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옹이에게
- 4차 희망버스를 맞아
김진숙
이 크레인에 올라와 두 달째가 된 박성호 동지의 아들 박슬옹에게 편지를 씁니다.
슬옹아, 니가 태어날 때 아빠는 감옥에 있었다. 만삭이 된 아내를 두고 징역을 살면서 슬기롭고 옹골차게 자라라고 니 이름을 지어줬던 아빠는 니가 돌이 될 무렵에야 비로소 너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해고자 복직투쟁을 하다 세 번째 징역을 갔고, 그땐 주익이 아저씨도 재규 아저씨도 아빠의 곁에서 함께 싸웠다. 박창수 아저씨의 죽음으로 해고됐던 아빠는 주익이 아저씨의 죽음으로 13년 만에 복직을 했다. 생목숨을 차례차례 묻은 대가였던 복직은 5년 만에 다시 해고로 되돌아왔고, 이 85호 크레인까지 오른 니 애비의 삶이 한진 노동조합의 피눈물나는 역사이고 피맺힌 한이다.
슬옹아, 아침부터 밤중까지 크레인 주변을 맴도는 슬옹아. 열다섯 살 니가 이해하기에도, 짊어지기에도 크레인은 참 무겁다. 2차 희망버스 때 쏟아지는 물대포를 피하다보니 엄마와 누나를 잃어버렸고, 엄마와 누나가 연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너의 비겁함 때문에 부끄러웠다 했느냐. 비겁한 건 니가 아니라 자신의 탐욕을 위해 니 애비를 짜른 재벌이다. 부끄러운 건 니가 아니라 애비는 크레인에 올라와 있고, 엄마와 누나는 잡혀가고, 열다섯 살 너를 길바닥에 혼자 남겨뒀던 부당한 권력이다.
네 아빠가 너보다 조금 컸던 나이에 이 회사에 취직하던 날. 네 할머니는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픈 줄 모를 만큼 기뻐하셨다더구나. 그러나 할머니는 아들이 고향에 찾아오는 것보다 더 자주 아들의 면회를 다녀야 했고, 공장에 있는 시간보다 쫓겨나 싸우는 세월이 길었던 아들을 지켜보셔야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빈소에 엎드려 울던 네 아빠의 모습을 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슬옹아, 아빠는 혼자서도 집 한 채를 뚝딱 지을 만큼 못하는 게 없는 일류 기술자다. 그런 뛰어난 기술로 배를 만들어 왔고, 그렇게 배만 만들고 살았으면 좋으련만 아빠는 배 만드는 일보다 노동자들 장례 치르는 일을 더 많이 하고 살았던 사람이다. 누구의 부탁도 거절하지 못할 만큼 사람 좋고, 그러면서도 원칙 앞에선 절대 타협하지 않았던 네 아빠는 진짜 노동자다.
슬옹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아빠를 만나 이제 같이 늙어간다. 슬옹아, 난 네 아빠가 다시 공장에 들어가 기름때 묻히며 작업복에 소금꽃 허옇게 피우며 일하는 걸 꼭 다시 보고 싶다. 그 꿈을 지켜주겠다고 여길 올라왔는데 이젠 네 아빠가 날 지켜주기 위해 여길 올라와 있구나.
다음 주 개학해서 학교로 돌아가더라도 네 마음은 저 길 건너편 네가 온종일 앉아 크레인을 바라보던 그 자리에서 아빠를 지켜보고 있겠지. 그런 너에게 공부 열심히 하란 말을 나는 할 수가 없구나. 니가 좀더 자라 내가 니 애비를 만났던 나이쯤 되면 꼭 대학에 안가더라도 노동자가 대우받는 그런 세상이면 좋겠다. 비정규직이라고 설움 받고 차별받는 이런 세상이 아니면 좋겠다.
슬옹아, 아빠랑 목욕가는 게 소원이라던 슬옹아.
그 평범한 일상이 소원이 돼버린 슬옹아.
이번 추석엔 부디 그 소원이 이루어져서 아빠랑 같이 목욕가고 할머니 산소에 같이 갈 수 있길 간절히 바래본다. 박슬옹 파이팅!
희망버스 여러분께
크레인의 계절은 어느새 늦가을입니다. 사계절을 다 살게 됐군요. 암흑 천지 크레인에 부분적이나마 전기가 들어왔고 어제는 책이 올라왔습니다. 그 당연한 일들이 기적이 되는 곳, 85호 크레인입니다. 234일을 꿈쩍 않던 무쇠덩어리 크레인에도 서서히 변화가 오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만들어 내고 새로운 발자욱을 남긴 희망버스 여러분들의 힘입니다. 어떤 탄압에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았고,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멀리서 모여주신 여러분들, 여러 어르신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여기 다섯 명의 형제들 건강하게 잘 견뎌 내겠습니다. 단식 13일차 신동순 동지도 잘 견디고 있습니다. 반드시 여러분들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누겠습니다.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 김진숙 지도위원. ⓒ노동과세계(이명익) |
박성호(한진중공업 해고자)
동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투쟁위원회 공동대표 박성호입니다.
투쟁으로 인사 올립니다. 투쟁!
4차 희망버스를 85호 크레인 고공농성 날짜를 바꾸면서 기다렸습니다. 저와 같은 마음으로 4차 희망버스 참여를 기다렸던 동지들이 있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1차 희망버스 한진중공업 진입 성공 이후 2차, 3차 모두 부산 영도섬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을 향해 걷고, 뛰고, 숨박꼭질을 하며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하며, 우리를 위해 싸워주셨던 분들. 끝내 85호 크레인 김진숙 동지와 우리 4명의 사수대 동지들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경찰 차벽을 두고 문화제를 치루던 기억. 그 기억을 가슴에 안고 4차 희망버스가 서울에서 대행진을 시작한다니 참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지금 이 시각 제가 있는 곳은 천리길 넘어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내 85호 크레인 중간층 4명의 사수대 동지들의 보금자리인 작은 텐트 안입니다. 비록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동지들 가슴에, 눈은 갈월동 한진중공업 본사 앞에서 물대포를 맞던 희망버스 대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난밤 청계광장, 독립문에서 문화제를 하고 이른 새벽부터 인왕산 등반을 마치고 청와대 민원 접수를 위해 모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긴 일정을 소화하고 마무리 집회 장소인 갈월동 대로 경찰 차벽 앞에 앉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희 4명이 공권력의 물리적 힘에 밀려 85호 크레인에 오른 지 두 달이 지나고 있습니다. 그 두 달을 넘기는 동안 한진중공업 내 현장에서는 제대로 된 함마소리, 용접불꽃을 듣고 보지도 못했습니다.
한국의 조선소 현실은 이러합니다. 도크가 부족해서 선박 건조를 할 수 없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러나 한진중공업에서는 대형 도크가 2개나 놀고 있습니다. 저들이 말한 대로 하면 국가 경제에 엄청난 손실을 입히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94명의 정리해고 철회 명분 때문에 도크를 놀리고 있는 한진중공업 경영인들을 국가적, 경제적 손실을 입히고 있는 행위로 국가 차원에서 그 책임을 물어보는 것은 어떨는지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는 전략적으로 조작된 정리해고가 분명합니다. 종합적 기술력을 요구하는 조선소 현장을 건설업 방식의 노무 시스템으로 바꾸려는 계략에서 꾸며진 것입니다. 조선소 현장을 100% 비정규직화하여 일당제, 도급제 등의 방식을 도입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언제든지 영도를 떠날 수 있는 방법을 구축하고자 했던 목적이 깔려 있는 정리해고였습니다.
그러함에도 이명박 정권의 하수인 부산지방노동위원회에서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는 합당하다고 판정했습니다. 부산 지노위는 노조 측이 제출한 부당한 정리해고 근거를 놓고 제대로 된 답변도 하지 못했습니다. 한진중공업이 적자가 아니다. 적자라고 주장하는 회사 측의 손실액은 건설 부분에서 베르시움 건물 부실에 대한 위약금은 지급도 되지 않았는데 소급해서 손실로 잡았다라고 주장하자 일주일 연기하여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해 보겠다고 한 후 결정을 연기하였습니다. 일주일 후 회사 측에서 추가 제출한 내용을 확인한 결과 노조 측에서 주장하는 말이 맞았는데도 수주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적자가 예상되기 때문에 소급해서 판단을 한 것입니다.
법 판단에 대한 기본도 모르는 놈들이 위원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들이 대학교수고, 변호사였습니다. 이처럼 잘못된 결정이 중노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중노위는 눈치를 보느라고 아직 판결 날짜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노위 위원들이 청문회를 보았다면 더 이상 판단을 미룰 필요는 없겠지요.
얼마 전 한진중공업 조남호 회장이 증인으로 출석한 청문회를 보았을 것입니다. 이날 저는 스스로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런 놈이 한진중공업의 최고 총수였나. 저런 놈 부자 만들어 주기 위해 우리들이 그렇게 발버둥 치며 일했단 말인가. 참아 입에 올릴 수 없을 정도의 무지의 재벌 총수였습니다. 그런 재벌 총수를 온 국민이 스크린을 통해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동지 여러분!
85호 크레인 중간에 있는 4명의 동지들의 근황을 잠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조직부장 정홍형 동지는 부산의 집회판을 호령하며 살았던 동지입니다. 지금은 선동하는 머리를 사용하지 않다보니 뇌가 쇠퇴해지고 있다며 뇌를 보강하는 약을 먹어야겠다고 합니다. 한진중공업 1세대 활동가 박영제 동지는 여기에서 맏형으로서 농성 수칙을 철저히 준수하라고 우리들을 다그칩니다. 둘째인 신동순 동지는 한 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는 사고에 꽉 차 있다 보니 어떨 때는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회사놈들을 보며 격분합니다. 우리는 신동순 동지를 자제시키는데 급급할 때가 있습니다. 신동순 동지는 단식을 하고 있습니다. 투쟁이 길어지면 해고자들의 고통이 너무 심하다며 투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자 목숨을 건 단식투쟁중입니다. 오늘로 15일째입니다.
이들 중 제가 제일 무원칙적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85호 크레인 김진숙 동지와 사수대 4명의 동지는 건재합니다. 희망버스 동지들에게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27일날 김진숙 지도위원이 제 아들 슬옹이에게 띄우는 편지를 낭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들은 경찰의 물대포와 최루액에 놀라 엄마와 누나를 두고 도망을 갔다고 했습니다. 아들은 곧바로 자기 행동이 비겁했다는 것을 느끼고 엄마와 누나를 찾아 금정경찰서로 가서 용서를 구했다는 말에 김진숙 지도위원은 비겁한 놈은 슬옹이가 아니라 슬옹이를 그렇게 몰았던 자본과 권력이라고 했습니다.
조남호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청문회를 마치고 자기의 비겁함을 온 국민에게 사죄했으면 하는데 우리의 바람으로 끝나겠지요. 희망버스 동지들의 힘으로 조남호와 국민들 앞에 정리해고 철회하고 나의 비겁함을 용서해 달라는 호소문을 만들어 내도록 합시다.
아들과 딸은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가 철회되면 우리보다 더 힘들게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버스를 타고 가자라고 했습니다. 그날이 오기를 희망해 봅니다. 그래야 우리 가족들이 빚을 갚을 수 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 서울 용산 한진중공업 본사로 행진하는 4차 희망버스 참가자들. ⓒ프레시안(채은하) |
신동순(한진중공업 해고자. 크레인 위 무기한 단식 15일차)
1995년 8월에 입사하여 입사와 동시에 조합원이 되었습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순탄치 않는 일들이 내 인생에 닥쳐오곤 했습니다.
작업을 하다 남이 휘두른 오함마에 무릎을 맞아 산재를 당했는데 산재휴가를 마치고 회사에 복귀하니 3개월간 담배꽁초 줍는 깡통쟁이 업무를 시켰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노동조합에 첫발을 딛고, 2000년 산업안전부장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003년 대의원으로 활동했지만 한진중공업의 악랄한 노무정책에 힘도 쓰지 못하는 무기력한 대의원이었고, 교육으로, 정리해고 대상자로 이러 저리 쫓겨 다니기에 급급했습니다.
김주익 지회장이 회사의 막가파식 노무정책과 손배가압류에 맞서 85호 크레인 고공농성에 돌입했을 때 회사는 울산공장, 마산공장, 영도공장 조합원들을 무참히 짓밟고 협박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갔습니다.
이런 회사의 만행은 85호 크레인 고공농성 중이던 김주익 지회장 동지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지회장이 목숨을 던졌는데도 회사가 문제를 풀 생각은 않고 투쟁을 장기화로 몰고 가자이번에는 곽재규 조합원이 4도크에 몸을 던져 회사의 비인간적 작태에 항거했습니다.
정리해고 싸움이 힘들다고는 하지만 조합원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 지키려 했던 열사들. 5년도 안 돼 또 비참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전 노동조합 상집이든, 대의원을 했던 이들이 구실을 삼아 조합원보다 먼저 살겠다고 파업대오에서 이탈해 갈 때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쩌면 이번 싸움은 더 힘들지 모릅니다.
공장 안은 텅텅 비어 있고 회장은 부산에 돈을 기부한다 하면서도 어렵다고 아우성을 떨고 있습니다. 조합원들은 또 피를 원하는지 단결력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일감이 없는 현장에 복귀해 회사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눈치 보며 다음은 누구 차례인가 걱정하고 짤리지 않으려고 관리자에게 가진 아양 다 떨고 노동조합은 있으나 마나 한 곳이 되어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가 85호 크레인에 올라온 이유는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악질 자본이든 떠나간 조합원이든 어느 날부터 갑자기 서로가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자기 이익만 따지게 된다면 그 우정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운명이라는 것은 그림자와 같아서 언제 우리들 삶에 끼어들어 서로를 갈라놓을지 모르기에 그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고뇌를 많이 느끼게 하는 세상입니다. 참고 인내하지 않으면 서로 이별이 많을 수밖에 없는 세상인 듯싶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 세상에 생각하면 한숨만 절로 나오는 세상, 등불 같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4차 희망버스 행사. ⓒ연합 |
- 4차 희망버스 전화 인터뷰 내용
송경동(시인)
사람들이 저에게 왜 이렇게 사냐고 묻습니다. 왜 한진중공업에 연대하게 되었냐고 합니다.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1차 때 돌아오는 우리들을 배웅하며 양말 한 켤레씩을 나눠주며 한없이 울던 한진중공업 가족대책위 분들의 눈물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일렬로 늘어서 우리에게 박수를 보내주던 그 소금꽃 노동자들의 붉은 눈시울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분노를 그 뜨거움을 복받침을 잊을 수 없습니다.
열다섯에 가출해 행상으로 버스안내양으로 시다로 용접공으로 해고노동자로 수배자로 한 평생 죄인으로만 살아오다, 한평생 짓밟히고만 살아오다, 한평생 남을 위해서만 살아오다 이제 기껏 오른 게 제 친구 김주익 열사가 목을 매단. 곽재규 열사가 몸을 던진 저 높은 85호 크레인 위밖에 없는 저 한 맺힌 여인을, 저 선배를, 저 서러움을, 저 억울함을, 저 분노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살아 온 나를, 그렇게 살다 스러져간 나의 친구들을, 나의 선배들을, 나의 동지들을, 우리 모두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마음 그대로입니다. 4차까지 그 길 함께 달려 온 아름다운 분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저 차벽을 넘어 새로운 민주주의의 광장을 여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김진숙이니 모두 잡아가보라는 뜨거운 연대와 투쟁의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백십 개 중대가 아니라 천백 개 중대가 와도 우리들의 이 존엄한 행진은 막을 수 없다는 결의를 보여주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사람의 꿈이 만인의 꿈이 되는 즐겁고 신나는 한 여름밤의 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진숙 선배가 그러한 것처럼, 박성호 김영제 신동순 정홍영 동지가 그러한 것처럼 저 역시 이 절망의 전선을 희망의 전선으로 바꾸기 위해, 제 삶의 크레인에 올라 저의 모든 것을 바쳐 싸우겠습니다. 너무 소중한 우리 깔깔깔 기획단 동지들과 함께 끝까지 웃으면서 물러서지 않고 더 넓고 아름다운 평등평화의 대지를 향해 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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