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보고서를 대중에게 공개해야 한다." (공유정옥 산업의학 전문의)
'삼성 백혈병' 사건과 관련해 삼성전자가 기자들에게 발표한 '반도체 근무환경 재조사 결과'에 대해 전문가들이 내린 평이다. 이들은 "조사 과정이나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는다면 (삼성이 내린 결론만 가지고는) 더는 새로운 논의를 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삼성전자는 14일 경기도 수원에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 사업장에서 '반도체 생산라인 근무환경 재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미국 보건안전 컨설팅 회사인 인바이런(Environ)이 삼성전자의 의뢰를 받아 지난해부터 1년 동안 조사한 결과다. (☞관련 기사: 삼성 백혈병 논란의 중심, '인바이런'은 어떤 회사?)
▲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 사업장에서 '반도체 생산라인 근무환경 재조사'를 발표하는 미국의 안전보건컨설팅 회사 인바이런 직원들. ⓒ삼성전자 |
인바이런은 "제조라인에서 (위험한 화학물질의) 노출수준이 기준보다 낮았다"며 "노출 위험은 일상적으로 잘 관리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인바이런은 10% 이상의 노출이 추정되는 분야에 대해 600개가 넘는 시료를 채취했다고 밝혔지만, 어떤 물질에 얼마만큼 노출을 측정했는지에 대한 세부 내역은 알리지 않았다.
또한 백혈병 등에 걸린 노동자 6명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 "과거 삼성전자 반도체 라인에서 근무한 백혈병 발병 노동자와 작업환경은 상관관계가 없다"고 발표했다. 인바이런의 프래드 볼터 박사는 "6건의 발암 사례 중 4건은 발암물질에 전혀 노출이 안 됐고, 나머지 2건에 대해서는 노출은 있었으나 실제 위험을 증가할 정도보다 현저히 낮았다"고 말했다.
화학물질에 어느 정도로 노출이 됐느냐는 질문에 인바이런은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시간 관계 상) 전부 말씀드릴 수는 없다"면서도 다만 "미국산업위생협회에서 규정한 유의미한 기준을 따랐다"며 조사가 객관적으로 이뤄졌음을 강조했다. 나머지 데이터를 열람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삼성과 체결한) 계약서는 기밀사항이다. 보고서는 초안 형태로 나와 있다"며 "이후 삼성이 어떻게 공개할지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백도명 교수 "실제로 측정된 자료는 전체의 '5분의 1'에 불과"
2009년 삼성을 비롯한 반도체 사업장의 위험성을 평가했던 백도명 서울대학교 교수는 "(인바이런은) 평상시의 작업 환경을 평가했는데, 문제는 평상시 작업이 아니라 라인을 깔고 대량 생산하기 전에 초기 (수동) 작업 환경에서 나타났다"며 "평상시가 아니라 최악의 상황(the worst case)에 대한 평가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단지 현재 (공장에) 들어가서, 과거의 자료라고는 하지만 삼성이 제공해 준 자료를 바탕으로 측정했다. 그 결과 노출이 낮아 보인다는 결론이다. 하지만 과거의 측정이 제대로 됐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과거의 다른 문제점은 보지 않았다. 평상시가 아니라 최악의 상황에 대한 평가는 하나도 없으면서, 정상적인 작업 환경으로 평가해서 문제가 없다는 주장은 큰 의미가 없다."
백 교수는 이어 "삼성의 과거 10년 전 자료로 파악되는 물질 중에 실제 작업 환경이 측정된 건 1/5밖에 안 됐다"며 "나머지는 측정이 안 됐거나 측정하지 못했다. 상당히 많은 물질이 자료가 없다"고 꼬집었다.
"작업환경 측정에서 100가지가 넘는 물질을 측정하게 돼 있는데 다 측정하는 경우가 없다. 실제 측정 자료는 1/5밖에 없다. 모든 대상이 측정되지도 않았고, 측정 대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도 불순물이나 부산물은 전부 고려되지 않았다."
"객관적 조사 없이 홍보영상만 믿으라고?"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에서 활동하는 공유정옥 산업의학 전문의도 "회사는 작업 환경을 잘 관리했다고 하지만, 서울대 조사보고서에서 '2009년 조사 당시 사용한 화학물질 중에 회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발암물질이 있었다'고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서울대 보고서에서) 2009년에 사용한 화학물질 90여 종 가운데 회사가 성분을 확인했던 것은 단 한 건도 없었다고 보고서에 나왔다"며 "(인바이런은) 발암 물질 노출을 평가하면서 과거 사용물질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노출을 재구성했다고 했는데, 데이터가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회사의 자료를 근거로 했다면 이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건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다.
백 교수는 "이번 조사는 삼성 사업장에 백혈병을 비롯한 희귀질환이 발생한 원인을 조사하고 규명하는 작업과는 거리가 멀었다"며 "이해당사자나 (당사자의 작업 환경을) 검증할 수 있는 사람이 들어가는 식으로 조사 과정이 객관적이어야 하는데, (조사 과정에 대한 공개 없이) 인바이런 홍보 영상만 보여준다고 해서 그걸 믿으라는 건 이상한 얘기"라고 쓴 소리를 했다.
"안전보건에 우선하는 영업기밀은 없다" vs "코카콜라도 레시피 공개 안 해"
그는 "안전보건에 우선하는 영업기밀이란 없다"며 삼성전자 측이 사용했던 화학물질 내역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미국에서는 (기업에서 쓰는 물질 때문에) 사람이 죽는 문제가 있으면 기업 측이 영업기밀이라고 주장해도 그 물질이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는 판례가 있다"며 "영업 기밀의 범위에 안전보건 자료가 들어가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보고서 전체를 공개하는 방안에 대해 권오현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 사업총괄 사장은 "코카콜라는 자사 레시피를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 영업기밀이기 때문"이라며 "우리도 영업기밀이 있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는 화학물질이 있으므로, 공급업체와 우리(삼성전자)의 영업기밀을 제하고 공개하겠다"고 답변했다.
그는 또한 "1960년대 라인이나 지금 최첨단 라인이나 쓰는 화학물질은 거의 비슷하다"며 "전 세계적으로 수백 개 반도체 라인이 쓰는 화학물질도 거의 대동소이하다. 반도체 공정은 삼성만 특별하지 않다"고 말했다. 반도체 공정에서 전 세계적으로 비슷하게 쓰이는 화학물질 사용 내역이 거의 대부분 영업기밀인 이유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1심 법원 "삼성 반도체 작업환경과 백혈병, 상관 관계 있다"
한편, 지난달 23일 법원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와 유가족들이 산재를 인정해달라며 낸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삼성 측의 주장과는 달리, 법원은 백혈병과 반도체 작업 환경이 상관 관계가 있다고 판결했다. 근로복지공단은 지난 12일 반올림과의 면담에서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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