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 이를 일정하게 저지 또는 속도를 완화한 계기가 있었으니, 쇠고기 광우병 논란에서 시발된 촛불의 저항과 2008년 하반기 전 세계를 강타한 미국 발 경제위기가 그것이었다. 이것이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앞세워 우리 경제사회의 공적 영역을 축소하고, 자본 주도의 시장 영역을 단기간에 대폭 확장하려던 이명박 정부의 급진적 신자유주의 정책방향을 한 동안 저지하거나 또는 속도를 느리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를 계기로 기존의 신자유주의 정책방향과 본질적인 차이는 없지만 외형적 구호로는 좀 더 세련된 방식을 채택하였는데, '친 서민 중도실용정책'과 '공정국가' 주창이 그것이다.
그러나 내세우는 구호가 달라진 것 이외에 정책기조 측면에서 달라진 것은 없었다. 현 정권은 본질적으로 노동과 서민을 배제한 채, 감세혜택과 함께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시장의 거품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상위 10% 이내 부자들의 이익을 철저하게 옹호함으로써 보수층의 지지를 확고하게 결집하는 전략을 견지하였다.
2008년 하반기에 발생한 미국 발 금융위기는 세계적 경제위기를 초래하였는데, 우리나라는 2009년 동안 빚을 얻어 추경예산을 편성하는 등의 적극적 재정 투입과 저금리정책 등으로 경제위기 대응 전략을 마련하였으며, 이후 각종 거시경제지표가 좋아지면서 주요 국가들 중에서 경제위기 극복 성적이 가장 우수한 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기업 중심 수출 호조와 자산가격의 상승 등에 힘입은 경제성장률 등 거시경제지표의 호조는 더 이상 우리네 서민 경제와 민생의 축복만은 아니었다.
정부의 이러한 불황 극복과 경제정책 성과 홍보에 대해 국민들이 안심하고 좋아하기는커녕, 갈수록 힘들어한다. 민생의 불안이 심화되고 있다. 10여 년 전부터 구축되어온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이명박 정부의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감세, 규제완화, 민영화)과 세계적 경제위기로 인해 우리나라 경제사회의 양극화와 소득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기 때문이다.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경제사회적 약자는 더 어려움을 겪는 반면, 부자들은 오히려 더 부유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지난 1997년의 외환위기 때, 신자유주의적 해법이 적용된 이후에 벌어진 우리나라의 상황이 그랬다. 이명박 정부 들어,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노동시장의 양극화는 과거 1997년 외환위기 때의 상황보다 더욱 나쁜 경과를 밟았다. 과거 외환위기 때는 주로 정규직 노동자들이 해고되었던 데 비해, 2008년 경제위기 이후에는 비정규직 등 불안정 고용상태인 노동시장의 약자들이 주로 일자리를 잃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중도 늘어났고, 노동시장 내부의 임금격차와 배제도 심화되었다.
노동시장의 양극화와 배제는 '고용 없는 성장', '수출산업과 내수산업의 양극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보다 근원적으로는 '과잉금융과 주주자본주의'라는 신자유주의의 본질적 특성으로 인한 필연적 현상이다. 이렇게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노동시장의 양극화는 비정규 노동자와 영세업체 및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시장소득이 상대적으로 축소됨에 따라 '워킹푸어(근로빈곤)'라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임금으로 이들의 삶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해 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 내수경제도 살아난다.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 체제가 노동자들 간의 시장소득 격차를 넓혀 놓았으므로, 사회임금으로 이 격차를 메워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더 많은 복지재정이 요구된다. 그런데 반대로 갔다. 현 정부는 감세를 통해 국가의 재정능력을 축소시켜 버렸다. 그리고 경제위기가 닥치자 필요재원을 나라 빚으로 메우고 있다. 2008년 308조 3천억 원이던 국가채무 규모가 2010년에는 407조 원으로 증가하였는데, 이는 GDP 대비 30.1%에서 36.1%로 급증한 것이다.
국가채무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늘어나는 대규모 복지수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데 필요한 정부재정을 마련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기존의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복지수요의 자연증가를 따라가기도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기존의 '신자유주의 경제와 선별적 복지'라는 시장만능국가의 정책 패키지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유럽 선진복지국가의 조정시장경제와 보편적 복지의 정책 패키지를 우리 실정에 맞도록 적용하려는 지혜가 요구된다.
그럼에도, 정부여당과 보수진영은 보편적 복지는커녕, "이미 우리나라는 복지국가 정도 수준에 도달"하였다느니, "복지가 반드시 필요한 사람에게 선별적 복지를 맞춤형으로 제공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진보개혁진영의 보편적 복지국가론을 포퓰리즘으로 매도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래서 남미와 남유럽의 경제위기도, 최근 일본의 재정적자도 모두 복지 탓으로 돌리며, 복지망국론을 전파하고 있다. 심지어 멀쩡하게 잘 나가는 복지국가 스웨덴조차 복지병으로 사회가 곪아가고 있다고 왜곡한다.
저출산 고령화의 급속한 진행과 경제사회의 양극화 심화로 인해 늘어나는 복지수요를 감당할 예산이 부족하여 국민기초생활보장 등의 선별적 복지마저도 축소하고 있고, 이를 시장과 자선에 떠맡기려는 '시대를 거스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노동자와 서민의 생활은 갈수록 어렵고, 중산층도 불안에 만성적으로 노출되는 '범 불안시대'를 맞고 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이를 민생의 '5대 불안'으로 홍보해왔는데, 일자리, 보육·교육, 주거, 노후, 의료 불안이 그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사람들은 생존본능에 따라 자신만의 안정을 추구하는데, 여기서 창의적 사고와 기업가적 도전정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경제사회의 역동성이 급속하게 줄어든다. 가령,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이 장래가 불확실한 이공계를 기피하고 안정적인 의대나 법대를 앞 다투어 진학하거나 고용안정성이 보장된 공공부문으로 몰리고 있다. 이는 노동시장의 양극화와 고용불안을 야기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와 보편적 사회안전망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잔여주의 선별적 복지체제 탓이다.
보편적 복지가 잘 구축된 나라일수록 경제위기 상황에서 안정적인 대응력을 보여준다. 이들 국가들이 경기침체를 덜 겪는 이유는 내수가 다른 나라들보다 크게 악화되지 않기 때문인데, 이러한 내수 유지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은 국가의 강력한 재분배정책이다. 재분배정책이란 조세를 거둘 때 고소득층으로부터 세금을 더욱 많이 걷어서 이를 복지프로그램을 통해 저소득층에게 이전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가 불평등 심화로 인해 파멸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기능이다.
조세구조가 누진적이고 세금을 많이 거둘수록, 그리고 거둔 조세의 더 많은 비중을 복지프로그램에 사용함으로써 저소득층에게 더 많이 가게 할수록 재분배기능이 강력한 국가다. 이러한 재분배기능의 정도는 나라마다 다른데, 일반적으로 국가의 재정규모가 클수록, 복지프로그램의 규모가 클수록 재분배기능이 강하다. 스웨덴의 재정규모는 2009년 GDP의 56.6%, 프랑스는 55.6%, EU 평균은 50.1%, 우리나라는 31%다. 그런데 감세를 하면 재정규모가 작아져 복지국가의 길에서 더 멀어진다.
우리나라는 '세금 적게 내고, 복지혜택을 거의 받지 않는 구조'를 지금까지 유지해왔다. 그래서 일반정부 재정의 크기가 매우 작다. 한마디로 각자도생 사회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렇게 작은 재정마저 토건 형 경제예산(20%)이나 국방예산(10%)으로 사용되는 비중이 너무 크다. 흔히 복지예산으로 분류되는 '보건 및 사회보호' 예산의 비중은 2011년 현재 전체 예산의 28%에 불과하다. 프랑스 56%, 독일 60%, 일본 54%, 스웨덴 54% 등으로 주요 선진국들은 거의가 50%를 넘는다.
그러다보니, 'GDP 대비 사회복지비 지출의 비중'이 우리나라는 8.5%, OECD 평균은 21%, 주요 선진국들은 25-30%에 이르게 된 것이다. 상황을 바로잡아 나가야 한다. 우리나라가 복지국가로 되기 위해서는 'GDP 대비 사회복지비 지출의 비중'이 최소한 OECD 국가들 평균 수준까지는 도달해야 한다. 이것을 차기 정권 5년 동안 우리나라가 도달해야 할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일반정부의 재정규모를 대폭 늘려야 한다. 둘째, 정부재정 지출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
첫째와 관련해서는, 정부의 재정규모를 늘리기 위해 조세와 사회보장 기여금에 대한 증세를 추진해야 한다. 보편적 복지국가를 위해서는 누군가 돈을 더 내야 한다. 탈세를 방지하고 자산의 불로소득에 대한 세제를 강화하는 것 등으로 조세정의를 바로 세워야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재정의 증가가 부족하고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린다. 그래서 자산과 소득 모두에 대해 사회복지를 목적으로 하는 증세가 요구된다. 누진적이고 사회연대적인 증세가 가장 바람직하다.
▲ ⓒ프레시안(조형·사진=손문상) |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2008년 국민의 거센 반대를 물리치고 부자감세를 단행하였다. 애초 감세규모는 현 정부 4년 동안 약 98조 원에 달하였는데, 사회적 비판과 늘어나는 국채 때문에 일부 조정되어 최종 감세규모는 약 72조 원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 소득 재분배의 측면에서 이명박 정부의 감세정책은 평균소득의 150% 이상 계층에서 감세효과의 75% 이상의 혜택을 받으며, 상위 2%와 하위 98%를 기준으로 할 때 경우 50% 대 50% 의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감세로 인해 가장 우려되는 것의 하나는 재정적자의 증가인데, 2000년 이후 지난 9년간 흑자였던 통합재정수지가 2009년 대규모 적자로 돌아섰다. 그래서 국가채무가 2010년 407조 원에서 2014년에는 492조 원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렇게 늘어난 재정적자는 주로 부자감세와 토목공사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더욱 불행한 것은 이러한 재정적자는 장차 복지 투자를 제약하는 재정적 요인이 된다는 점인데, 이는 다음 정부의 복지투자 확대에도 큰 걸림돌이다.
참여정부는 연평균 10%에 달하는 전년대비 복지재정 증가를 실현하였다. 그럼에도 양극화를 막지 못하였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짝을 이룬 선별적 복지체계로는 아무리 온정적인 정부라 하더라도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복지의 제도화와 복지재정의 대대적인 확충에서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던 민주정부 10년이었지만, 구조적 수준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복지의 단순한 확대'가 아니라 '역동적 복지국가'를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달려왔다. 감세와 규제완화에다 구시대적 정책 유물인 토건경제까지 전면에 내세웠다. 설상가상으로 선별적 복지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복지재정마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이는 집권 3년을 넘기면서 레임덕 수준을 넘어 우리사회의 위기적 징조로도 볼 수 있다. 자살률 세계 1위다. 절대빈곤이 11%를 넘어섰으나 국민기초생활보장 대상자는 오히려 줄이고 있다. 차상위 소득계층에 대한 대책도 없다. 복지에 사용할 돈이 부족해서다.
2008년의 세계적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적극적 재정정책을 수행하느라 정부의 복지 지출을 대폭 늘린 시기를 제외하면, 2010년과 2011년의 전년대비 복지예산 증가율은 각각 1%와 6.3%다. 정부의 2010년 중기재정운용계획에 의하면, 2013년과 2014년에는 각각 전년대비 복지예산의 증가율을 5.7%와 4.3%로 잡고 있다. 참여정부의 복지재정 확충 수준에는 턱 없이 못 미친다. 우리 경제사회의 양극화와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복지수요는 더욱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이명박 정부는 앞으로도 일반정부의 재정규모를 늘릴 계획이 전혀 없다. GDP 대비 정부재정 규모를 현재 수준으로 가져간다는 계획이다. '세계에서 가장 세금 덜 내고, 복지 혜택 안 받는 나라', '신자유주의 시장만능국가의 각자도생 방식'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생각인 것이다. 일반정부의 재정 규모를 통제함과 더불어 정부재정에서 복지재정이 차지하는 비율을 늘릴 계획도 없다. 2011년 복지재정의 비중은 28%인데, 이를 2014년까지 29%로 묶어놓겠다는 것이 정부의 재정운용계획이다.
우리나라의 복지제도 중에서 가장 보편주의 수준이 높은 국민건강보험을 지켜내고, 더 유능한 제도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렇게 사회공공성 영역을 지켜내고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신자유주의 극복 전략이자 보편주의 복지국가 전략이다. 그 선봉에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가 서 있다. 이제 풀뿌리 보통시민들이 나서야 한다. 그래야 역동적 복지국가를 건설할 새로운 정치세력이 형성된다. 보편적 복지국가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주체적 조건을 만들자. 시민정치운동이 그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