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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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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

[창비주간논평] 영화 <무산일기>를 보고

* 이 글에는 영화의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누추한 입성의 사내가 투덜거리며 철거촌을 지나 임대 아파트로 돌아온다. 그는 피 묻은 옷을 황급히 씻어낸다. 누군가에게 폭행당한 것이다. 영화의 끝은 이렇다. 이제 사내는 말쑥해졌다. 그는 길 가운데 서 있다. 아끼던 개 '백구'의 주검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본다. 그리고 무심한 듯 고개를 돌려 제 갈 길을 간다. 그렇게 영화는 폭력의 흔적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난다. 최근 국제영화제에서 수상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박정범 감독의 영화 <무산일기>다.

영화는 탈북주민 '전승철'이 남한사회에서 힘겹게 살아나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카메라는 눈에 보이는 폭력과 보이지 않는 폭력의 한가운데서 겨우 버티며 한 사내의 움츠린 뒷모습을 따라다닌다. 스크린을 뒤흔드는 핸드헬드(카메라 들고 찍기) 장면들은 때때로 어지러울 정도로 거칠고 투박한 편이다. 하지만 그 거칠고 어지러운 화면 속의 세상은 승철의 삶과 잘 어울린다. 험난한 세상 속에 맨몸으로 던져져 자주 얻어맞으며 살아가는 그의 눈에도 세상은 꼭 그렇게 어둡고 스산하게 보일 것이다.

▲ <무산일기>의 한 장면

공화국의 국경 너머 그를 기다린 것

승철은 고향을 등지고 이곳으로 탈출했다. 고향 함경도 무산(茂山)은 이름과 다르게 민둥산의 굶주린 땅이 되었다. 허기 끝에 그는 옥수수 하나를 두고 친구와 싸운다. 다음날 그곳을 가보니 얻어맞아 쓰러진 친구는 여전히 누워 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승철이 맛본 것은 결국 옥수수가 아니라 죽임과 죽음, 극한의 지옥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생존을 위한 원초적 폭력을 피해 무산계급의 공화국에서 달아난다. 살아남기 위해 아마도 틀림없이 죽음을 무릅쓰고서 국경을 넘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고투는 여전히 끝나지 않는다. '125'로 시작하는 주민번호는 탈북자의 낙인이 되어, 열심히 하겠다며 아무리 굽실거려봐도 일자리를 얻기 힘들다. 겨우 구한 벽보 붙이는 일도 쉽지는 않다. 업체 사장은 그를 무시하고 부당하게 착취하고서는 오히려 해고하겠다고 위협한다. 같은 구역에서 일하는 경쟁업자들도 그를 잔인하게 때리고 협박하기를 일삼는다. 심지어는 탈북자 친구들마저도 답답할 만큼 어눌한 그를 무시하거나 외면한다.

승철은 탈북주민으로서 차별과 배제의 불평등한 처우를 받는다. 그는 이 사회의 소수자이며 약자의 자리에 있다. 그런데 영화에서 비치는 그의 모습은 탈북자의 곤경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탈북자인 동시에 이 땅의 새로운 무산계급, 즉 '불안노동자'(precariat)이다. 그는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그리고 심리적으로도 불안하고 열악하다. 그가 붙이는 벽보는 언제 떨어져나갈지 몰라 위태롭고, 찬바람을 막아보려고 임대아파트의 방 문틈에 붙여둔 테이프는 매서운 추위를 감당하기엔 너무도 허술해 보인다. 그의 노동과 일상은 불안으로 뒤덮여 있다.

<무산일기>는 불안의 기록이다. 프리케리아트(precariat)는 '불안한'(precarious)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다. 이 불안의 시대에 프리케리아트는 전세계에 넘쳐난다. 또한 탈북자/이주노동자로서 승철의 모습은 한국의 특수한 문제이면서 전세계 보편적인 문제를 상기시킨다. 그의 곤경은 해외관객의 눈에도 전혀 낯선 것만은 아니었을 터, 좋은 예술이 하는 일은 늘 이렇다.

생존 논리 뒤에 허물어진 삶의 존엄성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폭력을 두가지의 관점으로 나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폭력, 즉 가시적이고 가해자가 분명한 직접적인 형태의 주관적 폭력과, 얼핏 보기에는 폭력이 아닌 듯하나 오히려 정상적으로 체제를 작동하고 유지할 때 이루어지는 객관적(구조적) 폭력이 그것이다. 물론 지젝은 구조적 폭력에 대한 관심을 요청한다. 영화 속에서는 두가지 폭력 모두가 승철을 향해 퍼부어진다. 이 이중의 폭력은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 교묘하게 연동되어 이루어진다. 탈북자(그리고 불안노동자를 향한, 나아가 소수자와 약자들)를 향한 이 사회의 구조적 폭력은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 생존의 논리 속에서 당연한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로 그들을 향한 직접적인 폭행으로 이어진다. 익숙하지 않은가? 용산참사에서도 보았던 살풍경이다. 구조적 폭력이 주관적 폭력으로 가시화될 때에야 우리는 구조적 폭력을 깨닫지 않는가.

<무산일기>의 포스터는 '여기서 살아남아야 합니다'라는 문구를 강조한다. 어쩌면 그 말은 자신에게 적대적인 세상에 잔뜩 주눅 든 승철의 내면에서 흘러나온 굳은 다짐 같다. 실제로 그의 주변인물들 또한 모두 이 구호를 어떤 식으로든 반복해서 강조한다. 그러나 사실 승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길거리에서 만난 유기견 백구였고, 남몰래 좋아하는 같은 교회 여신도 '숙영'이었다. 그에게는, 윤리나 사랑이 생존보다 먼저였다. '생존'의 당위만 울려퍼지는 사회는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철거해낸 자리에 세워지기 마련이다. 생존의 방정식만으로는 채 설명되지 않는, 윤리나 사랑 같은 낡고 닳은 어휘가 위태로운 승철의 삶을 떠받치고 있었다. 사랑과 윤리만이 '나의 생존'을 '우리의 공생'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백구는 밑바닥에서 외롭고 힘겹게 살아가는 승철의 소중한 친구이고 분신이다. 백구는 남쪽 진돗개와 북쪽 풍산개의 피가 섞인 잡종개로, 팔 수도 없고 사료값만 드는 짐에 불과하다. 승철 또한 분단의 역사가 빚어낸 잡종의 삶이고, 길거리를 배회하다 쓰레기를 뒤져먹는 유기견의 신세와 다르지 않다. 제 몸 하나 간수하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하지만 그는 이 불쌍한 강아지를 거둬들여 함께 산다. 제 옷도 없으면서 백구에게는 옷을 입힐 정도다. 험한 세상에 던져진 하얀 강아지는 그가 끝내 지켜나가야 할 순백의 양심을 뜻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그러나…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영화의 마지막에 백구는 죽는다. 승철은 제 갈 길을 간다. 그가 이 사회에 '적응'하는 법은 그랬다. 이 연약한 생명과 함께 그의 윤리는 죽고, 그는 대신 생존의 법칙에 몸과 마음을 의탁한다. 그는 탈북 브로커 친구가 다른 친구들에게 사기를 쳐서 번 돈을 빼돌려 삶의 근거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 변절의 순간이 이 영화의 포스터를 가득 채운다. '여기서 살아남아야 합니다'를 되뇌며. 이 땅에서는 생존의 논리만이 생존하는 걸까…묻는다. 그러니, 영화는 다시 한번 이것은 탈북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저 작은 강아지의 죽음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난 가장 큰 폭력적인 사건이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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