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투위 사건은 언론개혁 운동의 시발점으로 역사적 재조명을 받기도 했으나 정작 피해 언론인들의 명예회복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다.
지난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진상규명위원회'는 동아투위 사태가 정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 때문에 일어났다고 결론짓고 정부와 동아일보사가 피해 언론인들에게 사과하고 명예를 회복시켜줄 것을 권고했다. 독립된 정부기구가 해직사태의 가해자를 밝혀냈음에도 1년이 지나도록 국가와 동아일보사는 이 권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더욱이 국가권력의 피해자이기도 한 동아일보사는 당시의 해직사태 이유를 경영난 탓으로 돌리며 진실화해위의 권고에 이의신청을 내기도 했다. 이에 동아투위는 지난해 12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 현재 공판이 진행 중이다.
이 글은 해직언론인이자 전직 정치인인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1975년의 '동아광고탄압과 언론인 대거해임사태'와 관련한 민사소송에 동아투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재판부에 제출한 자신의 삶의 발자취이다.
6회에 걸쳐 연재될 이 글에는 이부영 전 의장이 자유언론과 민주화 운동, 그리고 정치참여 과정에 겪은 숱한 사건와 뒷얘기들이 기술되어 있다. 동아투위 사건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지난 35년 동안 우리가 겪어온 주요한 사건들의 의미를 되새겨볼 대목들이 많을 것이다. 이 전 의장은 자신을 민주화운동가나 정치인이기 보다는 언론인으로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편집자>
☞ 전편보기
- 1편 : 동아투위, 35년 싸움의 시작
- 2편 : "중정부장 인계문서에 김상만 <동아> 사장 각서가..."
- 3편 : 박종철 고문사건과 6월 항쟁
- 4편 : 양김의 분열, 민주화운동의 분열
- 5편 : 야권 통합의 실패와 정치 역정
마. 국가보안법 개폐 파동과 열린우리당의 몰락
열린우리당에는 그 이전의 정당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흐름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17대 총선이 끝난 뒤 확인하게 되었다.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주류, 이른바 노사모와 386정치인들이 그들이었다. 노사모 인사들은 지난날의 민주화운동 진영과는 다른, 그들만의 독특한 컬러를 지니고 있었다. 노무현과 그의 언행을 광적으로 추수하는, 그래서 취약한 열린우리당의 메카니즘으로는 대통령 권력을 배경으로 그들이 벌이는 집단적 분파행위를 견디어낼 수 없었다. 정당의 위계가 무너지고 의원총회 혹은 중앙위원회에서는 당론이나 당규가 그들의 집단적 회의투쟁으로 뒤집히거나 무시되는 일이 일상사가 되었다.
▲ 2004년 2월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백범기년관에서 새 나라 양심건국을 다짐하고 있다. ⓒ이부영 |
중진의원들이 이른바 젊은 '노빠'의원들로부터 공격당하거나 모욕당하는 것이 두려워 침묵하는 일이 벌어지고 당은 표류하게 되었다. 열린우리당은 거의 무명이었다가 화려하게 대통령으로 등장한 노무현을 따라하려는 무수한 '노무현 복제판' 정치인들의 경연장이었다. 이렇게 당이 통제불능 상태로 접어드는데도 노무현대통령은 정부에 대한 당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명분으로 '당정분리'를 내세우면서 차기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정동영 김근태 등 당의 중심인물들을 뽑아내 입각시켰다. 그나마 당의 중심으로 기능해야 할 인물들마저 행정부에 입각하자 당은 더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탄핵반대 열풍으로 17대 총선에서 152석의 과반의석을 차지한 열린우리당의 지도부는 4대 개혁입법(국가보안법 폐지, 신문법, 사학법, 과거사법의 입법)을 비롯, 100대 과제를 내세웠다. 과욕이었다. 대선 패배 후 박근혜 대표를 구원투수로 내세운 한나라당은 적절히 강온전략을 구사하면서 열린우리당의 서투른 과욕정치실험을 민심의 바다에 밀어 넣고 흔들어댔다. 총선 전의 전당대회에서 3위의 상임중앙위원(최고위원)에 선출되었던 나는 정동영의 통일부장관 입각과 신기남의 의장낙마에 뒤이어 2004년 8월 당의장에 취임하여 9월부터 시작된 정기국회 동안 거친 싸움과 협상을 이어갔다.
2004년 8월에 있었던 "국가보안법이라는 낡은 칼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관해야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코멘트는 그 법의 폐지를 관철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관한 한, 열린우리당 의원 152명 가운데 약 70명이 반대 입장이었다. 17대 총선 전에 당론을 국가보안법 폐지로 정해놓고 반대 입장을 가진 관료 기업인 대학교수 등을 비례대표와 지역구 후보로 공천한 이유가 궁금했다. 당시 의장을 맡아 공천을 주도했던 정동영은 다음 대선을 위한 포석 공천을 했던 것으로 보였다. 대선 승리를 위해서는 당론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집권당의 의원 이념분포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 폐지의 압박 수위는 계속 높아지고 있었다. 폐지를 요구하는 재야와 시민사회 세력이 혹한 속에서 한 달 간의 국회 앞 농성을 벌였다. 국회 과반의석을 차지하고 있는데 왜 폐지를 관철하지 못하느냐는 것이었다. 다른 법도 아닌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여당만으로 단독강행 처리하라는 것은 야당의 결사반대가 아니더라도 무리였다.
나는 국가보안법의 '찬양 고무 동조 및 회합 통신'의 처벌조항 등 언론, 출판, 결사, 사상의 자유를 탄압해온 5대 독소조항을 야당과 협상하여 개정하는 방안을 검토하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내가 제안한대로 여야의 당대표와 원내대표인 나와 박근혜 그리고 천정배와 김덕룡 4자회담이 열렸다. 그 협상에서 국가보안법의 5대 독소조항들을 여야합의로 개정하기로 했으며 사학법, 신문법, 과거사법은 여당 안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결국 여당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않고 독소조항만 걷어내는 개정안에 합의하는 대신 다른 개혁입법은 거의 그대로 얻어내는 실익을 얻는 반면에 야당인 한나라당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막아냈다는 명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국가보안법 폐기는 정권을 한 번 더 잡은 후 차기 정권에서 얻어내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 또한 한국사회 안에서 국가보안법의 5대 독소조항을 이용하여 기본권을 억압하고 냉전 분위기를 유지·확대하려는 극우세력의 발호를 막아내는 것도 중요한 진전이라고 판단했다. 나는 이런 정도의 국보법 개정안에 대해서 열린우리당 안의 보수파 의원들이 반대하지 않도록 설득해야 했다. 한나라당 안에서도 5대 독소조항의 폐기에 강력히 반발하는 기류가 있었다.
그러나 4자회담의 여야합의는 열린우리당 의원총회에서 이른바 강경파 소장의원들의 거부로 파기되었다. 여야 4자회담은 당론의 위임을 받아 열린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 합의는 의원총회의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추인의 의제이어야 했다. 천정배 원내대표가 합의사항의 추인을 요구하지 않고 가부토론에 부치자 농성 중이던 강경 소장파 의원들이 의총장을 난장판으로 만들면서 합의사항은 파기되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천 원내대표는 사퇴해버렸다. 협상을 주도한 당의장인 나에 대한 인신공격이 공공연히 있었다. 국가보안법만으로 4차례 구속되고 모두 7년 넘어 수감생활을 해본 나 자신만큼 그 폐지를 갈망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그러나 유신과 국가보안법 탄압시대에는 탄압당해본 적이 없는 인사들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자유롭게 외쳐도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는 시대를 맞아 인기에 영합하다가 정작 국가보안법을 악법 그대로 온존시켜주고 말았다. 정치적으로 저돌적이거나 시류에 지나치게 영합하는 사람들에게 공동체의 조타수 역할을 맡기는 일이 얼마나 위험하고 허망한 것인지 그대로 드러난 사례였다. 그 후 많은 인사들이 국가보안법의 5대 독소조항으로 구속되어 고통 받아왔다. 국가보안법을 악법 그대로 온존시킨 그들은 지금 이 문제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 멀지 않은 시일 안에 그 책임 소재를 밝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골자로 한 4대 개혁입법 파동은 열린우리당의 몰락 뿐 아니라 노무현 정권 레임덕의 시작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으며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1) 열린우리당이 실질적으로 분열상태에 빠졌고 정국주도권을 완전히 잃었다.
2) 한나라당은 노무현정부와 열린우리당을 끊임없이 '친북좌파'로 몰아 국민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계기를 잡았다.
3) 결과적으로 남북화해·협력정책의 동력을 잃게 만들었다.
4) 종국적으로는 정권을 내놓게 되는 분수령이 되었다.
나 자신도 당의장에서 물러났다. 마치 나 때문에 국가보안법이 폐기되지 않은 것처럼 비방·비난이 난무했다. 나는 당을 떠나서 진보-보수, 영호남, 세대로 나뉘어 갈등 대립하는 한국사회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중도주의운동이라고 판단하여 중도적 시민운동 '화해상생마당'을 결성하여 시민사회운동에 전념했다.
▲ 2006년 11월 9일 중도적 지식인모임인 화해상생마당을 결성, 이부영은 운영위원장을 맡았다. 창립모임에 참석한 이홍구 전총리, 김지하시인, 김우창 고려대명예교수, 수경, 법륜스님, 박종화목사, 연극인 손숙씨 등. ⓒ이부영 |
그러나 나는 곧 사정의 대상이 되어 법정에 서는 입장이 되었다. 그런 시련에 다시 직면해 있으면서도 나는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돕는 '동북아평화연대'의 공동대표로 고려인문화센터를 5년여에 걸쳐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완공시켰고 '수목장실천모임'의 공동대표로 장묘법을 개정하여 묘지와 납골묘를 줄여가기 위한 수목장을 도입했으며 소원한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한-러친선 문화예술교류축전'을 치러냈다. 지금은 4대강 사업이 생태환경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보고 시민사회단체 대표들과 정부와 타협안 만들어내기에 노력하고 있다. 또한 범야권의 전직 국회의원, 전직 광역·기초단체장, 전직 광역의원들의 모임, 그리고 진보정치세력들의 대통합운동에 일조하고 있다.
5. 재야운동과 현실정치의 차이
재야운동은 정권의 획득이나 이윤의 추구 등 목전의 이익이나 목표를 얻어내려는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윤리적 도덕적 혹은 장기적 지향을 추구하는 운동이다. 그 운동은 지난날 우리나라의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역사적 맥락이 닿아있다. 그에 비해서 현실정치는 2년 내지 4년마다 다가오는 선거에서 우선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국민의 지지, 득표에 연연하지 않으면 안 된다.
60~80년대까지는 군사독재시대가 지속되면서 민주화를 이뤄내야 한다는 절실한 과제 때문에 재야운동과 제도권 야당이 함께 제휴·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였다. 그러므로 제도권 야당 안에서도 재야세력을 자신들과 가까이 해야 하므로 선명한 명분을 선점하는, 따라서 군사독재로부터 어느 쪽이 더 혹독한 탄압을 당하느냐가 선명성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재야민주화운동은 민주화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을 함께 전개하고 있었으므로 극우적인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언제나 용공, 좌경의 색깔론의 제물이 되기도 했다. 제도권 야당으로서는 민주화에는 같은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통일문제에 관해서는 거리를 유지하는 자세를 취하곤 했다. 즉 나라와 민족이 처한 현실을 진단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함에 있어서도 재야운동은 명분이나 운동에 치중했다면, 제도권 야당은 실현가능한 제도를 얻어내는 실용적 자세를 취했다고 볼 수 있다.
▲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함께 모인 통합민주당의 개혁파들. 이들의 꿈은 지역주의과 금권정치에 의해 무산되었다. 이부영 제정구 이철 노무현 유인태 김원웅 김홍신 박석무 원혜영 장기욱 홍기훈 이규택 고진화 그리고 시민운동 측의 이삼열 장기표 서경석 성유보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들은 뿔뿔이 흐터졌고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이부영 |
재야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제도 정치권에 참여한 인사들 가운데 적응에 성공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조건이 너무 다른 현실정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인사들은 더 많았다. 제도 정치권에서는 재야시절의 명분이나 선명성만으로는 성공이 보장되지 않았다. 얼마나 지지 세력을 많이 결집해낼 수 있는가, 필요한 정치자금을 얼마나 동원해낼 수 있는가가 선명성·명분과 함께, 아니 그보다도 더 필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었다.
더욱이 지역주의와 연줄, 그리고 보스정치가 주류를 이루고 있던 제도 정치권에서 젊은 시절부터 돈 버는 일과는 담을 쌓고 감옥 드나들기를 밥 먹듯 했던 재야인사들에게 정치권에서의 성공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해방 직후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들이 독립된 나라에서 겪었던 고초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재야출신 인사들이 정치권에 착근했더라도 재야시절의 목표나 성향을 그대로 지니고 간다는 것은 끊임없는 갈등 대립을 각오해야하는 일이었다.
6. 끝내는 말
요즈음 '시대정신'이라는 말이 다시 회자된다. 60년대에 대학 철학 강단에서 자주 듣던 이 말이 다시 등장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듯하다. 오늘의 시대정신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민주화일까, 산업화일까. 아니면 요즘 새로 회자되는 선진화일까. 민주화와 산업화는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이 시대가 성취하고자하는 목표를 달성하려는 수단이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공동체 안에서는 민주화와 산업화는 서로 대립하는 세력들이 각각 서로 다른 비전과 세력들을 기반으로 성취함으로써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흐름인 듯이 주장되고 있다.
1919년 3.1독립운동으로 수립된 대한민국은 봉건왕조시대의 신분제 사회를 타파하고 국민이 주인인 공화주의를 표방했다. 민주공화국 국체를 내세웠을 뿐 아니라 국민통합을 통한 독립운동의 방향도 뚜렷이 했다. 사실상 우리 민주화의 연원은 3.1운동과 대한민국의 선포에 닿아있다. 그에 비해 6.25한국전쟁의 폐허 이후 외자도입으로 본격화된 산업화는 식민지 수탈, 전쟁파괴로 생존의 벼랑에 몰린 국민 대중을 먹여살려야한다는 절박성에서 출발했다.
민주화와 산업화는 대한민국 국민대중의 필요를 각각 어느 정도 충족시켰다. 이제 우리 국민은 집권자를 비판한다고 잡혀가고 고문당하는 일은 겪지 않을 것이다. 부정선거로 주권을 강탈당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터무니없이 군사쿠데타로 민주정부가 전복당하는 수모도 겪지 않을 것이다. 아직 부의 불평등, 양극화를 겪고 있어도 사회안전망과 의료보장 등 최소한의 복지제도가 마련되어가고 있다.
바로 주인(국민대중)의 부름에 심부름꾼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응답한 일이 민주화요 산업화였다. 그리고 그 혜택은 부족하기는 해도 주인에게 돌아갔다. 주인은 심부름꾼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서로 경쟁시키고, 주인에게 봉사하도록 요구했다. 때로는 심부름꾼이 자신의 본분을 잊고 날뛰다가 주인에게 벌 받는 일도 있었다.
독일 철학자 헤겔의 역사철학에 나오는 '역사의 간지(奸智)'라는 말이 떠오른다. 시대정신은 그 시대정신의 이성의 전개에 역사의 흐름이 봉사하도록 이끈다는 뜻으로 이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오늘의 시대정신을 국민대중의 부름이라고 해석한다면 민주화와 산업화는 그 부름에 봉사한 것이었다. 부름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을까. 다소간 주관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20세기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억눌려온 한반도 구성원의 자유의 해방 아닐까. 분단의 해소, 즉 대륙과 해양의 원활한 소통의 접점 노릇을 준비하라는, 문명의 소통과 대화를 주선하여 21세기 새로운 문명의 태동을 준비하라는 부름이 그 지향이 아닐까. 국민대중은 이미 민주화와 산업화의 주역들의 공로를 인정했고 포상했다. 이제 주역들은 주인의 부름의 다음 지향을 헤아리고 협력하면서 달려가야 할 것이다.
올해 연초 좋은 벗의 초청을 받아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북한출신 젊은이 몇 사람과 남한산성 산행을 다녀왔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차별, 폐쇄성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3명 중 2명은 지금이라도 할 수만 있으면 자신들의 고향인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민주화·산업화한 것을 보고 그들은 이곳으로 목숨을 걸고 찾아왔다. 외국인 노동자들도, 동남아 여성들도 새 삶을 찾아왔다. 이제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 안에서 영호남이, 보수-진보가, 세대들이, 민주화세력-산업화세력이 서로 대립-갈등하는데서 비롯된 일이 아닐까. 우리 안에 우리 자신을 담을 여유가 없는데 하물며 어떻게 남들을 담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나 자신에게마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할 정도로 자폐증 환자가 되어가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봐야겠다. 자기 개인의 안락에 방해가 된다면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겠다는 극단적이고 폐쇠적인 이기주의가 그럴만하다고 이해되는 사회라면 이미 깊은 사회병리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주인은 이미 웃으면서 받아들였는데 심부름꾼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성과에 재를 뿌리면서 우리를 부러워해서 찾아온 손님들까지 등을 돌리게 만들고 있다. 심호흡 한번 하고 눈을 들어 멀리 봐야겠다.
길고 지루한 이 글을 읽어주신 재판부에게 감사드린다. 우리 동아투위의 언론인들은 대한민국의 법원이 우리 국민이 마지막으로 의지할 민주주의 보루일 것으로 믿으며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시절의 그 처절한 비극이 바로 잡히는 데서 그 믿음은 푸른 솔처럼 우뚝 설 것이다.
'동아' 살리는 길, 겸허한 반성과 사과 뿐 '자유언론, 동아투위 그리고 나의 삶' 연재를 읽어주신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들어가는 글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이 글을 동아투위가 원고가 되고 국가가 피고가 되어 진행하고 있는 민사소송의 참고문건으로 제출했다. 나는 35년에 걸친 나의 삶을 일별하는 이 글을 민주화운동가나 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쓸 지면을 박탈당하고 살아온 한 기자로서 썼다고 말했다. 자유언론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동아일보로부터 쫓겨났고 본래 자신이 추구했던 인생의 행로가 뒤틀려버린 한 기자가 지난 35년 동안 보고 듣고 겪은 숱한 일들을 될 수록 기자의 눈으로, 될 수록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썼다고 말했다. 그렇지 못했다면 비판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도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동아일보사 측이 1975년 3월 당시 134명의 언론인들을 내쫓은 것이 박정희 유신정권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동아일보사의 경영상 어려움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동아일보사의 경영이 어려워진 원인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동아의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넣어 광고수입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자유언론운동을 벌이던 언론인들을 대거 내쫓고 난 이후, 거의 같은 수의 언론인들을 다시 보충채용하고 고가의 색도 윤전기를 구입한 것을 보면 경영이 어려워서 대량해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궁색한 거짓말이었다. 이제 동아일보 사주측은 솔직해져야 한다. 사주 측이 당시 유신독재정권의 압력, 심지어 폐간압력까지 있어서 대량해고조처가 불가피했다고 설명한다면 이해되는 측면도 있다. 폐간을 불사하고라도 자유언론을 주창하는 언론인들과 함께 사주 측도 옥쇄의 길을 걸었어야 했다는 견해는 당시 상황을 감안한다면 쉽지 않은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상황의 엄중함이 그런 지경이었다고 해도 조그만 중소기업도 아닌, 유서 깊은 한국 최대 최고의 신문사에서 유례없는 백지광고 탄압과 대량해고가 어떤 연유로 있었다는 것을 동아일보사 측은 명백히 밝히고 독재정권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었어도 동아 사주 측의 성찰과 반성은 없었다. 동아 사주 측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독재시대의 동아일보 자신의 과오를 솔직히 시인하지도 않았고 해고로 고통당한 언론인들과 지지성원했던 시민들에게 사과 한마디 없었다. 그랬다면 오히려 해직언론인들도, 시민들도 동아일보사 측의 겸허한 용기에 감동했을 것이고 그것은 허위와 기만으로 점철된 우리 근현대사에 새로운 출발의 계기를 제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동아일보사 측이 반성하고 사과했다면, 김종필씨 같은 유신시대의 책임있는 인물들도, 심지어 동아 해직언론인들을 괴롭히고 감옥에 넣었던 중앙정보부의 하수인들도 증언을 피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아일보사는 유신독재 시절 자신들의 자유언론에 대한 공헌을 자화자찬하고 있다. 일제 식민 치하 동아일보의 항일치적을 자랑하고 있다. 나는 동아일보가 이승만·박정희 정권 아래서 민주주의와 자유언론에 기여한 공로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일제 치하에서도 왜 항일치적이 한 가지도 없었겠는가. 그러나 백보를 양보해서 동아일보사 측에게 독재정권 시대에 자유언론을 위한 공헌이 있었고 일제 치하의 항일치적이 있었다고 해도, 유신정권 아래서 있었던 자유언론운동 당시 수많은 언론인들을 해고했고 일장기말소사건 당시 현진건 사회부장을 비롯한 다수의 언론인들을 내쫓았던 사태들, 그리고 그 사태들에 대해 그 뒤 한번도 사과한 일도, 원상회복한 일도 없었다는 것을 이제는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동아일보 사주측은 이제 솔직해져야 한다. 솔직해질 때라야 자유언론을 위한 공헌도, 일제 치하의 항일치적도 제 빛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아일보는 이제 3류 언론이 됐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일에 어느 언론보다 앞장서고 있으며 철지난 냉전시대를 다시 불러들여 민족화해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미친 듯이 가로막고 있다. 방송 종편을 얻어내려 정권에 온갖 추파와 추태 보이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이런다고 동아일보의 추락의 추세를 돌이킬 수 있다고 보는가. 온갖 영욕과 조상의 손때가 묻어나는 신문을 과감히 버리고 오락과 스포츠로 가득 찬 선정적 방송으로 변신할 황당한 꿈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동아일보사는 방송을 하려해도 신문을 바로 세우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문도 다시 살리고 방송도 제대로 하는 일은 자유언론실천 정신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것은 동아 하나를 살림으로써 우리 사회의 기풍을 새롭게 바꿔나가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지난 35년 세월 제 하늘 아닌 남의 하늘 아래 살아가도록 강요당했던 많은 언론인들(15명이 세상을 등졌다) 그리고 동아의 자유언론실천에 열화 같은 성원을 보냈던 참 착했던 시민들에게 사과하는 일만으로 가능할 것이다. 필자도 이런 지루한 글 대신 신나는 글을 쓰면서 살아봤으면 한다. 35년이 지난 지금 다시 법정에서 시비곡직을 가리는 일도 몹시 역겹다. 동아일보사 측의 결단을 기대해본다. 그 결단은 동아일보를 살리는 역사가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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