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으로 치밀한 조사와 추론이 요구되는 사건이 법정에 오를 경우, 법정의 긴장은 더욱 팽팽해진다. 많은 이들이 과학은 객관적이며 가치중립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 속으로 들어올 때, 각자가 다른 과학적 데이터를 내밀 때, 우리는 '법적인' 윤리를 끌어와야 한다.
법정과 과학기술, 어떻게 만나왔는가? 실라 재서너프의 <법정에 선 과학>(박상준 옮김, 동아시아 펴냄)은 미국의 사법 체계를 배경으로, 다양한 사례를 통해 법과 과학의 긴장 관계를 밝힌 책이다.
과학적 판단은 사회·정치적 판단과 긴밀히 맞물려 있다는 이 책의 문제의식을, 우리 사회에 적용해 보는 간담회가 열렸다. 지난 27일 저녁 7시 서울 중구 남산동의 한 카페에서 열린 이번 간담회는 '삼성전자 백혈병'을 주제로 금태섭 변호사, 홍성욱 서울대학교 교수(과학사 및 과학철학)가 멘토로 참여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활동가인 이종란 노무사와 산업의학전문의 공유정옥 씨도 함께 자리했으며, 사회는 <법정에 선 과학>을 편집한 박동범 동아시아 편집팀장이 맡았다.
이번 간담회에서 홍성욱 교수는 "과학에도 불확실성이 있다"며 "과학이 사회와 동떨어져서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공유정옥 씨는 "회사나 정부가 구성한 법적·과학적 사실은 자신들이 구성하고 싶은 사실"이라며 "그렇게 증명한 사실은 피해자의 권리를 배반하고 기업의 권리를 보호한다"고 지적했다.
그들의 말대로, 과학 역시 불확실성과 편향을 피해갈 수 없다. 또 삼성전자 백혈병 노동자와 관련한 소송에서 확실히 드러났듯, 노동자들은 과학적 정보에 접근하고 그것을 입증하는 데에서도 약자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회적 역학 관계 속에서, 사법부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인가? 이날 간담회가 던진 중요한 질문들이다. 다음은 간담회의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 왼쪽부터 금태섭 변호사, 공유정옥 산업의학전문의, 이종란 노무사, 홍성욱 서울대 교수, 박동범 동아시아 편집팀장. ⓒ프레시안(김윤나영) |
"삼성은 발암 물질이 없다는 증거를 내놓지 않았다"
박동범 : 삼성전자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들이 산업 재해를 인정해달라며 근로복지공단에 제기한 소송에서 일부 승소했다. 산재로 인정받기까지 사실관계를 내놓기가 쉽지 않았다.
누구나 인정하는 무언가가 '사실'이라고 하지만, 사실에도 갈등의 소지는 있다. 같은 사안을 놓고 두 가지 사실이 경합하기도 한다. 삼성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며 원고 측의 주장이 미진하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법적 사실을 인정하는 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자료나 조사 결과를 요구한다. 하지만 이게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되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삼성에서 주장하는 '과학성, 객관성, 합리성'이라는 용어나 정의가 유효한가.
공유정옥 : 업무상 질병이 백혈병이라고 치자. 전체적으로 산재보상보험법에서 요구하는 산재 보상 자격 기준이 세 가지다. 우선 백혈병을 유발할 것으로 보이는 물질에 노출돼야 한다. 둘째, 충분한 강도로 충분한 기간 노출돼야 한다. 셋째, 노출 유인과 백혈병이 인과관계가 알려졌거나 추정 가능해야 한다.
하지만 그 열거된 기준을 모두 충족하는 노동자는 한 명도 없다. 일단 (화학 물질을 사용한) 기록 자체를 남기는 회사가 없고, 측정도 안 한다. 하지만 1986년쯤에 나는 학교에서 벤젠으로 빨래하는 실습을 했다. 서울 시내 한복판 초등학교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산업 현장은 맨 마지막에 안전보건 문제가 다뤄지는 곳이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산업보건의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많은 기업이 벤젠을 썼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삼성과 정부는 첫째, 이 피해 노동자들이 백혈병 원인으로 알려진 벤젠이나 방사선 등에 노출된 증거가 없다고 한다. 방사선이 나왔더라도 자연방사선 수준이라 괜찮다고 한다. 또한 다른 수십 가지 화학 물질은 백혈병과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이 백혈병을 일으킨다고 알려진 물질에 노출됐는가. 삼성의 주장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없다는 근거는 제시하지 못한다. 삼성이 벤젠을 안 썼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삼성이 예전에 어느 회사의 어떤 제품을 샀는지 적은 구매 기록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화학 물질 제조사에서 성분을 담은 정보를 삼성에 제공한 게 있다. 그걸 공개해서 최소한 발암 물질을 안 썼다는 주장을 믿을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삼성은 영업 기밀이라며 공개하지 않았다.
삼성은 (발암 물질이 있다고 하더라도) 노동자들이 충분히 노출됐다는 증거가 없다고 했다. 삼성은 공장 내에 방사선을 측정했더니 자연 방사선 수준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수치는 정부 기관에서 삼성이 지정한 날에 삼성과 정부 관계자만 들어가 측정한 결과다. 또한 회사가 자체적으로 기록한 수치가 낮게 나오니 믿으라고 했다. 그렇게 세팅된 조건에서 과거 노출에 대한 우려를 충분히 불식시킬 수 없다. (이렇게 구성된 증거가 객관적인지는) 사회적 이슈이자 과학적, 정치적 논란이다.
마지막으로 한 라인에서 90여 가지 화학 물질을 쓰는데, 이것과 백혈병이 연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삼성이 말하지 않는 게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화학 물질 중에 독성이 제대로 연구된 게 얼마나 있을까? 미국에서 가장 많이 쓰는 100대 화학 물질을 연구했다. 6가지 주요한 독성 테스트가 다 이뤄진 것은 30퍼센트 정도밖에 안 된다. 절반은 단 한 가지도 독성 연구가 안 된 채 사용된다. 100대 화학 물질조차 그렇다. 발암성 물질 연구는 인체를 상대로 실험할 수 없다. 질병에 걸린 사례가 누적돼 오랜 세월에 걸쳐 보고되는 것이다.
삼성에 원인이 명확하게 규명된 질병은 현재 몇 개냐고 되물어야 한다. 원인이 규명된 질병은 극히 드물다. 암의 원인은 다요인설이 정석이다. 단일 요인과 단일 질병이 결합하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고, 대부분 질병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특정 화학 물질이 안전하다고 입증되기 전까지는 위험하다고 간주하는 '사전 예방의 원칙'에 따라 노동자를 보호하자는 주장이 내가 아는 과학이고, 보건학의 철학이다.
그렇다면 왜 화학 물질의 독성이 알려지지 않았나. 화학 물질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테스트가 안 됐나. 돈이 되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건의료는 치료에 골몰하지 원인을 찾는 데는 관심이 없다. 예방의학이 소외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방이 잘 되면 제약회사는 망한다. 그리고 정부는 테스트를 거친 후 시장에 나오도록 규제하지 않는다. 화학 산업이 있으니 그렇다.
회사나 정부가 구성한 법적 사실은 자신들이 구성하고 싶은 사실이다. 우리는 그렇게 증명한 법적 사실이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느냐? 누구를 위한 것이냐고 되묻는다. 과학적 사실은 절대 중립적이지 않다. 피해자의 권리를 배반하고 기업의 권리를 보호한다. 물론 나도 중립적이지 않다. 반올림의 과학자는 노동자들의 관점에 서기로 선택했다.
근대 과학이 부딪친 '불확실성'의 문제
박동범 : 두 가지의 합리성과 객관성이 충돌했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신뢰도 있는 설명을 받아들이고 채택해야 한다. 이런 접근을 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우리가 알던 과학에 대한 통념을 근본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그간의 논의 지형과 함의는 무엇인가?
▲ 홍성욱 교수. ⓒ프레시안(김윤나영) |
교과서에 나온 과학은 문제가 주어지면 과학적인 방법으로 깔끔하게 답을 낼 수 있다. 근대적인 과학관에서는 실험이 진리를 밝힌다고들 생각한다. 근대적인 과학관이 근대 법 체계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근대 법 체계는 사건에 대한 진리가 논쟁하다 보면 법정에서 드러날 것으로 생각한다. 실험을 통해 자연을 쥐어틀어서 자연의 비밀을 알아내듯, 법정에서 변호사 검사 논쟁하는 과정을 통해서 누구의 얘기가 진리인지 드러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근대 과학관이 20세기 들어 혼란을 겪었다. 20세기에 근대적인 과학관과 직면한 문제가 많다. 예를 들어 이산화탄소가 지구 온난화와 인과관계가 있느냐 없느냐는 논쟁이 있다. 여기에는 상당한 불확실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과학자가 많다. 어떤 요소가 어떤 확률로 암을 유발할지를 놓고도 불확실성이 많다. 당장 전자파가 뇌종양을 유발하는가에 대해서도 지난 30년간 세계적으로 관련 논문만 2만5000편이 나왔는데, 찬반이 나뉘어 있다. 최근 국제암연구소에서는 상관관계가 있다고 발표했지만 아직도 산업체에서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휴대전화뿐 아니라 고압선 전자파, 유전자 조작(GM) 작물이 위험한가 아닌가에 관한 연구가 수백 수천 개나 있지만 주장이 다 다르다. 합성착향료가 아토피를 유발하느냐 아닌지 등도 정반대의 의견과 실험 결과가 대립한다.
(복잡한 현실은) 가설을 세우고 이론을 만들어 실험으로 테스트해서 맞으면 맞고 틀리면 아니라는 식의 단순한 과학관으로는 설명이 잘 안 된다. 20세기 후반부터 어떤 종류의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현대 과학이 찾아낸 건 확실성이 아니라 불확실성이다. 데이터를 몰라서 생기는 불확실성, 방법론적 불확실성, 인식론적 혹은 존재론적 차원의 불확실성, 시스템 자체가 복잡해서 생기는 불확실성이 있다.
물론 모든 과학이 불확실하다는 건 아니다. 법정에서 확실한 논의가 있듯이 과학에도 그렇다. 핵심은 그렇지 않은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만 불확실한 영역을 마치 확실한 것처럼, 단순한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바꿔서는 안 된다. 불확실성을 무시하고 실험으로 사실을 확보할 수 있다는 건, 상당히 복잡한 논의를 단순하게 환원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불확실성을 무시하고 확실하고 근대적인 과학으로, 환원할 수 없는 걸로 환원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
"불리한 정보 은폐하면 기업에 불이익 줘야"
박동범 : 이번 판결과도 연결되는 것 같다. 2명은 백혈병과 작업 환경 사이에 확실한 관련성이 있다고 했고, 3명은 관련성이 약하다고 했다. 물론 판결 자체가 자의적인 판단일 수 있다. 그렇다면 판단의 기준을 어떻게 합의하고 만들어갈 것인가? 판결 과정이나 논지를 구성하는 데서 불확실성을 얼마나 다룰 수 있을까? 판결에서 불확실성이 어떻게 다뤄졌는지 정리해 달라.
금태섭 : 처음 사건이 나왔을 때 나는 2명이라도 이길지 전혀 기대를 안 했다. 워낙 전문적인 내용이라 입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법률가는 증거를 중시한다. 삼성 반도체에서 일하다가 백혈병 걸린 노동자가 오면 판사는 '감정에 끌려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 명씩 소송 걸었으면 질 확률도 높았을 것 같다. 그런데 감기도 아닌데 노동자가 똑같은 데서 2인 1조로 일하다 둘 다 백혈병에서 죽었다. 상식적으로 공장에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백혈병에 걸렸다고 봐야 하지 않느냐. 그 질문에 반론을 펴기 어려웠을 것이다.
노동자가 공장에서 어떤 화학 물질에 노출돼, 어떤 경위로 어떻게 걸렸는지 입증하는 건 불가능하다. 법원에서는 '상당 인과관계'라고 해서 개연성만 입증하면 원고의 손 들어준다. 입증하기는 어려워도, 두 사람이 동시에 걸리면 반증이 없으면 어느 정도 승소다.
패소한 고(故) 황민웅 씨는 1라인 5라인 세정 작업을 했는데 기각됐다. 노출은 맞지만 얼마나 노출됐는지 입증이 안 된다고 했다. 삼성 측은 "자동 설비를 해서 화학 물질은 담아서 넣어 놨다, 화학 물질에 노출될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수동 작업했다"고 주장했다. 삼성은 "수동 세척한들 (노출량이) 얼마 안 된다"고 했을 것이다. 황민웅 씨가 세정 작업을 얼마나 했는지 입증 안 되는 것처럼 얼마나 노출됐는지 입증할 수 없다.
▲ 금태섭 변호사. ⓒ프레시안(김윤나영) |
반면에 우리는 조사 과정도 비공개고, 만약 기업이 불리한 정보를 일부러 감춘다고 해서 크게 불이익이 없다. 삼성 측에서는 산재 때문에 노동자가 백혈병에 걸려서 죽어간다면 대외 신용도가 떨어진다. 정보를 숨기거나 공개하지 않았을 때 적정한 불이익을 주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또한 양측에서 조사하게 해줘야 한다. 피해자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노동자는 정보 접근권, 입증 책임, 소송의 성격 모두에 불리해"
박동범 : 사실을 어떻게 인정하느냐에 따라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문제는 달라진다. 과학적 판단을 하는 데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불확실성을 감추거나 숨기려고 할 게 아닌 것 같다. 서로의 불확실성을 인정하면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제도나 사회적 장치가 필요하다.
'삼성 백혈병 사건'에서 집단 소송을 해도 승소할 확률이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한쪽으로 쏠린다. 그렇다면 합리적인 합의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 불균형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해보자.
이종란 : 산재를 당한 노동자에게 입증 책임이 있다. 입증하려면 적어도 회사에서 무슨 물질 쓰는지 회사가 아는 만큼 알려 달라고 했다. 혹은 정부에서 조사한 기록이라도 보여 달라고 했다. 하지만 행정정보공개청구를 수없이 해도 정부에서조차 비공개 처분을 받았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라는지 앞이 캄캄하다. 증거의 편재다. 정보량이 하늘과 땅 차이다. 삼성은 모든 걸 다 가지고 우린 아무것도 없었다.
두 가지가 억울하다. 첫째, 영업 기밀에 가로막혀서 아무런 정보도 제공 못 받는 것, 둘째, 산재 신청하면 조사 단계에서 회사나 정부에서 내는 자료를 재해 노동자가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재해를 당한 노동자는 자기가 어떻게 일했는지 스스로 제일 잘 알고 있는데, 조사관은 조사만 할 뿐이다. 어떻게 조사되고 있는지에 대한 피드백도 없다. 조사 결과에서 사실관계가 완전히 잘못될 수 있는데, 노동자들은 불승인 처분을 받을 때까지 그조차 확인 못 했다. 이 두 가지를 해결했으면 한다.
공유정옥 : 미국 소송에서는 노동자가 회사의 잘못을 묻기 위해 소송을 건다. 인과관계를 따져서 (작업 환경과 직업병 사이에) 연관성이 나오면 회사가 민형사상 책임을 지게 돼 있다.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 모든 노동자에게 보장된 4대 보험, 그중에서도 산재 보상의 권리를 '연관성이 나오지 않으면' 박탈한다. 진실을 밝혀서 누구에게 책임을 묻고 벌하거나, 그렇지 않아서 기업이 벌을 면하는 게 아니다. 입증하지 못하면 약자가 권리를 뺏긴다. 약자를 위해 만든 제도인데, 노동자에게 "너는 이 제도의 혜택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한다. 입증할 사회적 자원이 없는 사람에게 입증 책임을 지라고 해서 노동자에게 아주 많이 불리하다.
삼성만이 아니다. 전자 업체에 다니는 노동자들은 대개 고등학교 3학년 때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려고 입사했다. 병 걸린 노동자, 죽어가는 노동자는 변호사가 없어서 소송도 못 한다. 아주 기우뚱한 제도를 만들어 놓고서 (정부나 기업 측은 산재 인정 기준을 완화하면) '도덕적 해이'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금은 한쪽으로 유리하게 쏠리는 경우가 90%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업무상 질병 중 특히 암은 1년에 6~7명만 인정된다. 산재를 인정받은 경우가 전체 직업성 암 추정치의 0.1%다. 유럽에서는 10%밖에 안 된다고 난리가 나는데 우리는 직업성 암을 인정하는 비율이 유럽의 100분의 1도 안 된다. 통계로만 보면 마치 대한민국 노동자들은 암에 안 걸리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에 유독 암에 걸린 노동자가 적은 게 아니라, 제도나 법이 (약자인 노동자의 재해를 보상한다는) 자기 구실을 할 수 없게 만들어져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
홍성욱 : 집 옆에 쓰레기장이 있어서 건강이 나빠졌다고 하자. 피해자가 쓰레기장에서 다이옥신이 나와서 건강이 나빠졌다고 증명할 게 아니라, 쓰레기 소각장 주인이 그렇지 않다는 걸 입증해야 한다. 산재 관련된 논의에도 비슷한 정신과 철학이 적용될 수 있지 않나. 산재 당한 사람이 유독한 환경에서 당한 것 같다. 그런데 노동자가 인과관계를 입증하라니. 산재 당한 사람이 입증하는 게 지금 한국 사회가 추구해야 할 사회적 정의인지 밑바닥에서부터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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