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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 아닌 비혼, 외롭진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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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미혼 아닌 비혼, 외롭진 않지만…"

[인터뷰] "비혼 공동체에서 뭐하냐고요? 밥 먹죠!"

"비혼 여성 인터뷰요? 평소에는 연락도 없다가 꼭 명절 때만 찾으시더라."

비혼(非婚) 여성을 찾는 기자에게 한 비혼 여성이 한 말이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뜨끔하고 말았다. '명절맞이 결혼 종용 잔소리 세트' 경험담을 은근히 듣고 싶은 속내를 들키자 얼굴이 화끈거린다. "비혼 여성에게 쏟아지는 삐딱한 시선을 극복해보고자…"라며 기획 의도를 설명하는 기자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다행히도 설 연휴를 이틀 앞둔 31일, 여성단체 '언니네트워크'의 소개로 강은지(가명‧34) 씨를 만났다. 강 씨는 20대 후반부터 계속 혼자 살다가 1년 반 전부터 몇몇 친구들과 같은 동네에서 '느슨한 비혼 공동체'를 꾸려온 비혼 여성이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뜻인 '미혼'과는 달리, '비혼'이라는 단어는 개인이 혼인 여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뉘앙스가 강하다. 강 씨는 "비혼은 '결혼이라는 정답'이 없음을 전제하는 것"이라며 "결혼이라는 제도의 존재 여부를 떠나 우리 삶을 우리 스스로 꾸려갈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이어 "비혼은 완결된 무엇이 아니라 계속 진행되는 과정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편집자>


"보호받을 울타리가 필요하다고?"…"천만에"

▲ 비혼을 선택한 이들의 다양한 삶을 그린 책인 <언니들, 집을 나가다>는 결혼에서 자신이 꿈꾸는 삶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 성소수자 커플, 결혼에 발을 담갔다 뺄 수밖에 없던 사람들 등 비혼을 선택한 사람의 스펙트럼도 다양하다고 지적한다. ⓒ교보문고
프레시안
: '비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강은지 : 특정한 사건이나 계기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가장 큰 영향이 있다면 본받고 싶은 결혼 모델을 만나기 어려웠다 점이다. 가족, 친지, 친구들 심지어 드라마에 나오는 결혼한 가정의 모습을 봐도 결혼이 괜찮은 것 같은 느낌이 안 오더라. 나의 어머니를 비롯한 사람들은 결혼을 당연하게 여기는데 나는 철들면서 '왜 꼭 그래야 할까' 하고 생각했다.

굳이 해봐야만 다 아는 것은 아니다. 해보지 않아도 웬만큼은 알 수 있다. 성향이 비혼에 가까운 것 같다. 개인주의적이고 독립적이다. 삶에서 타인과 지속적으로 끈끈한 관계를 맺지 않는 편이다. 연애 의존적이지 않고 연애도 잘 안 한다. 사람들 안에서의 관계는 좋아하지만 배타적인 일대일 관계는 익숙하지 않다.

프레시안 :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등 주위의 반응은?

강은지 : 프리랜서 작가가 직업이라서 사는 방식이 남들과 다르다(직장 동료에게 결혼을 강요받지 않는다). 가족들도 처음에는 결혼했으면 하고 바랐지만, 시간이 지나니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에 대해서 인정하거나 포기하신 것 같다. 부모님은 보수적이시긴 해도 폭력적으로 대하지는 않는다.

예전부터 알던 친구는 (내가 비혼이라는 것을) 아니까 괜찮다. 그런데 신뢰성 없는 사이에서 "넌 왜 결혼 안 하냐, 여자가 말이야." "이미 똥차다. 여자로서의 너는 가치가 없다." 이런 뉘앙스로 툭툭 말하는 사람이 있다. "네가 보호받을 수 있는 울타리가 필요하지 않니"라는 말도 선의를 가장하지만 유쾌하지 않다. 내가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비혼 여성이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존재로 여겨질 때 기분이 나쁘다. 어떤 사람들은 '내조를 해줘야 할 여성'이 내조를 거부하면 손가락질한다.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해 존중하지 않는 것 같다.

프레시안 : 연애와 결혼의 차이가 있다면?

강은지 : 연애는 애인이나 파트너와의 관계만 생각하면 되지만, 결혼이라는 그 사람과 그의 모든 가족까지를 챙겨야 한다. 서로 챙기면 상관이 없는데, 여자 쪽에서 더 많은 걸 해야 하는 구조다. 임신이라도 하면 직장에서 먼저 잘리는 쪽이 여자다. 직장에서도 기혼 여성보다는 기혼 남성의 노동력을 훨씬 중요시 한다. 여자들의 생애주기는 출산, 육아 모든 것들이 불안하다고 간주된다.

프레시안 : 비혼이라는 선택이 결혼하겠다는 쪽으로 변할 수도 있나?

강은지 : 앞으로 내가 결혼할 확률은 없지만, (굳이 변해야 한다면) 다른 방식의 파트너십을 만들려고 할 것 같다. 혼인이라는 지위를 획득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법률적으로 혼인 신고를 하지 않는 식으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친구가 지난해 결혼했는데, 결혼식을 예식장 빌리지 않고 회사 앞마당에서 동네잔치처럼 했다. 예쁜 옷도 입고 오지 말라고 하고, 화환도 안 받고 편하게 노는 자리로 결혼식을 기획 했는데 참 좋아 보이더라. 결혼 안이든 밖이든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는 게 필요하다.

프레시안 : '결혼하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

강은지 : 결혼하라는 권유를 할 때 그 사람이 자기의 긍정적인 경험으로부터 결혼하라고 권유하면 진지하게 생각해 볼 텐데, 남들이 하니까 너도 해야 하지 않겠니? 그러면 별로 해줄 말이 없다.

"비혼 공동체가 만나서 뭐하냐고요? 밥 먹죠!"

프레시안 : 비혼으로 살면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면?

강은지 : 혼자 있을 때 아플 경우가 비혼에게는 큰 고민이다. 하지만 건강에 대한 고민에도 대안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비혼 여성들 사이에 여성주의 의료 생협에 대한 움직임이 있다. 서로가 서로를 돌볼 수 있는 구조들이 하나씩 생겨난다. 그런 걸 꿈꾸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비혼으로 사는 데 매사가 고달프거나 피곤하거나 걱정스럽지는 않다.

비혼인 동지와 친구들, 커뮤니티를 접하면서 비혼을 선택한다는 것이 꼭 혼자 외롭게 쓸쓸하게 늙어가는 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 게 큰 수확이다. 각자가 비혼에 대해 그리는 색은 다르다. 다르다고 튕겨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비혼이 어울려 여러 색깔 낼 수 있는 게 매력적이다.

프레시안 : 왜 하필 비혼 공동체인가?

강은지 : 서로가 서로에게 지지자가 되어주는 거다. 일종의 약한 보험이다. 내가 사는 서울 말고도, 전주에 비혼들이 모여 문화 공간을 열었다. 거기에 상주하는 사람에게 최소한의 활동비를 지급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게 해주고, 회비를 모아서 급할 때 돈을 대주기도 하고, 일과 삶을 같이 하며 서로에게 삶의 조건을 지지해준다. 같이 서로 어깨를 맞댈 수 있는 관계가 비혼들에게는 필요하다.

내 주위에는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가 많다. 직장에 매여 있는 친구들이 많지 않다. 공부하거나 시민운동 단체에서 일하는 친구들이라 서로 비슷하다. 삶에 대한 불안정함도 비슷하다. 둘씩 살기도 하고 한 명씩 살기도 하고, 열 명 정도가 서울에서 느슨한 공동체를 꾸리고 있다.

프레시안 : 비혼 공동체를 꾸리고 살고 있다면 활동하면서 재미있는 것은?

강렬한 재미라기보다는 생활이고 일상이라서 색이 뚜렷하지 않다. 만나서 밥 먹는다. 식탁이 확장된다. 식솔의 개념이랄까. 약속을 정해서 밥을 먹기도 하지만 "밥 떨어졌으니 밥 좀 주라"라고 아무 때나 무턱대고 말해도 좋은 사이다. 밥이라는 것의 의미에 따스함이 있다.

프레시안 : 비혼 여성이 결혼하면 비혼 공동체의 멤버십은 어떻게 되나?

강은지 : 관계를 유지하면서 결혼과 비혼 사이에 고리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결혼이라는 계기로 무 자르듯 끊어지는 관계는 공동체라고 말할 수 없다.

프레시안 : 비혼 남성 공동체는 왜 없을까?

강은지 : 글쎄. 비혼 남성 공동체는 들어본 적이 없다. 남자들은 비혼 선언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독신이라고 하지, 비혼이라고 당당하게 얘기하기 힘든 분위기도 있다. 남자에게 요구되는 부양의 의무도 있고. 남자들에게도 (비혼 정체성은) 짐이 되는데 당당하게 벗어던지기 힘든 것도 있을 것 같다.

"인터넷 회원가입란에 '비혼' 선택지도 있었으면…"

▲ 강 씨는 "인터넷에서 회원 가입할 때 체크 박스에 미혼‧기혼 외에 '비혼'란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진은 네이버 지식인에 올라온 질문들을 캡쳐한 것. 이혼과 사별을 포괄하는 개념인 '비혼'란이 있었다면 이러한 질문은 간단히 해결됐을지도 모른다.

프레시안 : 한국 사회 제도가 '비혼'한 사람에게 가하는 차별이 있다면?

강은지 : 주거비 지원이 전혀 없다. 혼자 사는 비혼은 주거가 너무 불안정하다. 전세자금도 만 35세 미만은 대출받을 수 없다. 사실은 혼자 사는 비혼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큰 요인이 바로 주거다. 임대주택도 결혼한 가정에게 우선순위가 주어지기 때문에. 의식주에서 '주' 부분이 힘들다.

프레시안 : 저출산 고령화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런 문제를 비혼 여성 탓으로 돌리는 이들도 있다.

강은지 : 비혼 여성들이 아이를 입양할 수 있는 토대가 없다. 부모가 낳은 정상가족만 '정상'이라고 한다. 아이를 키우고 입양할 수 없는 인프라가 없는데 왜 그 책임을 비혼이 져야 하나. 기혼도 아이 낳기 힘든 세상에, 그 화살을 비혼에게 돌릴 게 아니라 정부와 사회에 돌려야 맞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 자체가 잘못됐다.

프레시안 : 한국 사회가 결혼을 못 하게 하는 사회라고 보나?

강은지 : 정상적인 결혼이나 가족의 테두리가 너무 좁다. 요즘에야 사실혼이나 동거가 어느 정도 법적 지위를 인정받는다 해도 너무 차등이 크다. 주변에도 혈연이 아니고 친구지만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같이 지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식의 파트너십이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 정상 가족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다 튕겨져 나온다. 많은 사람들을 배제하는 개념인 가족의 의미가 달라져야 한다. 이혼율이 이렇게 높아도 한 부모 가정은 비정상으로 취급하는 것부터 달라져야 한다. 일인 가족들이 설 자리가 생기고 사회적 보장을 해줄 수 있는 토대가 필요하다.

프레시안 : 한국 사회에서 바뀌었으면 하는 제도가 있다면?

강은지 : 인터넷에서 회원 가입할 때 체크 박스에 미혼‧기혼란 외에도 '비혼'란이 있었으면 한다. 미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싶지 않은데, 기혼은 아니니까 어쩔 수 없이 미혼을 선택하는 게 답답하다. 사소하지만 큰 부분이다.

프레시안 : 나에게 가족이란?

강은지 : 현재로서는 가족이라는 무게감이 많이 덜어졌다. 혈연 가족에 대해서 무거움은 남아있지만 안달복달하지 않을 수 있는 정도의 거리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도 가족이 될 수 있겠구나. 하지만 외부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쉽게 가족이라는 이름을 붙일 것 같지 않다. 이후에 비혼으로 꾸릴 가족 생각해 보면, 비혼 여성운동에 대해 지향이 비슷하고 서로 기댈 수 있는 관계라면 가족이라고 이름 붙여도 되겠구나 싶다. 가족이라고 해서 꼭 같이 한 공간에서 살 필요도 없을 것 같다.

프레시안 : 앞으로의 계획은?

강은지 : 독립예술가 네트워크에 관심이 있다. 주변에 연극, 영화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생계는 다른 데서 마련해야 한다. 예술 하는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최소한의 생활비를 보장받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싶다. 나도 글을 쓰는 일을 전문적으로 해서 (굳이 비혼이라고 명명하진 않겠지만) 소수자 이야기, 다른 식의 삶의 가능성을 얘기하는 공간을 만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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