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대법원은 LG전자 근무 시절 납품 비리를 본사 감사실에 고발했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결국 해고된 정국정(48) 씨가 제기한 해고무효확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서울고등법원으로 파기 환송했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해고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정 씨가 행한 녹취와 업무방해가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는 차원을 넘어 회사와 동료직원들과의 신뢰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봤다.
대법원의 파기 환송 결정이 고법에서 다시 뒤집어지는 일은 드물다. '왕따' 근무 과정에서 얻은 우울증에 대해 사측의 책임을 인정받아 구자홍 당시 LG전자 회장과 사측을 상대로 각각 2000만 원씩을 받아냈던 정 씨로서는 또 다른 고비를 만난 셈이다. 그러나 정 씨는 항소심에서 패하긴 했지만 무고죄를 저지른 LG전자 직원들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처분에 대해 소송을 제기해 처음으로 인정받은 전례도 있기에 법적 구제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4일 오후 서울 서초의 한 카페에서 정 씨를 만나 대법원 판결에 대한 소회와 15년 전 시작된 '공익제보자'로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편집자>
▲ 'LG전자 왕따 노동자' 정국정 씨. ⓒ프레시안(김윤나영) |
"기껏해야 상사에게 밉보일 정도 일일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왔다"
프레시안: 1996년 처음 내부고발을 했을 때, 15년이 지난 지금 상황까지 올 거라고 예상했나?
정국정: 전혀 생각 못했다. 기껏해야 상사에게 좀 밉보이는 정도라고만 생각했다. 대기업에 공채로 입사해서 애정을 갖고 일했고, 잘못된 점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이렇게 됐다.
프레시안: 15년 전 내부고발 과정에 대해 설명해달라.
정국정: 지금 생각하면 운명인데, LG전자 컴퓨터 사업부에 재직하던 시절이었다. 필요한 부품이 자재과에 없어서 납품 업체로부터 급하게 사와야 했는데 부품 자체가 중고품인데다 가격 자체가 터무니없었다. 업체와 부당한 관계를 맺어 왔던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봤다.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얘기했더니 '그런 일이 한두 건이냐, (감사실에) 찔러라' 그런 소릴 웃으면서 했다.
평소에도 입 바른 소리를 좀 하는 편이었는데 동료들도 그래서 부추긴 것 같다. 고민하다가 본사 감사실에 보고했다. 당시 감사실에선 신분 보장 해준다고 했다. 1996년 말에 감사가 시작돼 이듬해 상반기에 납품 비리에 관련된 관계자들이 감봉 등의 징계를 받고 납품 업체와는 거래를 끊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상적으로 근무했다.
프레시안: '왕따' 근무는 언제부터였나
정국정: 징계 이후 은근한 따돌림이 시작됐다. 팀장이 업무시간 이후에 사무실에 혼자 못 있게 했다. 사무실에 문제가 된 자재과가 함께 있어서다. 회식이나 모임이 있어도 나에게만 하루 전날 통보가 왔다. 오지 말라는 거다. 그렇게 '은따(은근한 왕따)'로 지냈고 1998년, 1999년 연속 과장 승급 심사에서 누락됐다.
프레시안: 승진에서 누락된 뒤 벌어진 일들이 이번 판결의 주된 근거가 됐다
정국정: 내부고발 건이 승진 누락의 배경이 됐다는 걸 재판부가 고려하지 않은 것 같아서 억울한 면이 있다. 두 번째 승진 누락 당시 팀장이 미리 탈락 소식을 전했다. 주말에 팀장을 찾아가서 "회사를 위해 일 했다. 내부고발자라는 이유로 승진에서 계속 누락된 사실을 대표이사가 알면 진짜 큰일 날 일이다"라고 했더니 팀장이 "(내부고발을) 그렇게 해놓고 어떻게 같이 근무하려 했냐. 내가 70세까지 살 수 있는데 60살까지밖에 못살면 그 10년는 이번 사건의 후유증일 거다"라고 했다. 감사 받느라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아느냐는 거다.
나중에 부장을 찾아가 승진 심사에 반영된 인사고과라도 보여 달라 했는데 거절당했다. 실장이 이 사실을 알고 화를 내면서 그날 전 직원에게 내가 구조조정 대상이라고 공표했다. 본사 인사팀에 전화했더니 본인이 동의하지 않으면 퇴직은 안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다음날 구조조정 대상임을 취소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런데 판결문에서는 그 호소가 진급시켜 달라는 청탁으로 보고 있더라. 상식적으로 구조조정당할 처지의 사람이 어떻게 진급을 요구하며 들어주지 않으면 대표이사에 투서하겠다고 하겠나.
그 뒤로 몇 달 동안 수십 번 죽고 싶다는 생각 하면서 살았다. 공장으로 발령날거라는 소문도 나돌았고 상사로부터 '밥벌레'라는 등의 폭언을 들은 적도 있다. 심지어 얻어맞는 경우도 있었다. 하루는 출근했는데 개인 사물함이 내팽개쳐져 있더라. 당시 친척으로부터 받았던 예물 같은 개인 물품도 없어졌다. 얼마 뒤에는 팀장이 내 디스켓을 복사해 그 안에 써두었던 사건 경과를 보고 있는 걸 확인했다. 경찰서에 갔더니 신고하라고 했다. 경찰이 회사에 왔는데 상사가 컴퓨터를 끄고 날 웃기는 놈이라고 추궁하기에 사물함을 집어던진 일이 있었다.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며칠 뒤에 쓰러져 병원에 입원할 정도였다.
결국 2000년 2월에 지시불이행과 복무규정 위반으로 해고 징계를 받았다. '왕따'로 지내며 지시를 받은 적이 없는데 뭘 불이행했는지 모르겠다. 당시 상사들과의 대화 녹취도 판결문에서는 한달에 2~3번씩 몇 달에 걸쳐 했다고 하지만 총 3~4번이 전부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와 더불어 1인 시위와 주주총회 참석 등을 들어 전후관계를 제외하고선 내게 책임이 있다고 했다. 당시로선 처음 있는 직장 '왕따' 사건이었다. 관련자들의 책임도 다른 소송에서 인정돼 구속되는 사람까지 나왔었다. 그런데 나더러는 가만히 참고 있어야만 했던 사안이라고 하는 건가.
프레시안: 당시 노동조합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하지 않았나?
ⓒ프레시안(자료) |
프레시안: 판결이 내려졌을 당시(3월 24일) 무슨 생각이 들었나?
정국정: 파기 환송까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징계 과정에서 절차적 하자가 있었음을 회사도 고법에서 일부 인정한 바 있다. 대법원이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관계가 다르다. 어제부터 재판에 대한 보도가 나왔는데 방송을 보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실이 아닌 내용이 나오는데 빨리 다음 기사로 넘어갔으면 했다.
민사소송에서 다 이겼고 형사에서도 책임 인정하고 손해배상까지 물렸는데 근로계약 관계 파기의 책임만 나에게 있다는 논리가 이해되지 않는다. LG전자 측이 선임한 변호사가 대법관 출신인데, (전관 변호사의) '활약상'이란 말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법원, 지엽적 사실로 전체 판단해선 안 돼"
프레시안: 해고 이후 10년간 법정 싸움을 벌여 왔다. 고비가 많았을 것 같은데.
정국정: 해고 당시 나이가 서른일곱이었는데 지금은 마흔여덟이다. 당시 결혼을 한 상태였다면 이렇게 못살았을 거다.
프레시안: 생계는 어떻게 해결하나.
정국정: 당시 벌어놨던 돈에서 곶감 빼먹듯 썼다. 생활은 산업재해 요양비로 해결한다. 소송은 공익변호사 모임 공감에서 무료로 진행해 줬다. 신변이 불안하다보니 가정을 이뤄야겠다는 생각도 잘 안 든다. 사실 소송 말고는 생활이랄 게 없다. 법원과 변호사 사무실을 자주 들락거리다보니 거리 때문에 서초동에 작은 주택을 하나 얻어 혼자 살고 있다. 하루 두 끼 먹는 거 제외하고는 온종일 소송 준비만 한다.
프레시안: 가족들의 우려는 크지 않나?
정국정: 노모가 계신데 처음엔 실망도 많이 하셨지만 이런 저런 사정을 들으신 뒤에는 "네가 배운 만큼만 하라"고 하시더라.
ⓒ프레시안(김윤나영) |
정국정: 한 번도 안했다. 소송이 마약이라는 생각도 했다. 불리한 판결이 나오면 승복하기가 쉽지 않다. 진실을 가장 잘 아는 건 당사자들이다. 법원은 국민들이 믿을 수 있을 만한 진실을 제시하는 거다. 지엽적인 사안을 부각해서 판결하면 안 된다.
프레시안: 내부고발자들의 삶은 대개 피폐한 게 현실이다. 내부고발을 하겠다는 이가 또 나오면 지지하겠는가?
정국정: 말리고 싶다. 예전이었으면 하라고 했겠지만 현실이 너무 가혹하다. 국민 정서 아닌가. 사람들이 좋지 않게 본다. 고자질쟁이, 배신자라고 말이다. 그런 의식을 바꾸는 게 언론의 역할인 것 같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선 나아진 편 아닌가. 내부고발자란 표현을 쓰기나 했나.
프레시안: 지난해 말 '삼성전자 박종태 대리' 사건이 보도된 적이 있다. 경우는 다르지만 직장에서 '왕따'를 당하고 해고된 사례다.
정국정: 주위에서 '제2의 왕따' 사건이라고 하더라. 내가 봐도 판박이다. 입바른 소리 하는 사람이 피해는 보는 것. 회사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내 사건의 경우에도 중간층 사람들이 좀 해먹고 하는 걸 어쩌겠냐는 생각일 거다. 차라리 문제제기한 사람 한 명 없애는 게 낫다는 거다. 이해는 가는데 설득이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다. 무조건 생이빨을 뽑으려 하는 게 문제다. 설득이 안 되는 사람을 억지로 뽑아낸다는 말이다.
프레시안: 앞으로 계획은?
정국정: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파기 환송심에 충실할 생각이다.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와서 어떻게 바꿀 수도 없다. 사법제도가 좀 바뀌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판사들이 약자의 설움을 모른다. 1인 시위를 하면 백안시한다.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봐왔던 이들을 판사로 임용해야 한다는 얘기가 이해가 가더라.
'내부고발자', 보호 방법은 없나? 지금까지 내부고발자들은 신원이 노출되거나 해고 등 불이익 조치를 감수해야 하기 일쑤다. 내부에서 건전한 비판이 나오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르면 올해 9월 말부터 내부 고발자들의 신변을 보호해줄 공익신고자보호법이 실시된다. 이에 따라 "국민의 건강과 안전, 환경, 소비자의 이익 및 공정한 경쟁"을 침해한 기업이나 단체를 신고한 사람은 어느 정도나마 신변을 보호받을 길이 열렸다. 법안에 따르면 공익 신고자는 △신분비밀 보장 및 신변 보호 △비밀 준수 의무 위반에 대한 면책 △파면·해고·징계처분 등 각종 신분·경제·행정적 불이익 조치 금지 △보상금 지급 등을 보장받는다. 물론 법안의 한계도 있다. 정국정 씨는 "부품에 대한 납품단가가 지나치게 높이 책정됐다"는 내용을 고발했지만, 이러한 사례를 보호할 적절한 안전망은 여전히 미흡한 실정이다. '공익'의 범위가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익 제보자와 함께하는 모임'의 부대표인 이지문 씨는 "건강, 안전, 환경, 공정 경쟁에 관한 구체적인 시행령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며 "공익의 범위를 어디까지 할 것인지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공익 침해 행위를 발생시킨) 해당 기업이나 행정 기관에 고발한 사람뿐만 아니라 언론, 국회의원, 시민단체에 제보한 사람까지 보호 대상으로 포괄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공익신고자보호법이 기업 입장에서도 이익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이지문 부대표는 "내부고발자들이 제대로 대접받을 수 없다면 직원들은 (회사에 손해를 입히는 비리가 생겨도) 신고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거나, 신고를 하더라도 회사 밖에서 할 것"이라며 "이는 어느 쪽으로 보나 회사로서는 손실"이라고 강조했다.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는 "지금까지 부패행위 신고자에게는 신고와 보호체계가 갖춰져 있었지만, 민간분야에서 발생하는 공익침해에 대해서는 보호 프로그램이 허약했다"며 "민간분야에서도 신고자들이 안전하게 신고할 수 있는 신고채널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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