디 밴드들이 올랐다.
김광필 : 사실 내가 제작 초기에는 인디 밴드의 성격이나 숫자, 실력에 대해 잘 몰랐다. 그래서 특히 직장인 밴드를 중심으로 뽑으려 했었다. 그런데 막상 지원한 팀의 면면을 보니 인디 밴드가 많더라. 현실적으로 그들 중 어디까지를 아마추어로 할지에 대해 난감하기도 했다. 밴드 활동하는 상당수가 아르바이트나 직장생활을 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래서 가능하면 많은 팀이 참여하도록 성격을 바꿨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논란을 감수하고 인디 밴드들을 출연토록 한 게 좋은 선택이었다.
프레시안 : 제작 과정에서 특히 애정을 가진 밴드가 있나?
김광필 : 왜 없겠나. 초반에는 엑시즈를 좋아했다. 피디 입장에서 잘 생겼고, 젊은 세대가 좋아할 만한 음악을 했다. '이 친구들이 실력을 잘 발휘하면 프로그램에 도움이 되겠다' 싶더라. 그 다음에는 톡식이 눈에 들어왔다. 2인조로 단연 특색 있었고 음악도 새로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록'을 하는 게이트 플라워즈가 좋더라.
프레시안 : 혹시 편집에 EP의 애정이 드러나나?
김광필 : 맞다. (웃음) 가장 안타까운 팀은 브로큰 발렌타인이다. <포커페이스>를 연주하고 떨어졌는데, 다들 그 때 연주가 가장 좋았다고 하더라. 와이프는 시크를 응원했다. 떨어진 날 굉장히 서운해했다.
프레시안 : 밴드들에게 미안한 점은 없나?
김광필 : 정말 미안한 게, 자작곡을 선보이는 시기를 너무 늦췄다. 이들이 용기를 내서 <톱 밴드>에 나온 이유가 자기 노래를 알리기 위함이었는데, 남의 노래만 부르게 해서 가슴이 아프다. 앞으로 두 번의 스페셜이 남았는데(인터뷰는 22일 방송 이전에 이뤄졌다), 가능하면 그들이 무대에서 선보이지 못한 자작곡을 모두 선보이게 하고 싶다.
▲열혈 지지층을 낳았던 <톱 밴드>는 내년에 재개된다. ⓒKBS 제공 |
"시즌2, 록 페스티벌과 연계 추진"
프레시안 : 시즌2, 정말 하나?
김광필 : 백퍼센트다. 회사에서 결정됐다. 내년 상반기에 선보일 예정이다.
프레시안 : 이른 질문이긴 하지만, 특별히 구상해둔 부분이 있나?
김광필 : 아직 확언할 단계는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고 들어 달라. 여름 록 페스티벌을 마지막 무대로 잡고 싶다. 시간을 역산하면 아마 4월쯤 시작하지 않을까 싶다.
프레시안 : 실제 그렇게 추진한다면 준비가 더 많아지겠다. 페스티벌 주최 측과도 미리 얘기를 맞춰야 하지 않나.
김광필 : 지산이나 펜타 측과 연계한다면 그렇게 될 테고, 아예 새롭게 지자체 중에서 밴드음악을 지역 산업으로 만들어보려는 곳이 있다면 같이 갈 수도 있다. 아직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
프레시안 : 소위 말하는 '악마의 편집'을 시도하나? 또 바꾸는 부분이 있나?
김광필 : 편집에 좀 더 신경을 쓰는 건 당연하다. 또 하나 개인적 바람이 있는데, 자격 기준을 완전히 허물고 싶다. 아예 프로든 아마든 상관없이 모두 나오도록 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프레시안 : 넥스트와 직장인 밴드가 같이 나오도록 한다는 건가?
김광필 : 그렇다. 마이너와 메이저, 학생과 직장인 등 카테고리별로 경쟁시키고, 나중에 어느 순간 이들이 만나게 하는 방식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한다. 다만 실현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좀 낮지 않을까도 싶다.
"시즌2, 방송시간 이동 확실"
프레시안 : 시즌1을 돌이켜보면, 특정 장르의 밴드음악은 소개되지 않아서 아쉽다는 의견도 있다. 예를 들면 헤비메탈 밴드는 본선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김광필 : 사실 우리도 시끄러운 메탈음악은 좀 내보내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무래도 주말 밤 10시에 안방에서 시청자들이 보는 프로그램이니 말이다. 그런데 누가 이런 얘기를 하더라. "<톱 밴드> 자신감 가져라. 그 시간에 데스메탈이라고 못 들려줄 이유가 어디 있느냐. 자작곡도 과감히 집어넣어라"고 말이다. 시즌2는 우리도 좀 더 과감하게 진행할 것 같다. 가능하면 보다 더 넓은 스펙트럼을 지향하려 한다.
프레시안 : 좋은 의도가 아무리 있다 한들, 어찌됐던 오락 프로그램 포맷인 서바이벌 구도를 끌어들인 <톱 밴드>가 시청률을 완전히 무시할 순 없을 것으로 보인다. 방송시간대도 저조한 시청률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데, 옮기는 방안을 검토 중인가?
김광필 : 분명한 것은 시즌2는 이 시간대(토요일 밤 10시)에 안 들어간다. 실패한 시간대라서 다시 들어갈 이유가 없다. 더 늦은 밤인 11시가 괜찮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경연해보니 심야에 음악이 잘 되더라. 사람들도 밤에 음악 듣는 걸 그리 싫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프레시안 : 토너먼트제는 계속 유지되나? 이에 대한 문제제기도 적잖았다.
김광필 : 역시 검토 대상이다. 8강부터는 매주 두 팀씩 떨어뜨리는 방식 등을 적용할 수 있다. 다만 한계가 분명히 있는데, 여러 팀을 한꺼번에 올리기가 쉽지 않다. MR을 트는 방송에 비해 무대 세팅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새로 데려오고픈 심사위원이 있나?
김광필 : 마지막 경연에 특별 출연하신 배철수 씨를 모두들 좋아하더라. 그런 분이 오시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시즌1보다 좀 더 대중성 있는 분을 모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시즌1 때도 여러 분에게 참여를 요청했는데, 고사하신 분이 많았다. 그러나 시즌1 덕분에 이 프로그램에 나오더라도 이미지가 깎이지 않는다는 점은 확실해졌으니 (시즌2에 다시 출연을 요청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
▲"시즌2는 이 시간대에는 안 들어간다." ⓒ프레시안(최형락) |
전문가 평가비중 강화할 듯
프레시안 : 평가방식은 그대로 가나? 대중음악 평론진과 연계하는 방안을 혹시 고려 중인가?
김광필 : 전문가 그룹의 지지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의 평가방식(심사위원단 5, 시청자 투표 5)에 대한 반성이긴 한데, 아직은 일반 대중에게 평가를 일임하는 건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대중음악에 대해 상당히 전문적인 내용을 소개하는 파워 블로거들은 게이트 플라워즈를 굉장히 좋게 평가했다. 반면 시청자들의 반응은 호오가 확연히 갈렸다.
프레시안 : 게이트 플라워즈의 경우, 이미 한국대중음악상 수상 등으로 음악 애호가들에게 널리 알려진 점이 그런 결과를 낳은 것 같다.
김광필 : 나는 그렇진 않다고 본다. 자작곡 자체가 워낙 좋았다. 사실 게이트 플라워즈가 사람들이 <톱 밴드>를 사랑하도록 만드는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자작곡을 부르면 백퍼센트 매력을 발휘하는 팀이다. 그런데 이들이 자작곡 무대를 딱 한번만 가지게 돼서 안타깝다.
프레시안 : 간접광고(PPL)를 굉장히 강하게 했다. 공영방송의 교양국이 만든 프로그램이 그래도 되나?
김광필 : 결국 시청률이 문제였다. PPL 수위는 제작진과 협찬주의 줄다리기로 결정된다. 시청률 때문에 <톱 밴드> 제작진이 밀렸다. 협찬주가 "시청률이 안 나온다"고 하면 우리는 "알았습니다. 노력해보죠"하고 협찬주가 요구하는 걸 들어주게 된다. 제작진 입장에서야 당연히 가능하면 수위를 낮추려고 한다.
프레시안 : KBS 내 반응은 어땠나? 비인기종목을 황금시간대에 내보낸 꼴이 됐는데?
김광필 : 반반이다. 경쟁사 서바이벌이 시청률 10%를 가져가는데, KBS가 유일하게 시도한 서바이벌 프로그램 성적이 안 좋았으니 여러 지적이 많았다. 그런 지적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반면 "KBS는 이런 프로그램 하나 정도 갖고 있어도 된다", "이런 프로그램이야말로 시청률에서 자유롭게 시도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많다. 어떤 간부는 나한테 "어디 가서 절대로 시청률 얘기 하지 마라. 그거 때문에 기죽을 필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KBS 내부뿐만 아니라 의외로 (톱 밴드를 취재하는) 기자들 중에도 '탑빠돌이', '탑빠순이'가 생겼다. 대체로 거의 모든 언론사가 호의적이다. '좀 더 잘하지' 하는 아쉬움을 적극적으로 얘기하는 기자도 많다. 일종의 자부심이다.
▲""앞으로는 여러분의 몫." ⓒKBS 제공 |
"이제는 시청자들 몫"
프레시안 : 밴드 음악에 익숙지 않은 이들은 마치 이 프로그램이 '밴드 음악이 진짜, 아이돌 음악은 가짜'라는 등식화를 강요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김광필 : 물론 '슈스케', '위탄'이 더 낫다는 사람은 당연히 있다. 그러나 어찌됐든 오랜 시간 동안 볼 수 없었던 록 밴드가 여전히 한국에 있다는 것 자체에 놀라움과 반가움을 표한 사람도 있다.
내 생각에 아이돌 음악을 듣던 이들이 록 음악에 익숙해지려면 학습 과정이 필요하다. 일단 익숙해져야 좋아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비록 그런 비판이 있다손 치더라도 밴드 음악을 들려줘야 한다. 시청자들 반응을 보니 어떤 집은 애가 보는 걸 부모도 같이 보다 응원하게 됐고, 어떤 집은 부모가 보던 프로그램에 애도 빠졌다고 하더라.
프레시안 : <톱 밴드>가 언제부터인가 '밴드음악을 살리자'는 소명의식을 강하게 드러냈다. 진행자는 "대한민국 밴드 음악의 힘"과 같은 수사를 사용하고, 심사위원들은 "해외로 수출해야 할 음악"이라고 한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김광필 : 처음에는 단순히 우리 주위에 음악을 잘 하는 밴드를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람들이 제작진에 거는 기대가 굉장히 커졌다. '대중음악 지형을 바꾸는 일환으로 <톱 밴드>를 본다'는 생각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다들 우리나라의 음악 편식이 너무 심한데, <톱 밴드>를 보니 이 현상을 바꿀 수 있는 음악인들이 많다는 얘길 하더라. 결국 시청자들로 인해 사명감이 생겨버렸다.
프레시안 : 그 시청자들에게는 무슨 말을 하고 싶나?
김광필 : 이제 방송이 끝나면 우리가 할 일은 끝난다. 앞으로는 여러분들의 몫이다. 여러분이 공연장을 찾아주시고, 이 사람들의 음반을 사주시면 지형이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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