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살 난 아들 정종현 군을 떠나보낸 부모의 사연을 소개한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빈크리스틴' 오용 의료사고라는 해석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정 군의 어머니인 김영희 씨는 아들을 치료한 병원과 의사의 처벌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저 '진실'이다. 아들이 왜 죽었는지를 알고 싶다는 게다.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드는 의료소송에 나선 것도 그래서다.
그리고 김 씨는 의료사고가 제대로 드러나는 걸 가로막는 제도 역시 고치고 싶어 한다. 사고 입증 책임이 환자에게 있는 구조에선 사고는 늘 감춰질 수 밖에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런 뜻에 따라 고(故) 정종현 군을 치료한 병원과 의사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독자들이 '사고를 낸 게 누구인지'보다 '사고의 진실이 어둠에 파묻히는 구조'에 더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게 유가족의 바람이다. <편집자>
그날은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아이는 신이 나서 컴퓨터 게임을 했다. 옥상에 가꾼 텃밭에 수시로 올라가 상추에 물을 줬다. 할 일이 없어지자 물총을 하늘에 쏘면서 떨어지는 물을 맞고 놀았다. 옥상에 해가 많이 들어서 놀기 좋은 날이었다.
2010년 5월 19일은 아이의 마지막 공식 유지 항암 치료 일정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전날 아이의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았다. 원래는 2박 3일간 입원해야 하지만 완치를 거의 앞둔 까닭에서인지 그날만은 주치의도 외출을 허락해줬다.
병원을 벗어나 상추에 물을 주고 같은 반 친구와 놀고 난 아이는 친구 엄마에게 말했다. "너무 재밌어요. 나중에 나와서 준형이(가명)랑 또 놀아도 돼요?" 친구 엄마가 대답했다. "그래 놀아라." 아이 엄마는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그 후로 아이는 영영 준형이와 놀 수 없었다.
▲ 2009년 7월. 당시 8세였던 정종현 군. ⓒ김영희 |
죽음
5월 19일 밤 10시. 9살 난 정종현 군은 백혈병 치료에 쓰이는 마지막 항암제 주사를 맞았다. 척수강에 놓는 '시타라빈'과 반드시 정맥 안에만 놓아야 하는 '빈크리스틴'이라는 항암제였다. 정 군은 이 항암제들을 2007년 10월부터 3년에 걸쳐 맞아왔다.
하지만 주사를 맞은 지 6시간 만에 정종현 군은 갑자기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엉덩이가 잡아 뜯는 듯이 아프다고 했고 배에 열이 올랐다. 마지막 치료를 받은 지 이틀 만에 하반신 마비가 왔고 증세는 점차 전신으로 퍼졌다. 이틀이 더 지나자 의식을 잃더니 결국 5월 29일 새벽 1시에 세상을 떠났다.
부모는 새벽 1시에 정종현 군을 안치실에 보냈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3년에 걸친 공식 항암치료의 마지막 단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정 군의 아버지 정경채 씨는 "시타라빈을 한 번 맞은 것도 아니고 (3년 동안) 12번째 맞았다. 그전까지는 아무 문제 없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갈 수가 있느냐. 혹시 빈크리스틴과 시타라빈 주사가 뒤바뀌어 빈크리스틴이 정맥이 아닌 척추로 들어간 것 아닌가"라고 의심했다.
빈크리스틴과 시타라빈은 둘 다 무색의 투명한 액체로 육안으로는 구별되지 않는다. 부모는 당시 빈크리스틴과 시타라빈이 둘 다 각각 주사기 안에 들어있는 것을 봤지만, 병원의 지시에 따라 주사를 놓는 동안 밖에 나가있었다고 했다.
화장
5월 31일. 부모는 아이를 화장했다.
"너무 아팠던 앤데, 단지 누군가의 잘못을 밝히기 위해서 부검하지는 말자고 했어요. 잘못을 밝히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부검이라면 사건을 덮을 각오도 했어요. 부검하는 게 또 다시 (아이의 몸에) 해를 입힌다고 생각했어요. 한 때는 부검 안 한 걸 후회도 했어요. 그런데 마지막 입관할 때 종현이 얼굴이 너무 예뻤어요. 평생 그 예쁜 얼굴을 기억할 수 있으니 지금은 부검 안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해요."
정 군의 어머니 김영희 씨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김영희 |
의혹
병원 측은 "빈크리스틴은 정맥에 제대로 투여됐고, 척수강에 놓은 시타라빈의 부작용으로 뇌수막염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유가족은 "정맥에 놓아야 할 빈크리스틴과 척수강에 놓기로 한 시타라빈이 서로 뒤바뀌었다"고 주장했다.
김 씨는 "6월에 빈크리스틴 관련 논문을 보고 의료사고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빈크리스틴을 정맥이 아닌 척수강에 잘못 투여할 경우 환자는 중추신경계에 손상을 입고 전신마비가 일어나 열흘 안에 사망한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됐다. 정종현 군의 마비 증상 등은 빈크리스틴이 척수강에 들어갔을 때의 부작용과 모든 점에서 일치했다.
정 군과 유사한 증상으로 사망한 백혈병 환자들의 사례도 몇 차례 있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빈크리스틴 부작용'이 이슈가 되기도 했었다. 부모는 이같은 의혹을 제기하며 병원에 찾아가 몇 차례 면담을 했지만, 병원에서는 이렇다 할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정경채 씨는 정 군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알고 싶다고 했다.
김 씨는 "(아이가 살아있을 때) 척수액으로 성분 검사를 했으면 척수에 빈크리스틴이 들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었다는 생각은 나중에서야 떠올랐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아이가 아무리 아파도 당연히 회복하리라고 생각하고 병원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깨달았을 때 정종현 군의 척수액은 이미 폐기 처분되고 없었다.
▲ 2010년 4월. ⓒ김영희 |
소송
9월에 소송이 시작됐다. 김 씨는 백전백패에 가까운 승소율이 힘들었다고 한다. 주변에서는 무조건 진다고 만류했다. 김 씨는 아무리 힘들어도 소송은 계속할 것이라고 했지만, 담당자의 처벌은 바라지 않았다. 다만 다시는 이런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의료사고가 나더라도 병원과 유가족이 조용히 넘어가면 세상에 알려질 수 없다"며 "소송에서 져도 이 사고가 세상에 알려지고 시스템이 고쳐지면 의미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빈크리스틴 사고를 (저희가 미리) 알기만 했어도 막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사고가 일어나도 밖으로 알리지 않고 조용히 합의하고 끝내면 그 다음 희생자가 계속 나올 겁니다. 그게 너무 가슴이 아파요.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게. 그래서 알리자고 결심했어요. 나도 내 앞에서 누군가가 이렇게 해줬으면 좋았을 겁니다.
우리 사회는 받은 만큼 고통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는 아무 것도 안 바뀐다고 생각해요. 아무런 처벌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종현이가 저렇게 간 것은 인정해줬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보내기엔 너무 아까운 아이였어요."
부모는 빈크리스틴과 다른 항암제 주사를 같은 날 맞을 수 없도록 하고, 빈크리스틴을 주사할 때는 숙련된 의사와 간호사가 여러 차례 확인 작업을 거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종현 군 사망 사건에 대한 공식 입장을 묻자 병원 측은 "법정 대리인끼리 의견이 오가고 있다"며 "재판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답변하기 어렵다"고 했다.
"의료분쟁 조정제도, 의료사고 공개는 좋지만 입증책임은?" 의료 분쟁이 났을 때 전문지식이 없는 환자 측이 의료진의 과실을 입증하기란 쉽지 않다. 이번 사건에서 원고 측 변호를 맡은 신현호 변호사는 "의료 소송은 밀실성, 자료 편중 가능성, 조작 가능성, 전문성 때문에 어렵다"고 말했다. 신 변호사는 "모든 의료분쟁 소송에서 병원이 유리하다. 증거가 한쪽으로 편중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병원이 과실을 인정하기 어려운 구조도 있다. 안기종 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병원의 잘못이 법원에서 밝혀진다면) 의사는 업무상 과실치사로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고, 의사 자격증도 박탈된다"며 "의사는 돌파구가 없으니 끝까지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안 대표는 내년 3월에 도입되는 '의료분쟁조정중재원' 제도에 기대감을 내비쳤다. 이 제도가 의료사고에서 비롯되는 환자와 의사의 부담을 모두 덜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환자 측은 평균 2~3년이 걸리는 분쟁 기간을 120일로 줄일 수 있고, 의료진 측은 합의가 이뤄지면 형사 처벌을 면할 수 있다. (☞관련 기사 : "<하얀 거탑> 속 의료사고 피해자, 기댈 곳 생겼다") 안 대표는 "(환자 측이 형사 처벌을 원하지 않는 한에서) 중재원은 환자와 의사간에 완충 역할을 할 수 있다"며 "사망 사고가 났을 때도 중재원이 사건을 공개해 미래의 사고를 막을 수 있다"고 평했다. 김 씨도 의료사고를 공개해야 한다는 데는 뜻을 같이 했다. "의사는 처벌을 피하려고 무조건 숨깁니다. 경험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데 지금 의료계는 처벌 때문에 경험을 통해서 배울 수 없게 돼 있어요. 죄가 사라지는 게 아닌데 죄를 드러낼 수 없는 구조죠. 만약 의료사고 사례를 공개해서 누적하면 의료사고가 획기적으로 줄어들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지난 3월 통과된 '의료분쟁조정법안'에는 여전히 환자와 의료진 중 누구에게 잘못을 입증할 책임이 있는지가 명확하게 규정돼 있지 않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의료진이 입증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형사 처벌만 면하는 데 우려를 표했다. 입증 책임이 의료진에게 없다면 조정제도는 합의를 종용하는 식으로 흐르고, 의료사고의 진실을 알리는 길은 멀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강태언 의료소비자시민연대 사무총장도 "과실이 있는지 없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의료진에게 형사 특례까지 주면 피해자에게 과도하게 불리하다"고 비판했다. 강 사무총장은 "만약 병원 쪽이 (합의하는 대가로) '형사 특례'를 요구하면, 사실상 환자에게는 형사 처벌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고 주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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