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장이 정전됐을 때 오작동한 설비에서 가스가 나오는 걸 직접 보셨습니까?"
"가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데요."
방청객 일부가 피식 웃자 재판부가 "지금 돌아가신 분을 두고 재판을 하고 있다"고 주의를 줬다. 소란은 한 번으로 끝이었다. '삼성 백혈병' 피해자의 산업재해 불승인 처분을 놓고 벌어진 재판에서 양측 변호사들은 4시간 동안 첨예한 공방을 벌였다.
14일 오후 서울 서초 서울행정법원 201호실에서 삼성반도체 피해 노동자와 유가족들이 제기한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 등에 관한 3차 변론이 진행됐다. 이날 재판에는 1996년 삼성전자 기흥공장에 입사해 엔지니어로 일하다 베게너 육아종증에 걸려 지난해 퇴사한 김 모(42) 씨가 증인으로 출석해 삼성 반도체 사업장의 실태를 증언했다.
이에 앞서 원고측 변호인은 백혈병 피해자들의 주요 발병 원인으로 감광 공정에서 쓰이는 벤젠 성분이 후속 공정에서 노출되었을 가능성을 들었다. 서울대 산학협력단의 연구 결과 시료에서 벤젠이 발견됐고, 근무 교대과정이나 개선된 공정을 위한 설비의 세트-업(set-up) 과정에서 노출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게 주된 근거였다.
반면에 소송 당사자인 근로복지공단과 함께 보조 참고인으로 방어에 나선 삼성 측 변호사들은 서울대 보고서가 스스로 노동자들의 건강 이상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인정했고, 제3의 기관에 의뢰해 분석한 결과 벤젠이 검출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또한 고(故) 황유미, 이숙영 씨가 근무했던 습식식각 공정은 배기장치가 작동하고 있어 유해물질 노출 가능성이 없다며 이들의 백혈병 발병이 직업성 암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원고들 스스로가 유해물질 인자 노출 여부를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문용어가 난무했던 법정…치열한 공방
피고 측 변호인들의 주장처럼 현재 한국의 산재 인정은 피해 노동자 스스로가 증명해야 한다. 이 때문에 김 씨에 대한 변호인들의 심문 내용은 반도체 공정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가 난무했다. 재판부도 틈틈이 이해하기 힘든 공정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먼저 이뤄진 원고 측 심문에서 김 씨는 천장에서 바닥으로 부는 공기에 의한 배기 장치가 실제로는 압력이 낮아 설비 밖으로 노출되는 화학가스를 완전히 배출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또 테스트용인 더미(dummy) 웨이퍼에 묻은 화학물질이 공정 중에 완벽히 제거되지 못해 노동자들이 화학물질이나 분진에 노출되는 경우가 있었다고 했다.
김 씨는 이어서 삼성이 생산성 향상을 위해 고온의 웨이퍼를 냉각시키는 시간을 줄였고 이에 따라 고온의 화학 증기가 설비 밖으로 누출되는 경우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엔지니어들도 빠른 설비 보수를 위해 작업수칙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유해가스와 분진에 노출되는 경우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에 맞서 삼성 측 변호인단은 김 씨의 진술이 상당 부분 동료 엔지니어의 증언이나 입사 초기 실습 경험 등 제한된 기억에서 나와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애썼다. 변호인단은 6~8라인에서 근무했던 김 씨가 고(故) 황 씨와 이 씨(3라인 근무), 엔지니어 출신으로 2005년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故) 황민웅 씨(5라인 근무)의 근무를 직접 본 적이 있냐고 물었고 김 씨는 없었다고 답했다.
변호인단은 또 여러 번 사용되는 테스트용 더미 웨이퍼가 실제 웨이퍼과 함께 이동하므로 따로 유해 물질이 남아있을 수 없다는 논리를 폈지만 김 씨는 더미 웨이퍼는 전산 시스템에 기록되지 않고 쓰여 별도로 운반되면서 세정 등의 공정을 생략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반박했다. 이어서 변호인단은 벤젠 성분이 들어간 감광제가 플라즈마 공정을 거친 후 고온 설비에 들어가 감광제 화합물이 발생한다는 주장은 김 씨의 추측일 뿐 증명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을 지켜보던 한국산업안전보건연구소의 공유정옥 산업의학 전문의는 "설비 안에서 과산화수소의 수소 성분 등과 결합한 폴리머(polymer)가 열에 의해 분해되면 다양한 형태의 결합물이 생성된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라며 "그러한 화합물을 증인이 직접 확인했냐고 묻는 건 이번 사안과 동떨어진 질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공유정옥 전문의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에 참여해 소송 원고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
변호인단은 이밖에도 노동자들이 화학물질 노출 방지와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면장갑이 실제로는 내산성이 있는 재질로 만들어졌다는 점과 현행법과 작업규칙 상 사업장 내 방독마스크 등을 착용하고 일하도록 강제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김 씨는 "16년간 일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관리자로부터) 한 번도 듣지 못했다"고 증언해 실제 작업 현장과 제도가 동떨어져있음을 시사했다.
재판부는 4월 중순경 4차 변론기일을 열고 삼성 측 변호인단이 신청한 증인에 대한 심문을 진행하기로 했다. 행정소송 결과가 나오더라도 양측이 항소와 항고를 거쳐 대법원까지 공방을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확고해 실제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소송까지 길게는 4년의 시간을 보낸 피해 노동자와 유가족들의 마음이 무거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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