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주장을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선거법 제232조 제1항 제2호는 검찰의 주장대로라면 비정상성, 불평등성, 과도한 추급성의 문제점을 안고 있어서 선거공정성유지, 금권선거방지와는 거리가 먼 규정이며, 선거후 사회적 안정과 자유로운 교류와 선택을 방해하는 잘못된 규범이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 규정이 검찰의 입장대로 대가지급에 관한 사접합의 없이 이루어진 증여행위도 처벌하는 규정이라면 위헌적이라고 본다.
둘째로, 이 사건의 실체는 선거과정을 통해 불편해진 관계자들의 개인적 가혹함을 처리하고 조정하려는 일종의 회복적 시도이다. 곽교육감은 사회적 대의를 위하여 자진사퇴한 박명기 교수에 대하여 강한 윤리적 보증인 지위를 갖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증여행위는 본질적으로 초과의무적 행동보다는 도덕적으로 요구되는 행위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한국정당정치에 확립된 관행들과도 터무니없이 모순되고 있는 법률규정을 적용하면 이는 평등원칙에 반하고, 승리자가 사퇴자나 후보자의 부채를 대신 정리해주고 공직까지 제안하는 외국의 관행에 비추어볼 때 곽 교육감의 행위를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행위로 규정해야 한다. 따라서 곽 교육감의 증여행위는 공직선거법의 비용처리제도의 불비점을 보완하고, 사회적 대의를 위해 희생한 동료에 대한 긴급히 구제하는 행위로서 비난 가능성이 없다
Ⅰ. 이야기 만들기
서울시 교육에 혁신의 바람을 몰고온 곽노현 교육감과 그의 절친한 친구 강경선, 그리고 교육운동가 박명기에 대해서 예의 정치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저명한 칼럼니스트들은 2억 수수건에 대해 이미 다양한 견해를 표명하였다. 상당수는 이 문제에 대해 단호하게 쐐기를 박으며 사퇴를 거론하고, 특히 진보의 미래에 대해 노심초사한다. 검찰은 곽 교육감을 '사립짝'에 담아 여론의 인증샷을 찍느라 대중의 분노를 촉발하느라 분주하다. 9월 16일 소환조사 후 서울구치소로 가는 곽 교육감의 행로는 중세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사립짝을 향한 대중의 분노는 권력자의 기획을 덮어주고 세상 사람들은 이 유장한 장면에 깊이 연루됨으로서 공동처형자가 되어간다.
진보의 미래를 염려하는 지식인들은 선거구원파다. 그들은 잠재적인 정치계급의 일원으로서 그 목표에 맞추어 서둘러 사태에 개입한다. 정치계급의 유일한 실천무대는 선거판이다. 눈앞에 팟죽(창세기 25장 29-34절)을 얻기 위해 근본적 정치를 국민대표적으로 방기한다. 선거물신주의와 선거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경향이 요즘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것 같으니 시대의 후진을 느낀다. 중요한 선거에 이겨야 한다고 본다. 모든 선거는 중요하다. 한편 선거에 이겨도 뜻밖에 소득이 없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철저하게 반성해야 하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정치적이어야 한다. 근본적 정치성은 '깊이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이지, 빨리 달리는 것이 아니다. 정치를 나물 데치는 것보다 쉽게 생각한다면 말이 되는가! 신선표 바둑정치가 정치판을 넘실대고 있다. 이 정치의 부정 사태는 사실은 현재 대통령을 만들어 내었다. 정치의 부정은 좌든 우든 똑같이 위험한 것이다. 보다 많은 그리고 심층적인 민주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지 않는 정치적 기획은 환멸을 심화시킬 뿐이다.
혼란스러운 때에는 의미가 분별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미덕이다. 언필칭 무죄추정의 논리는 법정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 완곡함은 도덕적 사유의 공식이다. 물론 도덕을 가지고 진보를 옥죄서는 안 된다며 과감한 돌파론도 있다. 이것도 안 될 말이다. 동일한 사태에 대한 평가를 좌우도식에 따라 간단히 달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능한 한 최상으로 도덕적으로 행위해야 한다. 법규범이든 무엇이든 규범의 준수는 도덕의 기본이고 신뢰의 바탕이다. 페어-플레이 관점에서도 준법은 도덕적이다. 그러나 행위가 외견상 실정법에 저촉되었더라도 실질적으로 법의 정신에 부합한 것일 때에는 어찌 해야 하는지도 감안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도덕이다. 어떤 도덕인지가 문제이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정치적이고자 할 때, 그리고 근본적으로 도덕적이고자 할 때 2억 수수 사건도 다르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김행수, 박동천, 박재동 등이 무분별한 비판기류에 그나마 제동을 걸었다. 나아가 <한겨레>에 실린 홍세화 선생의 글은 실제-긴급부조 이야기-에 근접했다고 생각한다. 주인공들의 인격을 드러내고 화자의 마음을 싣는 글로서 치유의 힘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 글이 사건의 실체에 대한 나름의 확신과 믿음을 담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서는 다소 위험성을 안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나는 여기에서 오히려 두 사람의 삶을 더 많이 말함으로써 그 위험을 완화시켜볼 셈이다.
나는 법철학을 전공하며, 주로 악법과 정치재판을 연구하며, 인류학적인 영역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십대에 방황할 때 강경선과 곽노현 선생으로부터 깊은 학문적인 격려와 자극을 받았다. 그 분들의 사고와 행위가 내게 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분들과 나의 공통점은 민주주의법학연구회, 기독교, 법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곽노현 교육감은 2010년 교육감선거에 앞서 연구회를 탈퇴하였고, 기독교에 대한 나의 태도는 전과 같지 않다는 점을 밝힌다. 그럼에도 앞의 세 가지는 우리들의 삶에 뚜렷한 흐름과 긴 공명을 만들어 내었다.
민주주의법학연구회는 진보적인 법학을 형성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1989년 당시 일군의 대학원생과 소장학자들이 창립한 단체이다. 그때 두 분은 좌장에 해당하였다. 이 연구단체에 나는 지각생으로 가입하였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창립 과정의 일화나 인상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단체에서 수많은 선배와 동료로부터 많은 인간적 지적 깨우침을 얻었다. 세상에 대한 참여자로서 강경선과 관노현 두 사람의 태도에는 남다른 독특함이 있었다. 독특하다는 말은 그리스어 아토포스(átopos/ 그 최상급은 átopotatos)이다. 그들은 이 그리스 말을 매우 좋아 했는데, 아테네인들이 소크라테스를 이렇게 불렀다. 그것이 언제나 긍정적인 의미만을 가진 것같지는 않다. 경이롭고, 엉뚱하고(골때리고?), 유토피아적이라는 말로 옮길 수 있다. 아무래도 그것은 꿈을 가진 자의 표징이다. 끝없이 대화하고, 함께 해결하려 하고, 끈덕지게 설득하고, 다소간 예언자처럼 행동하는 등등. 그들의 행동은 신앙과 기도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들의 삶은 모험의 강을 거쳐 해방의 바다에 이른다. 그들은 진정으로 엠엘주의자들이(었)다. 메시아적 해방(Messianic Liberation)을 말한다. 장시기 선생이 <프레시안>에 쓴 글은 새로운 통찰을 일깨워서 좋지만 이들을 탈근대인으로 규정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들은 너무도 근원지향적이고, 참으로 고색창연하기 때문이다.
강경선과 곽노현은 한국의 현실에 깊이 연루되어 법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학문적 장르로서 좁은 의미의 법철학에 한 정되지 않는다. 장르 구속성은 그들에게는 소용없다. 세상에 억압이 존재하는 한에서 장르는 연구자의 발견적 편의에 어울리는 것이지 고통받는 세상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현재까지 하나의 법철학 체계를 수립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이미 많은 동료와 후학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학문적 단촐함에도 불구하고 발전중이라고 본다.
나는 온당하게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까지는 상황의 예시와 행위의 피상적 징표를 엮어 '후보매수사건'으로 규정한 고발자의 스토리가 주를 이루었다. 이 상황의 내면을 그려가는 참여자로서 스토리를 만들어 보려고 한다. 나는 일종의 심층놀이(deep play)에 가담하려고 한다.(각주1) 이것은 위험한 시도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언제나 실체, 즉 진실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두 분이 같은 상황에 다시 놓이게 되더라도, 이렇게 뜨거운 사회적 눈총이나 유죄판결의 위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꺼이 동료를 돕자고 동일한 결정을 내릴 것임을 확신함으로써 심층놀이에 가담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이 일을 통해 법의 사명을 재확인하고 또 다른 법의 발전을 성취할 수도 있다. 그들의 행동이 법에 위반될 수도 있다. 검찰은 '악질'이라고 선포하였다. 재판은 판사가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법의 관점이다. 그들의 행동은 법의 영역 너머까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의미 차원을 적절하게 고려해야 한다. 법의 검찰은 그 행위의 의미를 제거하거나 축소함으로서 그들의 실천을 범죄의 지평으로 끌어내리고자 한다. 나는 세상과 검찰의 집요함으로 인하여 강경선, 곽노현, 박명기 세 분이 진주씨앗을 머금은 조개처럼 진실의 싹을 잠시라도 망각하지 않기를 열망한다. 무죄의 증거는 그대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궁극의 최상선은 저 너머 신의 몫이고, 선의 기본적 실천은 인간의 몫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제3자로서 엄밀하게 썼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렇게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적 쟁점 앞에서 단 한번도 글을 그런 식으로 쓰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이 글을 시대와 법정에 하나의 추가적인 변론서로서 제출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검찰의 고발자 스토리 대신에 행위자들의 스토리 만들기(story-making)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말 그대로 법정 공방은 어찌될지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이 글은 내 개인적으로 중요하다. 20여년을 알아온 '민주법학'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기도 하고,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적 기록으로도 의미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Ⅱ 잘 분별하는 자가 제대로 판단한다
검찰이나 보수적인 언론은 공직자인 곽노현 교육감을 중심으로 사건을 구성하고, 마치 곽교육감이 선거법 위반 계획을 치밀하게 수립하고 그 계획에 동조한 강경선 교수가 돈 심부름을 한 것처럼 취급하고 언론은 그러한 범죄적 동맹관계를 반복적으로 폭로하였으며, 심지어 발언조차도 날조해왔다. 검찰의 사립짝 스토리다. 그러나 두 분의 관계와 깊은 교유의 역사를 이해하는 나로서는 오히려 그 반대의 흐름이 진짜 스토리라고 추정한다. 아마도 교육감 선거 이후에 뜻하지 않게 곤란한 상황에 처한 곽교육감이 강경선 교수에게 지혜로운 해법을 의뢰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물론 두 사람 모두 누구의 지시나 조언을 맹신하여 경거망동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이러한 중차대한 문제에서 각자 올바른 결정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다면 행동하지 않을 것이며, 그 행동의 의미도 각자 나름대로 부여하고, 그 의미를 사회적으로 완전하게 실천하는 방법도 나름대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의미의 사회적 확산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외화되어 현재 진행 중이다.
법의 관점에서 비난하고 있는바 문제의 화해와 증여는 범죄가 아니라 선한 본성을 드러내는 계기로서 사건(event)이라고 보아야 한다. 나는 이 사건을 강경선 교수를 중심에 놓고 많은 동심원을 그리며 해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 교수는 세상 사람들이 화해라고 하면 왜 돈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진정한 화해는 감정의 일치이자 공감이고, 이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화해의 시나리오는 바로 강교수의 깊은 신앙심에서 발원하였다. 그의 화해지향적인 자세가 선거 이후로 내연하고 있던 불평과 불만을 털어내고 그들을 모두 평화와 형제애로 인도하였다. 이 동심원의 주변에 있던 다른 분들도 어느 정도 망아적(忘我的) 감흥을 체험했을 것이다. 나쁜 사람들은 김용택의 그녀의 집을 노래하지 않을 것이다.
망아는 바로 헌신을 의미한다. 나는 강교수의 지난 생애에서 그런 행적을 몇 차례 보았다. 순전히 신앙과 관련된 일은 논의할 것이 못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 하나를 언급하고자 한다. 80년대 후반에는 진보적 학술단체들이 상당수 등장했지만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학문 연구 활동이 자칫 공안사건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1991년 시인 박노해가 사노맹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고 있던 때에 당시 박노해의 입장을 적절하게 옹호해줄만한 참고인을 구하기 어려웠다. 잘못 진술하면 고초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때였다. 강경선은 90년대 최대의 공안사건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의 관계를 적절하게 진술하고, 표현의 자유를 소신있게 옹호하였다.
이 증여 사건에서 강경선은 보조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치를 헤아린다면 검찰은 이 이벤트에서 강교수의 화해지향적 신앙심을 소위 '불법의 진원(震源)'으로 지목했어야 했다. 검찰이 교육행정가로서 곽노현을 겨냥하여 관료제적 도식 아래서 마치 '교육감은 지시하고 주변인물은 수용하는 것처럼' 정리하는 것은 상상력의 빈곤이며, 그것이 직업적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이 주체이고, 소통하고, 일치를 이루려는 존재라는 관점은 상명하복의 세계관에서는 낯설게 여겨질 것이다.
곽 교육감에게 초점을 맞추고 이 사건을 선거범죄로 구성함으로써 인간으로서 강경선이 구축하려는 세계의 한 자락을 드러내주는 축제를 훼손하고 그 의미를 도외시하고 있다. 이 작은 축제는 한마디로 선거 이후 깨져버린 인간관계를 회복시키고 협력적 관계를 구축하려는 사람들의 형제애의 발현이다. 두 사람의 인생 이야기와 각별한 실천의 역사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이 사건의 취지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이 화해와 증여의 해법이 강교수의 세계관에서 발원하였고, 두 사람의 마음을 적셨다고 본다. 나는 그들이 완전한 인간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서로에게 사제(司祭)이자 동지로서 역할에 충실했다고 본다.
진실은 들으려는 사람에게만 들리고, 그래서 치유를 받는다. 들으려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진실을 실천하려는 사람이다. 나는 돈이 근본적으로 부정하다는 염전(厭錢) 사상에는 수긍하지만, 증여가 모조리 부도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마키아벨리의 지도자의 덕(virtú)이나 베버의 책임윤리(Verantwortungsethik)를 먼저 떠올렸다. 아마 두 사람이 이러한 사유방식을 실천하는 즉물적인 인간이었다면 '설혹 금전지급을 약속했다고 하더라도' 약속을 뭉개버렸을 것이다. 또 그들이 상식적인 인물이었더라면, 물샐 틈없이 권부의 감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선의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돈을 주려고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거부하고, 근본적으로 옳은 해법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내가 살고 남이 죽는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 모두가 주권적인 주체로서 함께 서자는 것이 강경선의 보배같은 지론이다.
나는 이들이 정치에 관여하고, 정치적 문제를 다룰 때 어떻게 사유하고 행동할 것인지를 평소에도 궁금해 하던 터였다. 벌이 세상의 꽃들이 궁금하듯이 그들에게서 다양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호기심은 악취미 같지만 그들이 늘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실험하고 끝없이 극복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기도하며 행동하는 사람들이기에 호기심을 갖지 않는다면 이는 참으로 무신경한 태도일 것이다. 그것은 좋은 고전에 대한 욕심과 같다. 그들이 재판과정에서 자신과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설명할지 기대가 크다.
나는 이 분들의 무죄를 확신하며, 무죄 판결을 받으리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그들로 인해 연출된 은총이 일상적 의미로 충실하게 번안되어야만 그들이 옹호될 수 있다고 본다. 정작 본인들은 은총을 잘 파악하지도 못하고, 처리하지도 못하고, 그것 앞에서 늘 어눌하고, 더 위대한 존재 앞에서 더 깊은 죄의식을 갖게 된다. 누군가 매일 자신의 행위를 은총의 관점에서 온전하게 해명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결국 그는 자신의 삶 전체를 멈추게 할 것이다. 의미부여의 강박증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은총과 기쁨의 동심원에 잠시라도 편승한 적이 있는 사람들만 그것을 언어로 전달할 수 있다. 나는 지나온 동안 그들 곁에서 이러한 감정을 일부나마 공유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번 증여사건도 이러한 감정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으며, 사람들이 하나둘 동심원이 일으키는 작은 파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 파동은 더 큰 원을 이루어 한없이 일렁일 것이다. 이러한 감성과 은총-반드시 기독교나 여타 종교의 배경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을 점차 상실해 가고 있다.
은총이란 무엇인가? 나는 일상적인 자아에서 벗어나 한번쯤 동화의 주인공처럼 자신을 쾌척하고 자아조차 망각하는 정서와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체제는 끊임없이 인간의 상상력과 실천역량을 부정하고 동결(凍結)시키지만, 은총은 여기에 맞서 온갖 사이비 필연주의를 부정하고 극복한다. 역사는 바로 인류가 서로에게 베푸는 은총의 동화들을 집단적으로 엮어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갈수록 내면에서 은총과 희사의 감정이 잦아드는 것을 경험한다. 이것이 모조리 졸아 든다면, 고갈되었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이미 인간이 아니다. 나는 이 두 사람의 삶은 휴먼 다큐나 영화로 다루면 더 적절하지 않나 생각한다. 정의로운 법학자는 드물다. 인간적인 법학자는 더욱 드물다. 그러나 사랑과 비전을 가진 법학자는 참으로 희귀하다. 나는 강경선과 곽노현에게서 이러한 모범을 보았다. 그리고 이번 사건도 그들의 인간됨을 충분히 드러내주는 실례라고 본다.
이제 재판이 곧 시작될 것이기 때문에 그에 관한 적절한 법률적 소견부터 밝힘으로써 나의 생각을 풀어가겠다. 나는 그 분들을 위하여 변명하지 않으며, 또한 그 분들에게도 나의 변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의도와 상관없이 법적 판단은 타인의 몫이기 때문에 재판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그러한 우려 때문에 판단하는 자는 눈을 감을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법의 한계를 가늠해야 한다는 점을 촉구한다. 법언에 따르면 '차이를 발견하는 자가 제대로 판단하는 자'(bene iudicat, qui bene distinguit)이다. 그것이 바로 분별지로서 법(jurisprudentia)을 의미한다. 이 사건은 법철학적 실천지향을 지닌 두 인물이 관련되어 있으므로 아무래도 법철학적 연습사례라고 불러야겠다.
▲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 ⓒ프레시안(자료 사진) |
Ⅲ 목적 그리고 사후목적(?)
문제가 되고 있는 적용법조가 전례없이 기이하기 때문에 판단하는 분들에게 네 가지에 주의를 촉구한다.
첫째로, 조문을 적용하려는 자는 조문이 아니라 선거법 전체를, 그리고 전체 법전을 적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즉 해당법률과 법질서의 전체 목적 안에서 체계적인 해석을 시도해야 한다. 둘째로, 종래 선거법 위반사례들에 대한 엄밀한 분석과 평가를 통해 보강하거나 제한하지 않으면 심각한 상황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이다. 선례에 대한 엄밀한 분석과 평가가 필요한데 문제는 유사사례가 없다고 한다. 셋째로, 사안 자체의 고유성과 독특함(uniqueness)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증여 행위를 법의 정신과 양립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넷째로, 조문의 특이성(가혹)을 헌법상의 여러 권리들과 근본적인 정치도덕들, 외국의 법제나 관행들을 참조하여 완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소위 적용법조가 검찰의 희망대로라면 그 규정은 참으로 기이하고 불합리하고 위헌적이라고 먼저 주장하겠다.
따분하지만 선거법규정을 한번 훑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증여사건의 본질은 대가성 여부이다. 따라서 대가성이 있는 증여라면 이른바 돈거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직선거법은 후보자를 매수하거나 후보자 지위를 매각하는 등 선거의 공정성을 해치는 행위를 금지하고 처벌하는 것이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금전적 지급약속에 대한 사전 합의가 없다면 처벌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검찰은 제232조 제1항, 특히 2호를 처벌근거로 들고 나왔다. (각주 2)
제232조 제1항 제1호는 사퇴를 유도할 목적으로 현재 후보자익 후보자가 되려는 자에게 이익을 제공하거나 제공의 의사표시를 하거나 이익을 받거나 제공의 의사표시를 승낙한 행위를 의미한다. 제1항 제1호는 후보자이거나 후보자가 되려는 자와 관계에 적용되므로 범죄의 시적 요소가 사퇴 전이다. 따라서 제1항 제1호는 이 사건과 관련성이 없다.
반면 제2호는 이미 사퇴한 자에게 사퇴에 대한 대가로 제230조 제1항 제1호에 규정된 행위를 하거나 이익을 받거나 제공의 의사표시를 승낙한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제2호에서 "제230조 제1항 제1호에 규정된 행위를 한 자"는 이익을 제공하는 자가 해당하고, "그 이익이나 직의 제공을 받거나 제공의 의사표시를 승낙한 자"는 그 상대방이 해당한다. 아마도 전반부는 곽노현에게, 후반부는 박명기에게 적용되고, 그리고 강경선에게는 제1항 제2호의 공범으로 와 제2항 알선행위 위반으로 처벌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가지급의 사전약속'이 존재하지 않는 한 이들을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비난할 근거가 없다고 본다.
"사퇴에 대한 대가를 목적으로"라는 표현의 의미가 이 조항에서 중요하다.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해보겠다. 공직선거법은 일반적으로 선거의 공정성을 보호하는 데에 있으므로 규정의 취지도 전반적으로 금권선거의 방지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해야 한다.
첫째로, 선거법의 목적을 중시해야 한다. 선거법은 공정한 선거풍토와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놓고 해석해야 한다. 선거법의 목적을 전제로 하지 않고, 법해석을 감행한다면 선거법은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반된다. 대가성 여부를 기준으로 금지행위를 판별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에 대해서는 판례도 쌓여있지 않으며, 이 사건의 처벌시도는 현재까지 형성된 정당의 경선경비 처리관행이나 공직배분 관행과 근본적으로 상충한다. 무제약적 확장해석의 위험뿐만 아니라 소급적용의 문제도 안고 있다. 결국 일정한 유형의 대가지급에 관한 사전약속에 입각한 공정성 훼손행위만을 범죄로 해야 한다.
둘째로, 선거범죄는 목적범이고, 목적은 최소한 행위시에 존재해야 한다. '사퇴에 대한 대가를 목적으로'에서 목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진짜 목적은 이 규정에서는 쓰여지지 않았다. 그 목적은 사퇴행위시에 존재해야 범죄로서 의미구조를 가질 수 있다. 사퇴 이후에도 목적이 추가적으로 등장할 수 있다면 목적성의 사물논리적 구조에 반한다. 목적성은 인간에게는 사전적으로만 설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후목적도 가능한다면 근본적인 혼동이고 법률 규정은 넌센스이다. 사후목적이 가능하다면 인간행동 기본구조에 반하는 의미론적 소급이다. 사전적인 목적 없이 이루어진 사퇴에 대해서는 대가성이 존재할 수 없다. 선거 이후에 새롭게 이루진 행위는 법적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행위영역이다. 만약에 법률이 당선인과 사퇴자간에 일체의 증여, 지원, 거래, 기회제공을 금지하고, 관계 형성을 영원히 금지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법은 정치의 본질에 반하고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규범이다.
셋째로, 제1항 제1호와 제2호의 법정형이 동일하고, 심지어 공범의 행위를 규제하는 제2항의 법정형이 제1항의 법정형보다 무겁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불법의 질을 평가하는데 과연 제2항이 제1항보다 심각하고, 제1항 제1호와 제2호가 동등하다고 볼 근거가 있는가? 만약 사전약속이나 사전목적이 없는 행위가 바로 제2호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제2호의 처벌은 제1호의 행위보다 가벼운 것이어야 한다. 아무리 범죄라고 하더라도 우연히 후발적으로 이루어진 이익제공행위는 사전약속에 입각한 후보사퇴와 대가 제공 행위와 동질적이라고 평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가에 관한 사전합의가 1호와 2호의 행위를 등가적으로 만든다.
넷째로, 제1호와 제2호는 "제230조 제1항 1호의 행위를 한 자"를 규정하고 있다. 제230조 제1항 1호는 "후보를 사퇴하거나 사퇴할 목적으로 또는 후보를 사퇴하거나 사퇴하게 할 목적으로"라는 문구를 포함하고 있다. 이 목적 문구는 제232조 1호에는 특별히 의미있는 것이 아니지만, 제2호에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제230조 제1항 1호의 목적은 당연히 사전목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후보사퇴와 대가제공에 관한 사전합의에 기초하여 사퇴한 자에게 이익을 제공하거나 한 자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것은 작은 쟁점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사전목적과 사전합의가 없는 수수행위나 약속행위를 영원히 모두 금지한다는 것은 공직후보자나 당선자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므로 위헌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규정은 정치의 본질을 부정하는 매우 이상한 법률이다. 정치는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이합집산하고, 보다 유사하고 근접한 정치적 대의를 추구하는 세력들과 연합하는 과정이다. 대한민국 입법부가 경쟁자였다가 사퇴한 후보자들에게 정치적 기회를 제공하려는 행위를 범죄시하는 도덕률로 무장한 전위집단이라고 보기 어렵다. 정당내부에서는 이와 전혀 다른 정치적 관행이 확립되어 있다. 정치를 통해서 정치인들은 수없이 많은 이해유도행위를 한다. 온갖 공약을 통해 지지층을 모으고, 다양한 정책적 연합을 통해서 후보자들, 잠재적 경쟁자들, 사퇴자들에게 경제적 비용을 보상하고, 정치적 지위를 약속하고 제공한다. 그것이 정치의 본질이다.
그런데 정당이 구조적으로 다양한 선택폭을 행사하면서 이익과 기회를 제공한 때에는 무죄이고, 당적을 가질 수 없는 교육감이 자기선거와 관련하여 빚어진 보전되지 못한 타인의 경비를 개인적으로 처리하는 때에 범죄가 된다는 것은 헌법상 평등원칙에 위반된다. 사전 약속이 없는 데에도 처벌하겠다는 것이 이 법의 본질이라면 대한민국 모든 정당의 지도자들이나 경선참여자들은 제232조 제2항에 따라 대부분 처벌되어야 할 것이다. 이 대목에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눈부신 활약이 기대된다. 후보사퇴에 대한 비용계산과 공직약속은 정당의 본질이거나 근본관행이다. 사전목적과 사전약속이 없이 이루어진 일체의 행위가 모두 선거법 위반행위라면 공직선거법은 실질적으로 불법적이지 않는 데에도 처벌함으로써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에도 반하고, 정치적 자유의 기본을 유린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전합의에 따라 선거 이후 6개월 내에 이루어진 대가 지급행위만 적용대상으로 해석해야 한다.
Ⅳ 행위의 순수를 찾아서
많은 사람들이 2천만원은 몰라도 2억원을 제공하는 것이 단순한 증여로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뭔가 꺼림칙한 거래가 있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2백만원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별로 달라질 것같지 않다. 어쨌든 선거 이후 사퇴자와 교육감간의 심리적 불협화를 해결하고, 후보직 사퇴로 후보자의 경제적 상태가 악화일로에 있었을 것이므로 사퇴자가 겪고 있는 경제적 궁박을 덜어주고자 했던 두 사람의 지혜가 작용하였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후보사퇴는 박명기 교수에게 엄청나게 불리한 결정이었다. 그가 대가를 위해 사퇴했다는 것은 전반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다. 왜냐하면 그가 완주했더라면 선관위로부터 보전받을 수 있는 액수가 곽교육감이 제공한 금액보다 훨씬 고액이었다는 점은 널리 알려졌다.
강경선과 곽노현은 이번 사태에 이름이 나란히 오른 것을 아마도 흔쾌하게 생각할 것이다. 가능한 한 고통받는 이에게 필요한 것을 조속히 제공해 주어야 한다는 규범관과 실천론을 지닌 그들이 도덕적으로 실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을 행함으로써 고초를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개혁적인 곽 교육감에게 쉽게 환멸을 말하고 있다. 야당이나 시민사회도 곽 교육감의 개혁정책의 영광을 공유했으면서도 곽 교육감의 부채의식과 그림자에 대해서는 완전히 외면했다. 곽 교육감은 그것을 개인적으로 풀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들의 스토리를 이해하려고 시도하면 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를 둘러싼, 어쩌면 나로 인하여 시작된 작은 불행을 치유해야만 더 큰 불행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제애를 이해하고 옹호할 때에 거대한 복지사회도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누군가 그대를 위해 공직후보를 사퇴하면서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다면 그대는 그를 쌤통이라고 가만 두겠는가?"
공직선거법과 선거법과 도덕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사람들은 이 질문에 답변해야 한다. 사람들이 표만 계산한다면 악마가 되기까지는 시간의 문제다. 그리고 시대에 특별한 구세주를 찾아 몰입하는 태도는 아쉽지만 한번으로 족하다. 우리는 정치적 구원자를 찾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형제애를 추구해야 한다. 두 사람이 세상의 법에 의해 혹여 처벌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선한 동기로 충만한 가운데 그러한 실천을 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곽 교육감의 행위는 대가성이 있는 행위가 아니라 '자유로운 행위'라고 규정한다. 곽노현 교육감이 기자회견에서 "박명기 교수의 경제적 곤궁과 심리적 위험"을 두고 볼 수 없어 긴급하게 개입했다고 밝혔다. 어쨌든 사채를 끌어다 선거에 임하였기 때문에 경제적 궁박은 가중되었을 것이고, 그로 인한 연민의 감정에 따라 도움을 주기로 결단하였다. 전도가 유망한 젊은 교육운동가로서 박교수가 처한 딱한 현실을 외면하여 그가 어떤 불행한 선택을 하였다면 아마도 곽노현은 법을 지켰지만 냉혈한 진보로, 파렴치한으로 다시 내몰렸을 것이다. 그러나 두 분은 도와야 한다면 빨리 돕자고 결정하였다. 목숨이 아니라 재산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강경선과 곽노현이 보여주는 그들의 포틀래치(Potlatch)다. 그것은 순수한 증여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대가성과 관련하여 몇 가지 주의가 필요하다.
첫째로, 순수한 증여가 없다는 주장을 통해 대가성을 추론하려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이웃에게 자신의 재물을 선물로 내놓고 심지어 값비싼 골동품을 과시적으로 파괴하는 원주민들의 포틀래치 의식도 결국 자신의 관대함과 대범함을 드러내어 사회적 위신을 높이려는 행위라고 해석한다.(각주 3) 기독교적인 희생도 최후의 심판에서 보상동기가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도주의적 희생도 불후의 명성에 대한 욕망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엄격하게 순수성을 논의한다는 것은 인간성의 파괴이고 테러라고 해야 한다. 이런 식의 순수성의 잣대로 삶을 재단한다면 인간은 완전히 초라한 파충류가 될 것이다.
둘째로, 연관성은 의무의 기원이다. 어떠한 행위와 반대급부간의 논리적 등가성이 존재할 때 급부와 반대급부간에 대가성이 존재한다. 예컨대, 사전약속에 따른 그 이행이나 행위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반대급부가 아닐 때에는 대가성을 논할 수 없다. 이 증여사건에서 연관성은 대가성으로 조잡하게 구성할 것이 아니다. 곽 교육감은 단일화과정에서 자신을 위해 사퇴한 여러 후보들에게 그 어떤 증여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박 교수의 경제적 궁박상태를 증여의무의 도덕적 기원으로 파악해야 한다. 처벌근거가 아니라 증여를 정당화하는 사유라고 보아야 한다. 나는 관련자들이 공방과정에서 이 연관성마저 부인하려고 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러나 연관성의 부정은 불필요하며, 연관성의 부정이 오히려 인간행위의 의미구조를 파괴한다. 우리는 다양한 것을 고려해서 행위의 방향과 폭을 자유롭게 결정하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부도덕의 의혹에서 벗어난다. 완전무결하게 연관성에서 자유로운 것일 때에만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치 않으며, 인간세계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행위는 수없이 많은 현실적 관계와 원인에 입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자유롭게 결정한다.
셋째로, 증여는 자유의 행위가 아니라 강력한 도덕적 의무의 행위이며, 특별한 구속성에 입각한 의무이다. 증여행위의 성격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행위를 구별해보자. 철학자 엄슨(Urmson)은 1958년 <성자들과 영웅들(Saints and Heroes)>에서 행위를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ⅰ)도덕적으로 명령된 행위, ⅱ)도덕적으로 허용된 행위, ⅲ)도덕적으로 금지된 행위, ⅳ)하면 칭찬해야 하지만 하지 않아도 탓하지 않는 행동(의무초과적 행동)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분류에서 보았을 때 강도를 당한 행인을 도왔던 착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이나 성자들이나 영웅들의 행위는 의무초과적 행동에 해당한다.
곽 교육감의 상황은 자기 자신과 관련하여 또는 자신으로 인하여 특별한 부담을 지고 경제적 불운을 겪고 있는 사람에 대한 것이므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상황과는 어느 정도 다르다. 착한 사마리아인에게 강도피해자는 아무런 강한 의무를 발생시키지 않는 순수한 제3자이지만, 경제적 고초를 겪고 있는 박 교수는 곽 교육감에게 다소간 강한 의무를 발생시키는 제3자이다. 즉 특별한 연관성으로 인하여 보증인적 성격이 존재한다. 나는 '윤리적 보증인'이라고 부르겠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순전히 의무초과적 행동으로서 무관한 제3자에 대한 전적으로 자발적인 개입이다. 반면 교육감은 윤리적 보증인 지위에 준하는 특별한 구속성(special obligation) 때문에 의무초과적 행동과 도덕적으로 명령된 행위 사이의 회색지대에 속한다고 본다. 물론 박 교수가 강도피해자와 같은 높은 수준의 위험에 놓여 있지 않지만 그가 경제적 궁박상태에서 심리적 위기를 겪고 있다는 점은 교육감의 구속성을 보다 강화시킨다. 따라서 곽 교육감의 지원의무는 의무초과적 행동이라기보다는 도덕적으로 명령된 행위에 가깝다. 그래서 그것은 법적 의무로 전환시키기 매우 적합한 의무라고 해야 한다.
이러한 개념과 관련해 부작위범의 논의를 참조할 수 있다. 그에 관한 법원리는 '자기의 행위로 인하여 위험발생의 원인을 야기한 자에게 그 위험발생을 방지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형사법의 영역에서는 일정한 부작위(ommissio)을 처벌하고(각주 4), 교통사고 피해자를 원조하지 않은 자를 중하게 벌하며(각주 5), 민사법에서도 위험책임이나 제조물책임을 강조한다. 나는 이러한 실례들은 사물의 본성에서 추론되는 가중된 의무라고 본다. 아마도 부작위범의 보증인적 지위나 구속적인 관계(가족이나 같은 작업팀)에서 나오는 특별한 의무가 이 사건을 풀어가는 단서가 될 것이다. 곽교육감이 박교수의 경제적 궁박 상태 자체를 초래하지 않았으며, 또한 박교수가 범죄나 불법행위의 희생자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지만 두 사람간에 일정한 윤리적 구속성을 발생시킬 정도로 긴밀한 연관성이 존재한다. 곽교육감이 이러한 윤리적 구속성에 따라 박명기 교수에 대해 특별한 의무를 진다고 생각한다.
넷째로, 종교적으로 말하면, 증여는 '모르고 지은 도덕적 죄에 대한 금전적 보속'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공직선거법이 이들의 관계회복적 시도를 불법으로 규정한다면 공직선거법은 종교의 자유와 상충하는 점도 있다고 지적해야겠다. 한 사람은 후보사퇴를 통하여 빚더미에 눌려 있고, 다른 사람은 영광스러운 공직에 올랐으면서 영광을 차지한 자가 아무런 도움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는 도덕적으로 온전한 감정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발적으로 증여를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행은 칭찬받아야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문이 악의적으로 퍼뜨린 것처럼 박명기 교수가 사퇴후 모종의 기대를 거칠게 표현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도 없다. 그러한 행위들을 범죄의 관점에서 옥죄는 것은 인간본성에 반하는 것이다. 기대와 호소는 금지할 수 없으며, 법률은 적도(適度)를 넘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로, 이러한 긴급부조는 사물의 본성에서 추론되는 자연적 채무(natural oblig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앞서 말한 준법률적 의무와도 부합한다. 상식적으로 도의관념에 적합한 채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로 인한 과도한 희생을 감수하는 상대를 도와야 한다는 것은 자연적 의무이다. 반대로 박 교수는 곽 교육감에 대하여 이를 법적으로 소구할 정도로 강력한 자연적 권리나 법적 권리를 가지지 않는다. 박교수는 뭔가 희망하거나 기대할 수는 있으나 요구할 권리가 없다. 일방은 의무를 지지만 타방은 권리를 갖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적 의무나 자연적 채무는 일면적이고 순수한 의무이다. 그런 점에서 어느 정도 초과의무성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일방적 성격 때문에 곽교육감의 행동은 자비의 논리로 해명될 수 있다.
종합하면, 긴급부조를 해야할 교육감의 강한 윤리적 의무가 존재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검찰이 주장하는바 대가성은 순전히 법조문에 따른 허구적 설정이다. 이 증여사건에 대한 무죄판결과 동시에 제242조 제1항 제2호를 개정하는 것이 옳은지는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개정할 것인지가 더 큰 고민거리이다. 선거비용 문제에 대해 선거공영제를 도입하여 현재의 경마식 선거제도를 지향하는 것은 바른 해법이다. 사채로 선거운동을 진행하도록 제도화한 선거제도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어쨌든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여 후보자 난립의 부담을 여과하거나 선거공영제를 강화하는 선에서 선거법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좋은 제도가 도입되지 않는 현실에서는 사전약속에 의한 후보매수가 아니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처벌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선거승리자가 사퇴자뿐만 아니라 패배자의 비용도 보전해주는 것을 허용하고 관행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곽교육감의 증여와 같은 사례는 반복되어도 좋다고 본다. 그것은 본디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이어야 하기 때문에 방임해야 하는 것이다. 제232조 제1항 제1호의 행위규제만으로 공직선거법은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으므로 판단하는 사람들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Ⅴ 행위예술로서 법
사건으로서 증여행위는 박명기 교수의 경제적 궁박을 타개하는 긴급부조이다. 나아가 단일화의 뒤처리를 감당하지 않은 시민사회운동-전체적으로는 유권자집단-의 허약함을 보완하는 긴급구제이다. 한편 미국에서처럼 경쟁자의 선거비용을 승자가 인수하고, 공직도 제안하는 제도와 관행을 확립하지 못한 우리나라 공직선거제도를 아름답게 가교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긴급부조행위를 처벌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법적용으로서 국제적인 이목을 끌 것이다.
강경선은 오래전부터 법을 행위예술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보와 여론을 통제하고 조종하면서 사건을 풀어가는 검찰의 사립짝 끌기는 행위예술이 아니라 위험한 곡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진정한 행위예술을 찾아야 한다. 행위예술로서 법관념은 삶의 지향점에 의문부호를 던지며 풍부한 울림을 준다. 행위예술로서 법관념은 사법관료와 지배체제의 시각이 아니라 수범자이자 행위자 입장에서 법을 바라보려고 한다. 민중의 삶에 기하여 성찰하도록 촉구하며 행동주의적 요청을 간직하고 있다. 법은 집단적이고 창의적인 의지의 행동을 통해서 들어나고, 이렇게 정립된 법이 스스로 고갈되고 본질에서 멀어질 때 다시 누군가 정의의 정신을 끌어와 혁신을 이루어야 한다. 결국 행위예술가로서 인간은 정의로운 행위를 통해 법의 경직성과 불비, 오류를 시정하는 자이다. 그것은 피상적으로는 불법으로 보이지만 더 높은 수준에서는 궁극적으로 정당한 법인 것이다.
결국 참다운 법은 법전법이 아니라 법전법을 통해 구현되어야 할 법정신이다. 행위예술로서 법은 바로 그러한 법정신을 현실로 가져오는 행동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을 매개로 한다. 인간만이 법을 구원한다. 때로는 정의로운 판사가 그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일반대중으로서 수범자가 그 일을 감당한다. 선물증여는 한판의 행위예술이다. 선거법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한다. 그들은 선거법의 불비를 해소하고 법의 경직성을 완화시켰다. 그들의 죄는 바로 정치적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미덕을 뜻밖에 추구한 죄이다. 인간으로서 정직하게 응답한 것이다. 그것은 놀라움이다. 법은 어느 경우에도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 더구나 도덕적 결단을 내리는 인간에게 도덕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명령해서는 안 된다.
(부제에 포함된 영화 '바야 콘 디오스(Vaya Con Dios)'는 믿음을 마지막까지 지키는 사람들의 여정을 다룬 2002년 독일영화다. 이 영화가 어쩌면 이 사건의 주인공들의 삶과 어울릴 것도 같다. 원어는 스페인어로 '신과 함께 가라'를 뜻한다.)
(1) 벤담(J. Bentham)은 합리적 사람들은 참여하지 않는 높은 위험을 안고 있는 게임을 심층놀이라고 불렀고, 기어츠(Geertz)는 인도네시아 발리섬의 닭싸움을 묘사하면서 이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닭싸움 도박은 법으로 금지되었다는 점에서 심층놀이의 특성을 갖고 있으며, 필자는 법과 도덕(종교)의 상충을 감안할 때에도 심층놀이를 의미있게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2) 제232조(후보자에 대한 매수 및 이해유도죄) ①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상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1. 후보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거나 후보자가 된 것을 사퇴하게 할 목 적으로 후보자가 되고자 하는 자나 후보자에게 제230조(매수 및 이해유도죄)제1항제1호에 규정된 행위를 한 자 또는 그 이익이나 직의 제공을 받거나 제공의 의사표시를 승낙한 자
2. 후보자가 되고자 하는 것을 중지하거나 후보자를 사퇴한데 대한 대가를 목적으로 후보자가 되고자 하였던 자나 후보자이었던 자에게 제230조제1항제1호에 규정된 행위를 한 자 또는 그 이익이나 직의 제공을 받거나 제공의 의사표시를 승낙한 자
②제1항 각호의 1에 규정된 행위에 관하여 지시·권유·요구하거나 알선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상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3) 포틀래치라는 단어는 치누크(Chinook) 부족 말로 '건네주다'나 '선물'을 의미한다. 포틀래치(potlatch)는 북서태평양 연안의 원주민들이 거행하고 있는 선물-증여의 축제이고 원초적인 경제시스템이다. 인류학자들의 연구대상으로서 각광을 받았다. 포틀래치는 거의 모든 물건, 심지어 여자와 노예까지도 대상으로 삼았다. 포틀래치의 낭비적이고 반문화적 성격 때문에 캐나다와 미국연방정부가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4) 형법 제18조 [부작위범] 위험의 발생을 방지할 의무가 있거나 자기의 행위로 인하여 위험발생의 원인을 야기한 자가 그 위험발생을 방지하지 아니한 때에는 그 발생된 결과에 의하여 처벌한다.
(5) 도로교통법 제54조(사고발생시의 조치) ①차의 운전 등 교통으로 인하여 사람을 사상(死傷)하거나 물건을 손괴(損壞)(이하 "교통사고"라 한다)한 때에는 그 차의 운전자나 그 밖의 승무원(이하 "운전자등"이라 한다)은 즉시 정차하여 사상자를 구호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
제148조(벌칙) 제54조제1항에 따른 교통사고 발생 시의 조치를 하지 아니한 사람은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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