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그림을 보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적으로 떨어지던 연방정부 부채의 규모가 1981년 공화당 레이건 정부가 집권하면서부터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하여, 공화당 집권이 계속된 12년 동안 지속적으로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민주당의 클린턴 행정부 8년 동안 연방정부의 부채규모가 하강곡선을 그렸지만, 다시 공화당의 부시 정권이 들어서면서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게 되어서, 이대로 상승기류가 유지된다면, 이제 곧 누적 부채규모는 미국 GDP 규모에 육박하게 될 전망이다.
이렇게 해마다 쌓여만 가는 국가채무를 줄여야 한다는 명분에는 모두 공감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에 있어서는 당파적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먼저, 재정적자를 줄이는 방안을 제시한 것은 미국의 공화당이었다. 이달 초 공화당의 라이언 의원이 위원장으로 있는 의회 예산위원회에서는 향후 10년간 4.4조 달러를 줄이는 방안을 제시하였는데, 그 골자는 노인과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보장 제도인 메디케어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켜서 아예 바우처 프로그램으로 바꾸고, 사회복지와 교육 그리고 환경과 같은 분야의 예산을 대폭적으로 삭감하는 것이다. 이렇듯 재정지출의 삭감을 통해서 저소득층의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는 한편으로, 경제의 활성화를 위하여 개인과 법인의 최고세율은 더 낮추겠다는 것이 공화당의 안이었다.
이러한 공화당의 재정적자 축소 방안에 대해서 오바마 대통령은 "미래의 희망을 절망으로 덧칠하는 것"으로 "세금감면을 통해서 백만장자들에게 1조 달러 이상의 혜택을 주면서 재정적자를 줄이겠다는 방안에는 어떠한 진정성도 발견할 수 없다"고 명백하게 반대의 입장을 천명하였다. 덧붙여서, 자신이 대통령으로 있는 한 부유한 사람들을 위해서 세금감면을 확대하면서 가난한 노인들에게는 의료비를 더 부담시키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대신에, 그는 재정적자를 향후 10년간 4조 달러를 줄이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미국 연방정부 예산의 2/3 이상을 차지하는 의료보장(메이케어와 메디케이드)과 사회보장, 그리고 국방비의 지출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한편으로, 전임 부시 대통령 시절에 시작되었던 부자들을 위한 세금감면 조치를 예정대로 철폐하여 1조 달러 이상의 세금을 더 걷겠다는 것이다. 즉,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결국 지출의 통제와 더불어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는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현 시점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재정적자 축소를 위한 자신의 구상을 전면에 드러낸 이면에는, 내년에 치러질 대선을 앞두고 복지와 세금의 문제를 전면에 드러내서 자신에게 유리한 정치 아젠다를 선점하려는 전략이 엿보인다. 하지만 그의 제안은 일견 보수와 진보 양 측 모두로부터 불만을 사기에 충분하다. 보수 진영에서는 고소득자들이 더 많은 세금부담을 해야 하고 국방비가 삭감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진보 진영에서는 의료보장과 사회복지 서비스가 삭감된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물론 유능한 정치인인 그가 이 점을 간과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증세와 더불어 지출의 엄격한 통제가 정치적으로 얼마나 불리한 것인지를 충분히 알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이 왜 이런 위험한 승부수를 띄었을까?
미국은 전형적으로 양당 구도가 정착된 나라이다. 복지와 세금문제 뿐만 아니라 낙태와 동성애, 그리고 인종문제와 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대부분 보수진영과 진보(자유)진영으로 의견이 나뉘어져, 서로 토론하고 논쟁하면서 일종의 균형을 유지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보수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은 비록 못살아도 부자감세를 밀어붙이는 공화당을 지지할 것이며,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민주당이 사회복지 예산을 줄인다 하더라도 여전히 민주당을 지지할 것이다. 이러한 국민의 여론 성향은 결국 대선에 반영되어, 득표율 기준으로는 거의 예외 없이 아슬아슬한 박빙으로 선거결과가 나오게 된다.
이렇듯 보수와 진보가 거의 대등한 지분을 가지고 대치하고 있는 정치 지형에서 집권의 향배는 결국 무당파가 결정하게 되는데, 이번 오바마의 재정적자 축소 연설은 바로 이들 무당파를 겨냥한 것이다. 지난 중간선거에서 입증된 바와 같이, 무당파의 가장 큰 관심사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연방정부의 재정적자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재정적자를 축소하는 자신의 방법을 선보인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바로 부유층의 세금부담 증가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소위 정치적으로 가장 위험하다는 증세의 문제를 정면으로 주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시대통령 시절 이후 세금감면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최고소득자 2%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는 한편으로, 사회보장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지출을 엄격하게 통제함으로서 재정적자를 줄이겠다는 계획으로 무당파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로 갈리어 갈등하기로는 미국보다 더 심한 우리나라에서도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유력 정치인들이 너도 나도 복지를 강조하고 나서는 바람에 복지담론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리고 있다. 특히, 지난해 교육감 선거에서 무상급식과 같은 복지 아젠다가 선거 결과에 미치는 파괴력을 확인한 정치인들은 복지를 자신의 정치적 브랜드로 삼으려 노력하고 있다. 이들 정치인들의 갑작스러운 관심은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를 계승하는 새로운 시대의 정신을 올바르게 반영한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면이 있다. 하지만 외부관찰자의 입장에서 보면 뭔가 2% 부족한 느낌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우리 사회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복지국가의 비전을 세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복지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 순서이다. 이번 연설에서도 오바마가 현행 의료보장과 사회보장제도의 기본 골격을 흔들려는 공화당의 안에 대해 명백히 거부의사를 밝힌 근거도 미국 사회의 비전이며, 그 비전은 시민으로서 최소한의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는 권리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정치인들도 자신이 꿈꾸고 건설하고 싶은 사회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에서의 비전과 구체적인 정책이 서로 엇나가는 것이 문제이다. 다시 말해, 시민의 사회적 권리를 강조하고, 이를 기초로 보편적 급여를 강조하는 정치인들도 현재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사각지대가 워낙 광범위하여 최저생계비 이하 가구의 70% 이상이 소위 기초적인 생계의 보장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둘째, 증세(특히, 부유층을 겨냥한 증세)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정치에서 세금문제는 단순한 셈법으로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 지금과는 맥락이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참여정부 시절 단행되었던 부유층 가구 1-2%를 겨냥한 종합부동산세가 다수 국민의 반대와 우려를 자아낸 예가 대표적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세목의 신설보다는 양출제입(量出制入)의 원칙에 따라서 단계적으로 세수를 늘리는 것이다.
첫 번째로는, 기존의 세율을 상향조정함으로써 부유층에게 혜택이 집중되는 것을 어느 정도 제어하고, 실질적으로 증세의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하지만 현 정부는 경제 활성화를 이유로 법인세와 종부세의 세율을 하향조정하여 부유층이 연간 19조 원의 이익을 보게 하였지만, 이 돈은 정부의 기대대로 투자로 순환되지 않고 유보금으로 쌓여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기존 세목의 범위와 세율을 원위치하는 것만으로도 증세의 효과를 볼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이러한 기존 세목을 통한 증세가 한계에 부딪혔을 때, 비과세 감면을 축소함으로써 과세기반을 늘리는 것이다. 특히, 과세미달자의 비중을 적극적으로 축소하여 근거과세의 기반을 지속적으로 확대함으로써, 일정한 수준 이상의 소득자도 조세부담을 하는 공평과세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 번째로는, 보편적 복지국가를 위한 재정지출을 헤아려서 기존의 방식으로 필요한 만큼의 재원조달이 어렵다고 판단될 때, 부유세와 사회복지세와 같은 사회통합 목적세를 신설하는 것이다. 즉, 양출제입(量出制入)의 원칙에 따라서 세목 신설을 하자는 것이다.
셋째,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을 막론하고 생활에서 공감대(common ground)를 확대시킬 수 있는 정책을 꾸준히 개발하고 실천함으로써, 복지정책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시민들의 수를 늘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양질의 튼튼한 공공 서비스를 누린 경험이 있는 시민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어 세금을 더 낼 것이기 때문이다.
▲ ⓒ프레시안 |
이제 곧 우리나라도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여야 간의 본격적인 정책경쟁이 이루어질 전망이다. "깨어있는 시민"으로서 이들 정치인들의 구호 속에 가려진 진실을 파악하여, 누가 진정성과 더불어 제대로 실력을 갖춘 복지국가의 올바른 설계자인지를 가려낼 책임이 우리 국민들에게 부여되어 있다. 다수의 국민이 간절히 원하고 힘을 모으면, 정치적 방법으로 선거를 통해 보편주의 복지국가를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다. 이제 신자유주의 양극화를 극복하고 경제사회적 민주주의를 달성하고자 염원하는 우리 모두는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으로 우리시대의 당면과제인 보편주의 역동적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복지국가 만들기 국민운동'에 적극 나설 시기를 맞고 있다. 결국, 해법은 정치에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