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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곤! 나는 그렇게 그를 만났다

[박노해 시인의 고 김병곤 추모시] '사랑은 끝이 없다네'

오늘(6일)은 민주화 투사 고 김병곤 형이 세상을 떠난 지 만 20년이 되는 날이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체포돼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구형 받은 뒤 "영광입니다"라고 외칠 정도로 강건한 투사였던 그는 1990년 12월 6일 몹쓸 병마에 의해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오늘 저녁 서울 프레스센터에서는 재야운동가 백기완 선생과 함세웅 신부 등 민주화투쟁 선후배들이 한자리에 모여 고인을 기리는 추모식을 갖는다. 특히 이 자리에서는 박노해 시인이 자신의 노동자 시절, 대학생 형인 김병곤을 만나 인간다운 사회를 함께 모색했던 인연을 회고하는 추모시 '사랑은 끝이 없다네'를 낭송한다.

이땅의 민주주의와 평화가 위기에 처한 지금, 민주화 투사 김병곤을 기억하며 이 시를 전재한다.<편집자>

▲민청련 활동 당시의 고 김병곤 씨. ⓒ연합뉴스

사랑은 끝이 없다네
故 김병곤 형의 20주기에

서슬 퍼런 군사법정에서 사형이 구형되었다.
스물한 살 청년의 최후진술이 시작되었다.
첫 마디가, "영광입니다!"

김병곤!

나는 그렇게 그를 만났다.
기름 묻은 신문 조각에서.
1975년 겨울이었다.
철야 노동을 마친 새벽 4시, 열여덟 노동자인 나는
공장 구석에 기대앉아 작업일지를 쓰다가
베어링을 싼 신문지에서 민청학련 사건 기사를 읽었다.
김병곤,
그 이름은 뜨거운 납활자로 내 가슴에 깊이깊이 아로새겨졌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기숙사를 빠져나와 뚝방촌을 지나 강변길을 걸었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어두운 겨울 시대에, 늘어 쳐진 육신의 공돌이의 운명을,
숨이 막힐 것만 같은 군사독재의 세상을,
나는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

밀린 월급을 달라고 동료들과 항의를 해도,
뿌연 먼지 속에 고장 난 환풍기를 바꿔달라 해도,
작은 친목계를 만들어 포장마차에 모이기만 해도,
너 빨갱이 도산세력 아니냐, 배후세력을 불어라,
취조실 바닥에 무릎을 꿇리고 각목이 날아들고,
한 번만 더 설치면 너 같은 무식한 공돌이는
삼팔선에 걸쳐 놓고 총으로 쏴 월북 처리하면 간단하다고
정보과 형사들은 조소를 던졌다.
고독했다.
언제 어디로 끌려가 소리 없이 개죽음을 당할지
두렵고도 억울했다.

대학생 친구가 필요했다.
김병곤, 그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작정 그를 찾아 여기저기를 헤매다 선이 닿았다.
1977년 겨울, 유명한 학생운동가인 김병곤 형을 만났다.
그의 나이 스물네 살, 나는 갓 스무 살 노동자였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 맑은 골짜기를 울리는 듯한 음성. 시원한 미소.

나는 비좁은 자취방으로 그를 모셨다.
정보 형사의 감시망을 따돌리고 소속도 없고 신분도 모르는
스무 살 노동자를 믿어주고 찾아준 것에 감사 인사를 드렸다.
연탄 구멍을 다 열어도 방이 추웠다.
솜이불을 둘러쓰고 먼동이 트도록 뜨거운 대화를 나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어떻게 민주화를 이룰 것인가,
시와 혁명은 통일될 수 있는가, 그는 진지하고 성실했다.
날카로운 논리력에도 가슴이 살아있었다.

공장에서 작업 일지를 기록하며 틈틈이 써온 나의 시와 단상들을 읽으면서
그는 때론 탄식하고 때론 눈물지었다.
그는 나에게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해방운동을,
총을 든 성자 까밀로 또레스 신부를, 레닌과 러시아 혁명을,
학생운동의 한계와 노동운동에 대한 기대를 빛나는 눈빛으로 들려주었다.
우렁우렁한 그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감고
처음 도착한 눈부신 설원의 지평을 걷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밝아올 즈음 그가 말했다.
"박형, 저랑 교회 좀 나가 볼랍니까?"
"예. 형과 같이라면요."
신분과 계급을 넘어선 '불꽃의 만남'이었다.

우리는 명동성당 부근 <향린교회> 청년부를 다녔고
병곤 형은 유명한 학생운동가와 재야 인사들을 소개시켜주었다.
든든했다.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닌 것이다.
나는 공장을 나와 병곤 형의 누님 집에서 함께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어떤 날은 병곤 형 친구들과 통행금지에 걸려 여관방에서
화투패로 위장한 채 격렬한 토론으로 밤을 지새곤 했다.
나는 뜨겁게 단 모래사막이 빗물을 빨아들이듯 새로운 지식과
운동의 역사와 유명 인사들의 경험을 흡수해 나갔다.
나는 산맥을 만난 산양처럼 민주화운동 집회장과 시위판을 뛰어다녔다.
새로운 인물을 만나고 나면 병곤 형은 늘 그 사람은 어떤 것 같아, 나직이 묻곤 했다.
그 형은 이론은 뛰어난데 걸음마다 책을 깔고 걷는 분 같은데요,
그 형은 가슴이 뜨거운 건 좋은데 머리까지 달아올라 있지 않나요,
저 형은 자신을 움직이는 동인이 우리와 좀 다른 것 같아요.
병곤 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어느 날 병곤 형의 권위 있는 선배 한 분이
"자넨 몇 달 바짝 공부해서 서울대 들어가지 그래.
소속을 갖고 조직을 쥐고 운동해야 힘있게 갈 수 있으니까."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침묵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병곤 형은 찡긋 눈짓을 하더니 슬며시 일어났다.
나도 따라 일어났다.
"맘 상하지마. 학생운동가는 넘쳐나잖아.
난 노동 현장에 가고 싶어도 이제 갈 수 없는데…"
"… 병곤 형. 몇 달 좋은 공부 많이 했으니 난 이제 현장으로 돌아 갈랍니다.
이쪽 동네는 형하고만 끈을 갖기로 하지요."
병곤 형과 나는 말없이 작별주를 마시고 오랫동안 포옹을 한 뒤 헤어졌다.

그 얼마 후 자취방으로 형사가 들이닥쳤다.
병곤 형이 구속 당했고, 종로 경찰서로 끌려간 나는
야전침대 각목으로 구타 당하고 협박을 당했다.
"김병곤이 빨갱이 발언한 걸 불어라."
"이제 넌 운동권에서 프락치로 몰려 맞아 죽는다. 넌 취업도 안 된다."
"미국 유학 보내줄 테니 법정에서 김병곤 이 빨갱이라고 증언해라."

아무 것도 불지 않고 피 멍이 든 몸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와
자취방에서 몸을 추스른 뒤 병곤 형 친구들을 찾아 나섰다.
싸늘했다. 이미 운동판에서 나는 프락치로 몰려있었다.
그렇게 좋았던 벗들이, 함께 싸우던 동지들이, 하루 아침에 등을 돌렸고
형사들은 수시로 찾아와 협박했고, 나는 몸을 숨길 곳도 의지할 곳도 없었다.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한 고립감. 배신감과 치욕감. 그만 죽어버리고 싶었다.

얼마 후 나는 검사 측 증인으로 법정에 세워졌다.
덕수궁 옆 법정을 가득 채운 운동권 친구들의 날카로운 시선과
곳곳에 자리잡은 형사들의 사나운 시선이 내 몸에 화살처럼 꽂혀왔다.
긴장된 법정에 단 두 사람만이 조용히 웃고 있었다.
붉은 포승 줄에 묶인 병곤 형과 증인석에 앉혀진 나.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말없는 말로 미소를 건넸다.
나는 검사의 음습한 언어에 명랑한 언어로 답했다.
그들이 병곤 형을 구속시키고자 유일한 근거로 기대한
나의 법정 증언이 병곤 형의 무죄를 입증하며 낭패로 돌아가자,
그들은 또 다른 조작된 명목으로 병곤 형을 구속시켰다.

병곤 형이 호송차에 오르는 순간,
형사들과 교도관들의 포위망 사이로 나는 소리쳤다.
"형, 내 걱정하지마. 난 결코 죽지 않아. 우리 다시 만나."
병곤 형이 짧게 외쳤다. "강해져야 해. 사라지지 마. 시를 계속 써야…"
병곤 형의 입이 틀어 막히고 호송차가 달려나갔다.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젖은 눈으로 애타게 서로를 바라본 푸른 불꽃의 만남이었다.
다음 해 나는 군대로 갔고 병곤 형은 80년에 또 구속되었고,
제대를 한 나는 노동 현장으로 들어갔고
병곤 형은 민청련에 들어가 또 구속되었고,
84년 현장에서 나는 얼굴을 숨긴 채 '박노해'라는 필명으로
≪노동의 새벽≫을 펴내고 기나긴 수배 길로 접어들었고
병곤 형은 87년 6월 항쟁 직후 또 구속되었고,
91년 내가 체포되어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기 전해인 90년,
병곤 형은 6차례의 구속으로 인한 치열한 생활 속에 위암으로 운명해야 했다.

나는 병곤 형과 세 번 만났다.
세 번의 '불꽃의 만남'이었다.
기름투성이 열여덟 노동자의 가슴에 새겨진 뜨거운 납활자의 만남으로
나는 어떻게 죽어가야 할 지가 결정되었다.
스물 한 살 김병곤 이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구형 받고 "영광입니다!" 외치는 순간,
군사독재 정권은 이미 금이 가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저들의 모든 어둠과 폭력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청년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한 순간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두 번째 만남은 스무 살 노동자와 스물네 살 유명 학생운동가의
어두운 골방에서의 '불꽃의 만남'이었다.
신분과 계급을 넘어 저 높은 곳에 있는 지식인이
가난하고 낮은 자리의 노동자 자취방을 찾아 들어
서로 배우고 서로 나누고 하나가 되었을 때
이 거대한 계급체제는 이미 균열이 시작된 것이다.

세 번째 만남은 저들이 우리를 파고들어 갈라 놓으려 했지만
끝내 가를 수 없는 하나의 영혼이 되어버린 사건이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추방당한 두 혁명가의 애타는 마지막 외침, 마지막 약속,
생을 두고 끝까지 지켜나갈 푸른 불꽃의 만남이었다.

병곤 형이 죽어간 다음 해, 나는 사형을 구형 받았다.
최후진술이 시작되었다.
"나는 노동자이자 시인이자 혁명가입니다."
나는 죽음 앞에서 '민들레처럼' 웃었다.
아니, 내 가슴에 새겨진 병곤 형이 "영광입니다!" 웃고 있었다.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시인이자 노동자이자 혁명가로
온몸을 던져 살아온 나는, 슬프게도, 길을 잃어버렸다.
실패한 혁명가로서 나는 정직하게 절망해야 했다.
정직한 절망이 진정한 희망의 시작이기에.
나는 자본권력의 세계화와 비즈니스 전쟁문명 앞에서
'근원적 독점'에 대한 저항과 대안 삶의 혁명을 추구해야만 했다.
긴 침묵과 정진의 시간이었다.

고독하지 않으면 혁명이 아니라고 했던가.
여전히 '빨갱이'로 돌멩이를 맞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여전히 '변절자'로 비난 당하는 고독한 시간 속에서
나는 문득문득 병곤 형의 마지막 외침을 듣곤 한다.
"강해져야 해. 사라지지 마. 시를 계속 써야…"
그리고 너무 힘들어 조금 더 현실에 맞춰 나를 변경시키려 할 때마다
몸 속에 남은 총알처럼 깊은 통증이 전해져 와 자세를 바로 잡곤 한다.
스무 살 시절 내 가슴에 박힌 '김병곤' 이라는 사랑의 총알이.

인생에는 그 무엇도 어쩌지 못하는 '불꽃의 만남'이 있다.
그렇게 우리들 첫마음으로 마주친 '불꽃의 만남'은
생을 두고 끝까지 완주할 사랑으로 남아 오늘의 나를 밀어가고 있다.
병곤 형은 이렇게 나를 남겨 두고 자신을 완전한 사랑으로 불살라
자신의 삶을 일찌감치 완주했다.
나는 아직도 내 삶의 완주를 다하지 못한 채
이 길 잃은 시대를 비틀거리며 나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동안 결코 지울 수 없는 불자국처럼
나의 존재는 그의 부재不在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형, 내 걱정하지마. 난 결코 죽지 않아. 우리 다시 만나."

이렇게 우리들 사랑은 끝이 없고, 살아남은 그대와 나,
우리들 사랑의 행진은 끝이 없으리.
아아 사랑은 끝이 없다네.
우리들 혁명은 끝이 없다네.

사랑은 남아

힘들게 쌓아올린
지식은 사라지고
지혜는 남아

지혜의 등불은 사라지고
여명이 밝아오는
정의의 길은 남아

정의의 깃발은 사라지고
끝없이 갈라지는 두 갈래 길에서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남아

사람은 사라지고
그대가 울며 씨 뿌려놓은
사랑, 사랑은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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