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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전쟁 진짜 무대는 실험실 아닌 법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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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과학전쟁 진짜 무대는 실험실 아닌 법정이야!

[프레시안 books] 실라 재서너프의 <법정에 선 과학>

법정은 과학기술과 어떻게 말날 수 있고 만나야 하는가. 법률가는 과학 지식이나 의료 지식을 얼마나, 어떻게 수용해 판단을 내려야 하는가. 역으로 법정에서 채용되는 과학기술은 일반인의 소비, 출산, 건강 그리고 윤리적 판단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실라 재서너프의 <법정에 선 과학>(박상준 옮김, 동아시아 펴냄)은 이러한 질문을 풍부하고 또 과감하게 다루고 있어서 반가운 책이다. 원제(Science at the Bar)를 번역한 제목 "법정에 선 과학"은 마치 법정에서 심판을 받는 대상이 사건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데, 책의 내용을 살펴보니 실로 적절한 번역이 아닌가 한다.

▲ <법정에 선 과학>(실라 재서너프 지음, 박상준 옮김, 동아시아 펴냄). ⓒ동아시아
한국에서도 새만금 간척 사업, 황우석 사태 등을 통해 환경영향평가, 줄기 세포, 인공 수정 등과 같은 과학기술 문제들이 사법적 탐문을 비켜갈 수 없다는 사실이 그리 새삼스럽지 않다. 재서너프는 주로 미국 법원의 예를 통해서 과학기술 쟁점들이 법적 판단과 맞물리는 지점들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다양하고 미묘하다는 것을 솜씨 있게 보여준다.

제조물 책임에 있어서 그 책임의 입증과 분배에서, 의료 과실 배상 청구에서 환자의 질병과 과실 간의 인과관계 규명에서, 유독 물질과 질병 간의 관계에 관한 환경 소송에서 전문가 진술과 자연과학적 기술은 법정의 판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파트너가 되어 왔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과학적 지식을 '어느 정도 또 누구의 관점에서' 채택하고 선택하는가는 늘 명확하지 않았다.

재서너프는 미국 법원에서 증거력 여부를 결정할 권한은 법원이 가지면서도 과학자에게 그 결정을 위임하기 위한 기준들을 실험해 왔다고 진단한다. 전문가들의 합의를 존중한다는 기준은 1923년 살인 혐의를 둘러싼 프라이 형사 사건에서 마련된 기준처럼 "법원은 잘 알려진 원리나 발견으로부터 추론된 전문가 증언을 인정하는 데 먼 길을 가야 하겠지만, 그 추론의 근거는 해당 분야에서 일반적으로 용인돼왔던 것이라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어느 정도의 동의가 충분한 것인지, 또는 그 동의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

사실 재서너프가 착목하는 지점은 이 미결정 영역, 즉 자연과학이 사회 규범과 만나는 일종의 균열지점에 있기에 이 책은 더 흥미롭다. 이 점에서 그의 법 연구가 학제적 접근 내지 다학문성임이 드러난다. 그는 현재 미국 하버드 대학 케네디스쿨의 과학기술과 사회 프로그램을 총괄하고 있으며, 과학과 국가를 주된 연구 관심으로 하면서, 과학기술학, 비교정치학, 법과 사회, 정치와 법인류학, 정책 분석을 가교하는 연구를 왕성하게 수행해 왔다.

재서너프는 과학적 원칙을 법원에 적용할 때 생겨나는 미결정 영역이 법원과 과학 지식 간의 논리나 목적의 차이에서 생겨날 뿐 아니라, 과학계의 이념형과 실제로 전개되는 '사회 속의 과학'에서 발생한다는 중요한 지적을 한다. 이 점에서 법원은 과학의 사회적 문젯거리들 내지 과학의 사회학이 그것을 통해 노출되는 제도가 되는 것이다.

역사적 극장으로서의 법원(Austin Sarat)은 이제 과학 지식 체계의 갈등이 노출되는 무대가 된다. 법원은 여기서 과학 세계, 그 지식 생산 체계의 내부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재서너프는 그러한 개입을 과학자 또는 과학 연구 기관의 부정 행위, 연구 결과의 부실 표기와 배임, 동료들의 부실 평가, 그리고 실험 대상물 학대 등에서 발견한다. 또 근대 과학의 특권적 지위에 대한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반발로 인하여 정치적인 중요한 소송이 제기될 때에서 찾고 있다. 이러한 분류 자체에서 그의 내공이 묻어난다.

먼저, 법원의 어려움은 과학자 공동체가 가진 과학적 연구 관련 규범 그리고 과학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모른다는 점이다. 재서너프는 미국 법원이 일차적으로는 자율성에 관한 과학계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그것은 법체계의 실질적 절차적 이해관계 등 법 스스로의 자율성과 상충하지 않는 한에서만 그러하다고 한다.

불법 행위 입증도 다툼의 영역이 과학기술로 넘어 오는 탁월한 사례가 된다. 예컨대 특정한 유해 물질이 발병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대단히 까다로운 일이다. 어떤 유해 물질의 노출로 인해 1000명 중 1명에게 암을 유발한다는 연구가 100명을 대상으로 한다면 그 상관성을 입증하지 못할 것이다.

과학 연구는 (그것은 사회과학의 경우에도 그러한데) 기껏해야 '일반적 인과관계'와 관련된 쟁점만을 입증한다면, 원고는 '특수한 인과관계'의 증명을 요청받는다. 즉 특정 화학 물질이 그 또는 그녀에게 발생한 특정 질병의 원인이라는 사실 말이다. 재서너프는 이런 상황에서 법원에 제기되는 쟁점은 그 성질상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라는 점을 통찰한다.

즉 법원은 어떻게 사실을 인정하느냐 자체보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확인하지 못하는 사회의 무능력으로 빚어진 비용을 누가 부담하느냐 바로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과학적 불법 행위 사건에 개입을 함으로써 법원은 과학 공동체에 사법적으로 수용 가능한 행위 규범을 접붙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된다.

재서너프는 여기서 과학적 지식이나 과학자 커뮤니티에 법원의 개입과 판단은 당대의 정치 사회적 맥락 속에 있었다는 지적을 잊지 않는다. 이 책이 형식적으로는 의학, 화학, 공학과 같은 기술과 과학 영역을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법적 판결과 추론에 대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시선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법사회학을 강의하는 내게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이 책의 8장 ('우리가 모르는 가족')에서는 자연과학의 사회성이 한층 더 부각된다. 1987년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베이비 M(Baby M) 사건은 재생산 기술의 발달의 '사생활 영역'에 들어온 경우이다. 메리 베스 화이트헤드는 임신 기간 중 아무 연분도 없는 월리엄 스턴과 계약을 하고서, 이 계약의 대가로 1만 달러와 임신 중 모든 의료비를 지원받았다.

그러나 화이트헤드가 아기 M을 낳고 나서 윌리엄 스턴과의 계약을 이행할 수 없다고 하자, 양육권을 둘러싼 전쟁이 개시되었다. 법원은 여기서 모성에 대한 생물학적 모델과 사회적 모델 간에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결국, 법원은 수많은 해당 뉴저지 법률과 입양과 부모권에 관한 공공 정책과 충돌하기 때문에 대리모 계약을 무효라고 결정하면서 스턴의 입양권을 인정하면서도, 화이트헤드의 모권을 회복시키고 아기를 계속 방문할 수 있도록 결정하였다.

이 사건에서 부모의 생물학적이자 사회적인 의미가 경합하였고, 법정에 들어서지 않았던 수많은 시민들에게 가족과 출산, 어머니됨과 아버지됨에 대한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돌이켜 보면 미연방 대법원에서 여성의 낙태 권리를 프라이버시권의 일부로 선언했던 '로 대 웨이드' 판결(1971년)은 낙태권의 인정 뿐 아니라 생명과 태아의 의미와 구분, 여성에게 낙태 권리가 가지는 성적이고 사회적인 의미 등을 조명하였다. 이는 미국인의 성생활과 여성의 신체 통합성 그리고 가족 구성에 있어 인식적 가이드라인을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프라이버시 권리의 이름으로 자유를 부여받으면서 정부는 사생활에의 법률적 개입을 단행한 것이리라.

법원은 임신 만 9개월을 3분의 1씩 나누었고, 삼분기법을 고안했던 바, 각 분기별로 주 정부는 낙태에 대한 상이한 접근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마지막 3분기가 시작하는 임신 만 6개월부터 주가 낙태를 금지할 수 있는 근거는 의료적 관점에서 본 태아의 '모체 밖 생존 가능성(viability)'에 있다.

그런데 만약 태아의 모체 밖 생존 가능성이 향후 만 5개월 내지 4개월로 앞당겨 진다면, 법원은 낙태 금지 시기 역시 더 앞당겨야 하는 것인가. 낙태 사안은 태아의 생명과 임부의 생명 신체 그리고 권리라는 때로는 상충하는 가치들을 다루어야 한다는 점에서, 의료적 결정만도 사회적 결정만도 아닌 규범적 결정이라는 최종적 판단을 남긴다. 이 점에서도 법학이 종합 학문으로서의 자기 본분을 다해야 할 필요성을 발견한다.

뿐만 아니라, 존엄사와 같은 생명 문제 역시 법의 잣대를 비켜가지 않는다. 의료 기술의 발전은 인간 생명을 더 연장시켰지만 한 인간이 생명을 연명하기 위해 해볼 수 있는 치료 목록을 늘려놓음으로써 당사자와 유족의 선택의 권리와 의무 또한 증가시켰다. 재서너프는 환자가 존엄하게 죽을 권리뿐만 아니라 의료 비용의 폭발적 증가라는 경제적 관점, 그리고 노령 인구의 증가라는 인구적 측면도 조명한다. 이제 한국에서도 '생명의 질' 접근이라 하여 죽음 대 삶의 이분법이 아니라 삶의 연속적 측면을 인정하고 그 무게와 경중을 (인간의 합리성으로 다 잴 수는 없지만) 판단하여 그 훼손(예컨대 배아 훼손과 살인죄의 차이와 같이)에 대한 과정적 접근을 취하고 있음도 주목된다.

일반적으로 근대 법은 형식적 합리성의 구현으로서 실체가 아닌 절차적 규약으로서 이해된다. 콘텐츠의 합리성 판단은 전문가의 몫으로 남기거나 삶의 공동체의 의미 문제로 남겨두어 나름의 '합리성들'을 질식시키지 말 것이다. 재서너프의 이 책은 이러한 법사회학적 문젯거리 내지 법과 과학기술 공동체 간의 관계 설정에 대한 복잡한 고민거리에 대한 풍부한 사례들을 제공한다.

재서너프는 단지 소극적인 절차적 조정자보다 적극적이고 정치적인 법원의 역할을 발견하고 웅변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사실의 판단'의 문제를 자주 '사실의 구성'으로 언급하고 있다. 앞서도 지적했든 사실 인정은 규범적이고 정치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의약품과 환경, 이외의 전문 기술에 대한 전문가 증언(expert witness : 감정)은 미국 법원에서 빈번히 채택되었고 당연히 소송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과학기술 지식은 다시 대기업이나 재산가들에게 유리하게 해석되고 채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는 것을 그는 지적한다(제3장). 여기서 그는 법정을 통한 지식 구성론 내지 지식 권력론을 구사한다 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을 담은 재서너프의 책은 사법 개혁이 한창 진행 중인 한국에서도 큰 울림이 있다. 법조인 선발 제도의 개혁, 즉 사법 시험에서 법학전문대학원으로, 국민의 사법 참여와 법조 일원화와 같은 사법 개혁의 큰 줄기는 모두 법과 사회의 활발한 교류를 지향하고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는 사법 제도를 추구한다.

국민의 사법 참여(배심제)가 그것을 요청하고 있고, 로스쿨의 다양한 출신들이 과학적 지식으로 자신의 변론을 조탁할 것이다. 이와 함께 법원에서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의 청취와 개입은 점점 더 커지고 중요해질 것으로 전망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수는 재판의 잠재적 당사자인 국민들의 법원에 대한 요청이 아닐까 한다.

<법정에 선 과학>은 법정에 제기하는 시민들의 법의 활용과 전문가 집단에 대한 권리 의식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동시에 이런 판결 자체가 시민들의 과학 언어 구사 능력(scientific literacy)을 대단히 높여줄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편, 한국의 현실을 돌아볼 때 사회과학적이고 자연과학적인 사실을 좀 더 치열하게 논하게 될 법원이 기대되지만, 이와 함께 한국에서는 법 언어 구사 능력(legal literacy)에 대해서 고민이 된다. 이 책에서 인용된 수많은(어쩌면 너무 많은) 판례들은 흥미롭지만 그 법적 맥락이나 논리를 잘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법정은 사실만을 가지고 판단하는 곳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법의 적용을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한국의 법과 사회의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 나는 무엇보다 시민들의 법 언어 사용 능력의 증진과 함께 '아래로부터의 법학'이라는 패러다임 구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법정에 선 과학>은 열려 있는 지식의 보고이자 구성자로서의 법정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책이면서, 일반인에게 '말을 거는' 법학 저술이 희소한 한국의 현실에서 더욱더 반가운 역서이다. 이 책을 놓는 순간 법학을 공부하고 싶어질지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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