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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부장 인계문서에 김상만 <동아> 사장 각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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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부장 인계문서에 김상만 <동아> 사장 각서가…"

[자유언론, 동아투위 그리고 나의 삶 ②]

올해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사건이 발생한 지 35년이 됐다. 유신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중앙정보부의 광고탄압과 이같은 부당한 공권력에 굴복해 동아일보사가 134명의 언론인들을 대량 해고한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동안 113명의 투위원 가운데 14명이 작고했다.

동아투위 사건은 언론개혁 운동의 시발점으로 역사적 재조명을 받기도 했으나 정작 피해 언론인들의 명예회복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다.

지난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진상규명위원회'는 동아투위 사태가 정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 때문에 일어났다고 결론짓고 정부와 동아일보사가 피해 언론인들에게 사과하고 명예를 회복시켜줄 것을 권고했다. 독립된 정부기구가 해직사태의 가해자를 밝혀냈음에도 1년이 지나도록 국가와 동아일보사는 이 권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더욱이 국가권력의 피해자이기도 한 동아일보사는 당시의 해직사태 이유를 경영난 탓으로 돌리며 진실화해위의 권고에 이의신청을 내기도 했다. 이에 동아투위는 지난해 12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 현재 공판이 진행 중이다.

이 글은 해직언론인이자 전직 정치인인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1975년의 '동아광고탄압과 언론인 대거해임사태'와 관련한 민사소송에 동아투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재판부에 제출한 자신의 삶의 발자취이다.

6회에 걸쳐 연재될 이 글에는 이부영 전 의장이 자유언론과 민주화 운동, 그리고 정치참여 과정에 겪은 숱한 사건와 뒷얘기들이 기술되어 있다. 동아투위 사건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지난 35년 동안 우리가 겪어온 주요한 사건들의 의미를 되새겨볼 대목들이 많을 것이다. 이 전 의장은 자신을 민주화운동가나 정치인이기 보다는 언론인으로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편집자>


전편보기 : 동아투위, 35년 싸움의 시작

3. 동아투위 성립 이후의 삶

가. '청우회 사건' 1차 투옥


유신체제 아래서 체제 밖의 삶이란 바로 국가폭력에 내맡겨지는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 개인이 사라지고 구속되고 고문당하는지 알 수 없던 시절이었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서 해직된 134명의 언론인들은 축출된 바로 다음날 한국언론회관에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약칭 동아투위)를 결성했다. 초대위원장에는 나와 함께 문화부에서 차장으로 일했던 권영자 선배가 맡았다. 나는 동아노조에 이어서 동아투위의 대변인 역할도 맡았다. 동아투위는 동아 언론인들의 대량축출의 부당성과 자유언론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뛰어다녔다. 필경(筆耕)과 등사판을 이용하여 매일 유인물을 수백부씩 만들어서 외신기자들, 다른 언론사 기자들, 대학교수들, 문화예술인들, 종교인들에게 배포했다.

시간이 흐르자 중앙정보부 등 수사정보기관에서는 동아투위원들의 그런 활동을 주시하기 시작했고 특히 나의 외신기자접촉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드디어 여러 가지 이유로 동아투위원들이 구속되거나 구류처분당하는 일이 계속 벌어졌다. 서울대 학생회에서 동아언론인 집단해고사태의 부당성을 알리고 자유언론투쟁의 정당성을 알리는 연극 '진동아굿'을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에 갔다가 학생들의 요청으로 '동아사태'의 전말을 설명한 것이 필자가 구류처분을 당한 이유였다. 동아언론인들을 회사 밖으로 축출한 이상, 그들의 자유언론 투쟁이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그래서 그들이 축출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럴듯한 이유가 만들어져야 했다. 필자가 미리 각오한 바이기는 했지만 정권탄압의 촉수가 점차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975년 5월초 미국 AP통신의 부사장 겸 대기자인 존 로더릭이 서울을 방문, 동아일보 사태를 취재하겠다고 해서, 자유언론 농성현장을 우리와 함께 지키다가 함께 쫒겨난 제임스 시노트 신부의 안내로 그를 플라자 호텔 로비 커피점에서 만났다. 우리 회견 자리 주변에는 중앙정보부원을 비롯한 여러 정보기관원들이 촉각을 세우고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의 화제는 동아사태 뿐 아니라 민청학련 사건과 처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인혁당 희생자들에 관한 것 등 꽤 광범한 내용이었다. 워싱턴포스트의 돈 오버도퍼, 뉴욕 타임스의 리차드 핼로런 등 미국 영국 유럽 일본의 여러 외신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숨바꼭질이 있었고 기관원들이 주변을 맴돌았다. 동아 언론인들이 축출되기 얼마 전에 유신국회에서는 외국인에게 대한민국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을 하는 경우, 국가모독죄로 처벌할 수 있는 형법 104조 2항이 개정, 신설되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했던가,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 동아투위원들에게 닥쳐오던 가혹한 운명은 너울처럼 겹쳐왔다. 학교 다닐 때 같은 서클 선배였고 동아일보에 먼저 들어왔다가 민주화운동에 전념하겠다고 회사를 그 얼마 전 떠난 이창홍이 중앙정보부에 자수하여 필자와 성유보 그리고 정정봉이라는 또 다른 선배와 만나 나눴던 이야기들을 모두 털어놨다는 것이었다. 우리들과 그는 동아일보 안의 여러 문제들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지만, 그보다는 민청학련 사건의 주모자급 후배들을 이창홍이 만나 간여한 것 때문에 수배를 당했는데 주모자급 후배들이 사형과 무기징역형을 받는 것에 대해 충격과 공포에 짓눌려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가 제 발로 중앙정보부에 걸어 들어갔다고 그의 부인이 나에게 알려왔다. 이창홍은 민청학련에는 간여한 것이 아니었고 나와 성유보 등과 동아의 자유언론운동에 간여했다는 쪽으로 정보부에서 진술했다는 것이었다. 즉 무거운 쪽으로부터는 빠져나오고 가벼운 쪽을 넘겨주겠다는 의도였다. 나눈 이야기라는 것이 대단한 것이 못돼서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 1975년 6월 9일 이부영 동아투위 대변인이 연행되고 있다. ⓒ이부영

1975년 6월초 나는 돌을 갓 넘긴 첫 딸과 함께 둘째 아이의 출산을 위해 처가가 있는 부산에 머물고 있던 아내를 만나러 갔다. 둘째 아이는 아들이었다. 출산 사흘 만에 서울에 돌아오자 말자 언론회관 투위 모임에 나갔다가 중앙정보부원들에게 동지들이 보는 앞에서 연행됐다. 두 어린 것을 데리고 처가에 머물고 있던 아내의 얼굴이 연행 순간 떠올랐다. 그리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나는 중앙정보부 6국, 이른바 정치적 사건을 다루는 수사국에서 조사받았다.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 사건 등을 다룬 악명 높은 부서였다. 수사관들은 나를 의도적으로 조금 먼 거리에 있는 3층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그곳이 최 교수가 뛰어내려 자살한 곳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를 담당한 수사관은 3명이었는데 2명은 경찰 수사관 출신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헌병 출신이었다. 경찰 출신 가운데 한 사람은 50대 중반의 나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나를 넘겨받자 말자 지하실의 골방으로 끌고 내려갔다. 그곳에는 한쪽에 야전침대 몽둥이들이 잔뜩 쌓여 있었는데 그는 다짜고짜 나를 엎드려뻗쳐 자세를 시키고 이른바 빠따를 치기 시작했다. 짙은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그는 "너희 서울대놈 새끼들은 힘들여 가르쳐 놓으니까 빨갱이나 된다. 무엇이 부족해서 역적이 되느냐"고 미친 듯이 소리치면서 때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조사나 해보고 말합시다"고 실랑이를 벌였다. 그 뒤의 조사과정에서도 그는 선임자로서 옆에 서있으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커다란 삼각뿔자로 나의 등과 어깨를 때리고 때로는 찌르기도 했다. 사흘 동안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나는 심한 설사증세를 보였다. 그는 나를 지하 조사실로 끌고 가서 다시 구타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설사를 해버렸다. 그를 수행했던 공채출신 보조 수사관이 그를 만류했고 나를 샤워실로 데리고 가서 씻도록 해주었다.

그날 밤 지하 3층 조사실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데 문을 열고 누가 들어섰다. 겁이 덜컥 났다. 들어선 사람은 큰 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물고문을 하려고 왔나보다고 긴장했다. "야 부영아, 나다. 성태경이야." 나의 고등학교 1년 선배, 유명한 럭비선수 성태경이 서있었다. "마음 놔, 네가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서 찾아왔다. 술이나 한 잔 하자"면서 반말들이 대주전자에 생맥주를 가득 담고 점퍼 주머니에 닭튀김을 넣고 나타났다. 그가 정보부 수사관으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풍편으로 들은 바 있었다. 그날 그와 나는 새벽 3시에 가깝도록 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언론자유 문제로 이렇게 다루는 것에 불만을 말하자 자기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이런 시국에서는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도리 밖에 없다고 위로했다. 오래 고생하지 않을 것이니까 몸만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정말 그 다음날부터 평안도 말씨의 서북청년단 출신은 나타나지 않고 다른 수사관이 보충되었다. 수사는 이창홍의 진술대로 진행되었다. 고대총장을 지낸 김상협의 '모택동 사상'과 육군사관학교 교재인 버트람 울프의 '레닌에서 흐루시쵸프까지'라는 책(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시리즈)이 내가 공산주의에 심취해서 읽은 책으로 압수목록에 들어갔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그리고 긴급조치 9호와 형법 104조 2항(국가모독)이 나에게 적용된 위반법령이었다. 이른바 '청우회' 사건이라는 대단한 사건으로 포장되어 발표되었다.

중앙정보부로부터 서울지검으로 송치되자 검사의 신문에 응해야 했다. 그는 정보부 조서를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베끼고 있었다. 물정을 잘 모르던 나는 이창홍의 자의적 진술대로 작성된 정보부 조서는 나 자신의 임의성이 무시되었다고 항의하자 그러면 정보부에 다시 가서 조사받는 도리 밖에 없다고 정보부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정보부에 다시 보내겠다는 협박이었다. 나는 웃으면서 그대로 하라고 말했다.

1심 재판에 나의 경우 서울지법과 영등포지원 두 곳을 번갈아 가면서 출정했다. 이른바 '청우회' 사건의 경우엔 서울지법에서, 서울대 데모 배후조종 혐의에 대해서는 영등포지원에서 재판 받았다. 사건들이 폭주해서 재판을 늦게 시작한 탓으로 한 주일에 3회 이상 재판정에 나갔다. 1심 재판의 형량은 '청우회' 사건의 경우 구형 15년에 선고 8년, 서울대 데모배후조종의 경우는 구형 3년에 선고 1년, 도합 구형 18년에 선고 9년이었다. 한겨울 추운 날씨에 구치소로, 재판정으로 쫓아다니던 아내는 1심 선고가 있던 날, 장기형을 선고받고 나오는 나에게 "여보, 밥 잘 먹고 기운내요"라고 소리쳤다. 기죽지 말고 건강해야한다는 뜻이겠지, 나는 미소로 답했다. 많은 동료 동아투위원들이 재판정에 응원 나와 주었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나와 성유보가 관련된 '청우회'사건을 통해 동아자유언론운동을 왜곡하고 유린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굳굳하게 우리를 믿고 성원해 주었다.

내가 서울지법에서 재판받는 동안 취재하러온 지난날의 언론사 동료 기자들과 자주 얼굴을 마주쳤다. 동아 기자들은 차마 내 앞에 나타나지 못했다. 다른 언론사 기자들은 다가와 따듯한 위로의 한두 마디 말을 건네고 갔다. 시세 흐름에 빠르기로 소문났던 몇몇 기자들은 "꼴좋다. 그렇게 날뛰더니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모욕적인 시선을 던졌다. 그들은 박정희 정권 뿐 아니라 전두환, 노태우 정권 그리고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서도 언론계에서 승승장구했다. 어떤 정치상황에서도 더 빨리, 오히려 앞서 순응해나가는 저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 뒤로도 계속 고민한 주제였다.

1심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영등포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1975년 한여름 8월 20일 경 아내가 초췌한 얼굴로 면회 왔다. 장준하 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추락사하셨다고 발표되었지만 믿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장 선생께서 8월 17일 돌아가시고 장사를 치른 다음 바로 면회왔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심경이었다. 나는 나의 작은 독방(0.72평)에서 사과와 참외, 그곳의 밥과 찬으로 제상을 차리고 홀로 예를 올렸다. 선생님의 독립, 민주, 통일의 유지를 이어갈 것을 다짐하면서.

항소심 재판은 싱겁게 끝났다. 심리할 것이 없었다. 항소심은 1심 선고 9년 형을 2년 6월 징역형으로 줄였다. 정치범들에 대한 형의 선고에 중앙정보부의 개입 조정이 있었던 것은 이제 공지의 사실이 되어 있다. 중앙정보부장이 신직수로부터 김재규로 바뀐 것이 정치범의 형량이 대폭 줄어든 원인이었다. 보안법이나 긴급조치로 정치범을 될수록 잡아들이지도 않았다. 1976년 중반 이후의 추세였다. 반성문만 쓰면 웬만하면 석방했던 것도 김재규의 방침이었다.

우리들을 변호해준 분들은 홍성우 황인철 이돈명 강신옥 조준희 이범열 변호사였다. 홍성우 황인철 변호사는 동아 노조 때부터 한결같이 우리와 함께 해주었다. 그 뒤 숱한 나의 송사에 그 분들은 선배가 되고 동지가 되어 주었다. 나의 대학 동기이자 민주화운동을 뒷바라지해온 김정남은 홍성우 변호사와 황인철 변호사를 위해 재판 준비를 도왔다. 1심 재판 동안 머물렀던 영등포구치소에서 많은 서울대생들을 만났다. 1975년 긴급조치 9호에 정면으로 대항한 서울대 5.22사건 때문에 구속된, 신입생으로 아직 미성년이었던 박원순 변호사, 나의 같은 사건 공범이었던 이신범 전 의원, 이호웅 전 의원, 그리고 그 뒤 나와 재야운동을 함께 했던 문화운동가 김도연, 시인 김정환, 지금은 고인이 된 시인 채광석 등 많은 서울대 졸업생과 재학생 활동가들을 만났다.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구속되어 재판받는 것을 보면서 유신체제는 오래 갈 수 없는 체제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항소심 재판 동안에 머물렀던 서울구치소에서는 더 많은 시국사범 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영등포 구치소가 서울대생들 천지였다면 서울구치소는 전국의 남녀노소 정치범들의 집합소 같은 곳이었다. 함세웅 문정현 신부 같은 종교인, 김지하 시인, 한승헌 변호사, 지금은 특임장관이 된 이재오 의원, 최열 환경재단 대표, 조성우 민화협 공동대표, 서상섭 전 의원 등등 많은 민주인사들이 갇혀 있었다. 김지하 시인에게 나로서는 마음의 큰 부담을 지고 있었다. 1975년 2월 그가 민청학련 사건에서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을 때, 나는 그로부터 '고행 1974년'라는 제목의 옥중수기를 받아 동아일보에 실었다. 무엇보다 그 글에 인혁당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되었다는 사형수 하재완의 증언이 최초로 공개됐다. 이제는 인혁당 사건이 고문 조작으로 8명의 생명을 사법살인한 치욕적 사건으로 판결되어 법원에 의해 명예가 회복되었지만 당시에는 그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하는 일이었다. 김 시인은 바로 재수감되어 그 자신이 박 정권의 사법살인의 희생양 처지를 피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를 살리기 위한 '양심선언' 반출 작전이 내가 서울구치소에 머무는 동안 진행되고 있었다. 김정남-전병용 라인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비밀리에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성공하기만 빌었다. 김지하를 살린 사람들은 많았다. 나중에 인권변호사로 큰 역할을 했던 조영래가 양심선언의 문장을 다듬었으며 김수환 추기경과 윤형중 원로신부님을 비롯해서 한국과 일본의 천주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움직였고 이름 없는 소년수 출소자까지 기여했다. 그런가 하면 이병철의 삼성재벌의 승계문제 때문에 형제 골육상쟁이 일어나 그 둘째 아들 이창희가 나와 같은 사동에 갇혀있기도 했다. 그는 폐소공포증 때문인지 감방 안에 갇혀있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항상 문을 따놓기를 바라니 딱한 노릇이었다. 당시 서울구치소 교도관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인사들이 유신반대 취지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민주인사들을 돕고 있었다. 지금은 모두 은퇴했지만 전병용, 한재동, 김제술 등 여러 헌신적인 동지들을 만났다. 지금도 그 때 만났던 교도관 출신 인사들의 친목모임에 가끔 나를 불러 함께 산에도 가고 회식을 하기도 한다.

항소심에서 2년 6월형이 확정되자 나는 안양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역시 그곳에도 30여명의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정치범들과 함께 수용되기 전 한 달 동안 5평 남짓 되는 감방에 14명의 일반수들, 다시 말해 강절도범과 사기범들과 함께 생활했다. 한 여름 뜨거운 슬라브 지붕 밑의 2층 감방 안은 사람들의 체열까지 더해져 한증막이나 다름없었다. 용케 참다가 자주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팬티만 걸치고 있어도 더웠다. 대법원 확정 판결이 있자 이른바 형 확정방으로 옮겼는데 그곳이 정치범들만 모아 놓은 곳이었다. 나는 연세대 출신으로 나중에 농민운동가가 된 강기종 군 그리고 서울대 출신으로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지금은 변호사가 된 송병춘 군과 한 방에 살게 되었다. 그곳에는 이미 영등포와 서울 구치소에서 만났던 이호웅 최열 조성우 이명준 그리고 민청학련 사건의 김효순 등 학생운동 출신들과 이창복 김종대 황현승 정만진 이재형 등 인혁당 사건 인사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하루 한 번 30분 동안의 운동시간에 넓은 운동장에서 함께 축구시합을 하는 것이 큰 낙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30분을 뛰고 나서 세면장에서 찬물로 목욕하고 나면 상쾌했다. 감방 안에서는 열심히 공부했다. 여러 차례 감옥생활 가운데 꽤 충실한 생활이었던 것으로 기억됐다. 책 검열이 엄격해서 성경 등 종교서적과 문학 서적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총서 12권을 처음부터 읽어나갔다. 수메르 바빌로니아 에집트 등 상고사에서부터 고대 중세 근현대를 차례로 읽었다. 희랍어 라틴어까지 나오는 방대한 문헌을 나의 빈약한 어학으로 모두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개략적으로 살펴보는 재미는 오랜만에 맛보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맺어진 인연들은 그 후 민주화운동을 전개해 나가는데 큰 기여를 했다.

안양교도소의 행복한(?) 수용생활은 1976년 연말에 끝났다. 나는 인혁당 사건 관련자 이창복 김종대선생과 학생운동 관련자 이명준 등과 함께 전주교도소로 이송됐다. 이제 본격적인 고생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주교도소의 특별사동에 수용됐다. 특별사동이란 정말 특별한 사람들만 수용된 곳이었다. 이미 먼저 와있던 인혁당 관련자 전창일 유진곤 김한덕 강창덕선생과, 오래 전 그러니까 20여년~10여년 전부터 수용되어 있던 미전향 장기수 15명 정도가 그 특별사동에서 갇혀있었다. 특별사동의 왼쪽 남향으로만 0.72평짜리 독방 32개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중앙정보부의 직할통제를 받는 '전향공작반'이 교도소의 교무과 안에 배속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 반정부 정치범들을 미전향 장기수들 감방 사이사이에 끼워 넣어 수용했다.

그리고 미전향 장기수들과 통방하면 국가보안법 추가기소를 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첫 번째 환경변화는 좁은 방안에 높이 달린 스피커를 통해 고음으로 흘러나오는, 전날 방송된 10분짜리 KBS 대북방송이었다. 오승용이라는 성우가 진행하던 그 프로는 "김일성이 이 놈, 네가 제 명에 죽을 줄 아느냐....." 뭐 그런 내용이었다. 좁은 방안에서 하루에 10차례 이상 같은 내용을 반목해서 듣도록 하는 '전향공작'이었다. 소리를 피하기 위해 창문 쪽으로 달린 변소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아 봐도 사동 전체를 울리는 방송소리를 피할 길은 없었다. 그것은 심리전 고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보다 먼저 와서 생활하고 있었던 수용자들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는 작심하고 일종의 난동(?)을 부렸다. 감방 문짝을 발로 차고 소리를 질렀다. "방송 고문 중단하라"면서 교도소장 면담을 요구했다. 그러자 교무과장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나는 방송을 중단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그 조치는 오래 전부터 해온 것으로 중단할 수 없으며 오히려 나와 같은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의 전향공작을 더욱 강화할 예정이라고 통고했다. 혹 떼려다 혹을 붙인 꼴이 되었다. 나는 전향해야 할 대상이 없는 대한민국 국민이니까 전향공작을 거부한다고 통보했다. 다시 감방 안으로 들어와서 방송이 나오면 계속 방문을 걷어차고 소리를 질렀다. 며칠 이런 상태가 계속되자 방송의 횟수가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중단되었다. 어느 겨울날 하루 30분 두 명씩 운동하도록 하는 운동시간에 옆방 미전향 장기수 고광인 선생이 나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그 방송소리 시간 조금 지나면 자장가처럼 들려요.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1973년 사회안전법(**미전향수가 전향하지 않으면 2년마다 심사하여 수감을 연장토록 한 법)이 생기고 나서 이 독방에 깡패를 함께 넣어서 두들겨 패도록 했고 한 겨울에 방 안에 찬물을 끼얹어서 폐렴이 걸려 죽게 만들곤 했어요." 전향공작반원들은 전향에 성공하면 성공보수를 받도록 했기 때문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래도 75년부터 긴급조치로 반정부 정치범들이 들어오면서 전향공작이 부드러워졌다는 것이었다.

1976년의 겨울 추위는 혹독했다. 밖의 기온이 영하 10도 정도이면 독방의 실내 온도는 13~4도로 내려갔다. 시멘트 응달의 냉장효과가 더해지는 탓이었다. 잠자고 일어나면 빰과 코가 얼었다. 마루바닥에 깔고 자는 가마니와 요는 찬 바닥공기와 체온 탓으로 습기에 흠뻑 젖었다. 한 겨울에 말릴 곳도 마땅치 않아 다시 그대로 깔고 잤다.

1977년 2월 문익환 목사께서 전주교도소로 이감 오셨다. 76년 3·1구국선언이 있은 뒤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진 것이었다. 절친한 친구 장준하 선생이 1975년 8월 의문의 죽음을 당하신 것에 격분, "장준하의 혼이 나를 씌웠다"면서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문 목사는 그 뒤 80년대 동안 내가 모시고 운동을 벌인 어른이었다. 우리의 인연은 전주교도소에서 맺어졌다. 그 분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청년이셨다. 나는 그 분의 동생이신 문동환 목사는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분은 전주에서 처음 만났다. 아직 한 겨울인데도 사모님 고생시키지 않겠다면서 세면장에서 손수 빨래를 하시고 우리들에게는 요가수행 방법이나 심신단련법을 가르치셨다. 그 즈음에는 정치범들 사이의 통방(뒤 창문으로 수감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이 수월해져 있었다. 내가 이감온 이후 특별사동을 내려다보는 바로 옆의 2사 상층의 일반 재소자들이 특별사동의 정치범들이 통방하는 것을 내려다 보고 전향공작반에 고자질해서, 공작반이 국가보안법 추가기소하겠다고 소동을 벌이고 특별사동의 각개 독방 뒤 창문을 나무판자로 막아버린 사건이 있었다. 방 안에서 하늘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하늘이라도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항의해서 겨우 나무판자를 제거할 수 있었다. 일반 재소자들은 정치범들의 통방을 고발하면 감형과 가출옥의 혜택을 볼 수 있었다. 그에 대한 대응방안으로 정치범들은 호를 지어 서로를 부르면서 통방했다. 그래서 한문에 능한 강창덕 선생이 나에게는 청우(靑牛)라는 호를 지어 주셨다. 나는 강 선생께 "하필 공화당의 상징인 소를 붙여 호를 지어 주셨느냐"고 항의했더니, "젊게 왕성하게 일할 사람이어서 그랬다"는 말씀이었다. 예를 들면 문익환 목사님이 나에게 통방하시려면, "9방 이부영 동지 좀 나오시게"처럼 일반재소자들이 모두 알아듣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청우 동지, 좀 나오시게"라고 부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작은 오해가 생기곤 했다. 나의 사건 이름이 '청우회'(靑友會)여서 호도 그렇게 지은 것이 아니냐는 게다. 그것은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나는 강 선생께 감사하게 생각한다. 비록 강 선생이 자신의 호를 나의 호 보다 더 멋있는 야성(野星) 또는 들별이라고 지은 것에 불평을 말하곤 했지만.

1977년 5월에 접어들면서 전향공작반에서는 전향서가 아니라 반성문을 쓰면 석방하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것도 모든 반정부 정치범에 대해서가 아니라 형량이 얼마 남지 않은 극히 일부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공작이었다. 확신범의 경우 자신의 신념을 굽혔다는 죄의식 때문에 더 이상 민주화운동에 나서지 못하게 만들려는 저의가 깔려 있었다. 우리는 단식투쟁으로 저항했다. 교도소 측은 나를 특별사동에서 떼어내 병사로 옮겨놓았다. 그곳에서 의외의 인물 강문봉 장군을 만났다. 그는 1976년 10월 국군의 날 행사장에서 박정희를 저격하려 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다고 했다. 그가 1956년에 일어난 특무대장 김창룡 장군 저격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구속되었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강 장군은 해방 직후부터 76년 그 당시까지도 한국 정계와 군부를 배후에서 움직이던 미8군 사령관 고문 하우스만을 만난 것이 박정희를 저격하려했다는 혐의로 둔갑하여 구속된 것이었다. 중장으로 예편한 강 장군은 4·19혁명으로 석방되었다가 5·16 뒤에 공화당 국회의원, 대사로 기용되었고 유신 선포 뒤에는 유정회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했다. 박정희와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선후배 사이였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사흘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매만 맞았다고 했다. 1977년 11월의 교도소 안의 바람은 벌써 겨울이었다. 대법원 형이 확정된 강 장군이 머리를 깎는 날이었다. 병사 작은 뒷마당의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강 장군이 머리를 깎고 있었다. 그 앞을 전향한 좌익 무기수 몇 사람이 출역(出役)차 지나가다가 강 장군을 보고 "당신 강문봉 장군 아니시오. 어찌 된 일이요?"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지난 1957년 처음 강 장군이 구속되었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났던 장기수들을 20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서로 건강히 지내시라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는 1977년 12월 28일 2년 7개월 만에 옥문을 나섰다. 아내와 동아투위의 여러 동료들이 마중 나와 주었다. 아직 유신체제는 계속되고 있었다. 민주주의 파괴와 인권탄압으로 미국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바탕에는 월남패망과 주한미군 철수압박으로 불안해진 박정희 정권의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이 미국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강문봉 장군과 하우스만의 만남이 떠올랐다.

내가 구속되었을 때 나의 거처는 불광동 천관우 선생댁 부근 전세 집이었지만 아내는 내가 없는 동안 집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청와대 바로 뒤 인왕산 기슭의 청운 아파트 10평짜리였다. 내가 없는 2년 7개월 동안 여섯 차례 삭월 셋방을 전전한 모양이었다. 연년생 어린 아이들이 딸렸다고 해서 삭월 셋방을 얻지 못해 고통을 겪은 얘기도 들려주었다. 생활비는 부산에서 한성여대 교수로 계시던 장모님이 감당하셨다. 또한 동아투위와 여러 민주인사들의 도움이 있었다고 했다. 아내는 두 어린 것들 데리고 나의 재판정과 교도소 면회에 나다니면서도 근검절약해서 나의 출옥에 맞춰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친구들은 내가 없어야 우리 재산이 늘어나는 모양이라고 놀렸다. 동아투위는 1977년 송년회를 나의 출소를 환영하는 모임으로 삼아 많은 민주인사들을 초청, 민주화와 자유언론의 성취를 다짐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고마웠고 새로운 결의를 다짐했다. 청운아파트 새집에서는 두개 방을 하나로 터버린 넓은 방에서 백기완 선생, 고은 시인 그리고 많은 투위 동지들과 후배들이 함께 모여 나의 출소를 축하해주었다.

나. 10·24 민권일지 사건과 2차 투옥

동아투위의 동료들은 세가지 정도의 갈래로 나뉘어 생계를 모색하고 있었다. 처음 해직 당했을 때보다는, 복직이 곧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접고 유신체제가 끝날 때를 기다리자는 자세였다. 첫째, 적극적으로 자유언론운동을 촉발하기 위해 언론 내부에 영향을 미치고 '대화' 같은 월간지 등에 글을 싣거나 출판사를 세워 비판적인 사회과학 서적을 출판하는 방향, 둘째, 민간기업에 취업해서 생계를 해결하되 언제라도 복직할 기회가 오면 복직하겠다는 방향, 셋째, 연구소 등에 취업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여 대학교수로의 진출을 모색하는 방향 등이었다. 투위 동료들에 대한 유신 정권의 감시 통제는 해직 초기보다는 다소 완화된 것이기는 해도 언론계에만은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했다. 전문 특수신문이나 주변부 주간신문 등을 제외하고는 주류언론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통제했다. 나의 경우는 택할 수 있는 길이 더 좁았다. 정권과 타협하는 길을 택하지 않는 이상, 나는 국보법 반공법 긴급조치 등을 위반한 전과자였으므로 감시대상일 뿐 아니라 언제라도 재수감할 수 있는 사회안전법 대상이었다. 실제로 해당경찰서 정보과에서는 사회안전법 대상자로 분류하여 수시로 호구조사를 나왔다. 나는 우선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영미 소설, 사회과학 서적의 번역에 매달렸다. 당시 동아투위는 안종필 위원장을 중심으로 안성열 박종만 등이 제도언론에서 1년 동안 외면하고 보도하지 않는 사건들을 수집, 1978년 10월 24일 자유언론선언 4주년을 맞아 '10·24민주·인권일지' 발간을 계획하고 있었다. 나는 출옥한지 얼마 되지 아니하였다고 해서 빠져있기로 했다. 이 사건으로 해서 안종필 위원장과 홍종민 총무를 비롯해서 안성열 장윤환 윤할식 박종만 성유보 이기중 김종철 정연주 등 10명의 투위원들이 구속되는 '언론인 대거구속사건'이 일어났다. 주요 투위원들이 구속되고 상당수가 불구속 기소되었으므로 나로서도 달리 방관할 길이 없었다. 구속된 투위원들의 법정투쟁과 옥바라지, 가족들과의 연락 등을 떠맡게 되었다. 78년과 79년은 이렇게 눈코 뜰 새도 없이 지나갔다. 신문로로 옮긴 투위 사무실에서 구속된 투위원들에게 넣어줄 책 영치금 등을 가지고 서대문 구치소로 가는 일이 일과가 되었다. 이쪽에 넣어준 책을 다시 받아서 저쪽에 넣어주는 일, 가족들의 어려운 일 상담 등이 일상 업무였다.

아직 다수의 투위원들의 재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10·26 박정희 피살사건이 일어났다. 27일 새벽 4시 30분경 누군가로부터 박정희가 피살당했으니 우선 몸을 피하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의 고난이 끝나는 것인가라는 희망을 가져보면서도 위기에 처한 집권세력이 어떤 선택을 할는지 알 수 없었다. 피신한 상태에서 사태추이를 관망하도록 했다. 이틀 동안 관망했지만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한다는 방침이 없고 김재규 부장을 비롯한 중앙정보부 세력에 대한 거세조치들이 신속히 이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10월말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열어 최규하 권한대행을 새 대통령으로 다시 뽑겠다는 발표가 나왔다. 박정희 개인을 위한 유신체제였다면, 그 장본인이 사망했을 경우 그 헌법을 폐기하고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새로운 민주체제를 구성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기득권 세력은 구체제를 그대로 이어갈 의도를 드러냈던 것이었다. 이름뿐인 야당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 1979년 10.26이후 이부영이 계엄포고령 위반사건의 재판정에 들어서고 있다. ⓒ이부영

제2기 유신대통령을 내서는 안 된다는 국민의 소리가 나와야 했다. 나는 해직교수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동아·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그리고 제적학생들의 모임인 민주청년협의회 등 5개 단체 이름으로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윤보선 전 대통령 저택에서 발표했다. 5개 단체의 대표 급 인사 18명이 계엄당국의 체포로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받았다. 그러나 나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백낙청 이우정 김찬국 교수 등 나머지 인사 17명은 모두 석방되었다. 나는 보안사 서울분실로 넘겨졌다가 곧 서울구치소와 육군형무소(일명 남한산성)로 옮겨졌다. 그 사이에 신군부의 12·12반란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나는 김재규 중정부장의 의전실장인 박선호 예비역 해병대령을 비밀리에 만났다. 그들은 10·26사건에 대한 군법회의의 재판을 받고 있었다. 서울구치소에서 어느 간부직원의 호의로 감독의 눈이 거의 없는 휴일에 그와 단독으로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그를 만나려고 한 까닭은 그가 김재규 부장의 측근이었으므로 동아투위 사건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자 마자 그의 손을 맞잡고 "귀하들의 손이 역사를 바꿔놨다"고 치하했다. 그는 무인답게 호방했다. 1976년 김재규 건설부 장관이 중정부장으로 취임하면서 현안(懸案)으로 인계받은 것 가운데 동아투위 문제가 들어 있었으며 그 문서 속에 "정부의 방침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김상만 동아일보 사장의 각서가 들어있었다"고 기억해 주었다. 중정 안가에서 박정희를 위한 술자리를 준비하는 업무를 책임졌던 그는 수많은 여성 연예인들과 가수들을 불러 들였다고 했다. 그는 81년 5월 김재규와 함께 사형집행 당했다.

나는 수도경비사 보통군법회의에서 계엄법 위반 혐의로 구형 3년에 법정최고형인 3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육군고등군법회의 재판은 국방부 청사 경내의 군법정에서 받았지만 기각이었다. 바로 대전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이 때는 이미 12·12군사반란으로 신군부의 기세가 등등해서 분위기가 군부에 반대하는 우리 같은 정치범들에게는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대전에는 나를 비롯해서 이른바 '통대반대 위장결혼식 사건'의 박종태, 양순직, 임채정, 최열, 홍성엽, 최민화 등이 모여 있었다. 임채정은 같은 동아투위원으로 나보다 조금 늦게 구속되었다. 이들은 전두환의 12·12신군부반란 직후 구속되는 바람에 훨씬 모진 고문을 받았다.

대전교도소에서 우리는 1980년 5.18계엄 확대조치와 광주학살사태를 맞았다. 소총에 착검한 군인들이 교도소 사동을 점거하고 교도관들을 대신했다. 그들은 우리들을 감방 안에서 꼼짝도 못하게 앉혀놓고 일일이 감시했다. 일체의 언동도 못하게 만들었다. 6·25한국동란의 후퇴 와중에 대전교도소에서 일어났던 엄청난 학살 사건이 떠올랐다. 나중에 전해들은 이야기였지만, 광주에서 시민군이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민주인사들을 구출하려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대전에서도 그런 소동이 벌어졌다고 했다. 이틀 정도 지난 뒤 군인들이 철수했다. 그해 여름 7월에 나는 홀로 대구교도소로 옮겨갔다. 대구교도소는 유신시대나 전두환 시대에 반정부 정치범들에게 가장 가혹한 처우를 하던 곳으로 악명이 높아서 기피 1호 시설이었다. 운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시련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얻도록 하늘이 시험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대구교도소 2사 하의 독방에 갇혔다. 일반재소자들 뿐인 사동의 독방에 내가 왔으니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 방의 맞은 편 방에는 70대 초반의 건강한 스님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곳 담당 교도관은 나에게 그 스님과는 일체 이야기를 하지 말고 지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무슨 꼬투리라도 잡히면 고소 고발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살인으로 무기수가 된 그 스님은 끊임없이 송사를 일으켜 교도소 당국이 골치를 앓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노스님이 운동을 나다니거나 세면장에 물 길러 나올 때나 반드시 나의 방을 기웃거리면서 말을 거는 것이었다. 나는 웃으면서 겸손히 응대했다. 가을이 짙어가는 어느 날, 1사 특별사동 쪽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부영 형, 나 서승이요. 창문으로 나와 보세요." 재일교포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1971년 구속되어 수사 받다가 난로를 뒤집어써서 얼굴과 손 등 온 몸에 화상을 입고 10년째 징역을 살고 있던, 지금은 일본 리쓰메이칸 대학 교수인 서승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그곳에 온 소식을 듣고 통방을 시도한 것이었다. 나는 즉시 그의 부름에 응답했다. 그는 교무과에 나갈테니 나에게도 함께 교무과 연출(직원 면담요청)을 신청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그 노스님이 내가 빨갱이와 통방했다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소하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통방을 하려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 불러서 대답한 것이라고 해명, 해명해서 겨우 가라앉혔다. 그 스님은 모든 재소자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었지만 완력이 젊은이 못지않아 아무 것도 개의치 않는 태도로 생활했다. 승려였고 내연의 여인을 살해했고 그리고 모든 일에 공격적이고 고소를 일삼는다, 도저히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냥 먼 산 바라보듯 생활하는 수밖에 없었다.

늦가을에 접어들자 교도소 안이 웅성거리고 교도관들이 군복으로 갈아입는 등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바뀌었다. 삼청교육 혹은 순화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수감되어 있는 재소자는 예외 없이 교육을 이수한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으로 복역하고 있는 미전향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1980년 11월말부터 12월말까지 한 달여 동안 나는 군대의 PT체조, 봉체조, 포복 등 군부대의 삼청교육대에서 실시했다는 악명높은 폭력적 훈련을 받았다. 80년 겨울엔 대구에도 눈이 많이 내렸다. 연병장에 눈이 내리면 눈을 쓸어 쌓았다. 쌓인 눈 더미는 흙과 잔돌들이 뒤섞인 채 젊은이 키 한 길 정도 높이로 연병장 군데군데 무더기를 이뤘다. 군대에서 나온 조교들은 빨간 모자를 쓰고 국보위 몽둥이를 휘둘렀다. "앞으로 포복,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뒤로 포복" 장난감 다루듯 훈련생들을 부리다가 그들은 별안간 "포복 전진 앞으로, 눈 더미 굴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소리 지르면서 국보위 몽둥이로 훈련생들 엉덩이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내려치는 몽둥이를 피하고자 눈 더미를 열 손가락으로 허우적거리면서 파헤쳤다. 그 순간 저쪽 눈 더미에서 건장한 청년 한 명이 벌떡 일어서면서 "에이 씨팔!!" 소리 지르면서 국보위 몽둥이를 휘두르는 훈련조교를 노려봤다. 그 청년에게 몽둥이질을 하던 훈련조교는 전체 훈련생을 집합시켰다. 그리고 그 청년의 옷을 팬티 한 장 남기지 않고 모두 벗겼다. 그 청년에게 자신의 생식기를 잡도록 했다. 가는 지휘봉으로 그 생식기를 내려쳤다. 그 청년은 눈 녹은 진창 속에서 지렁이처럼 몸을 떨면서 꿈틀거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 청년은 기절했고 퉁퉁 부어오른 그의 생식기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나는 몸을 떨면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나 자신도 겁에 질려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인간의 근본을 짓밟는 그런 야만행위에 항의 한 마디 못한 나 자신에 대해 모멸감을 느낀다. 일벌백계(一罰百戒)로 얼차려를 주는 방법은 많을 것이다. 공포감을 불어넣는 이른바 기합을 준다고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이런 짓을 수백 명의 공중 앞에서 자행한 것은 반듯이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이다.

그런 삼청교육을 나는 이수했다. 그 순화교육을 이수했다고 1981년 2월 25일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에 맞춰 시행된 특별사면으로 나는 대구교도소 문을 나섰다. 1년 4개월만의 출소였다. 아내와 동아투위를 비롯한 많은 민주인사들이 영접해주었다. 대구에서 탄 고속버스 안에서는 전두환의 취임연설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폭력으로부터의 해방' '정의사회 구현'이런 말들이 전두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바로 며칠 전까지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현실과 말의 괴리, 말이 현실과 동떨어져서 허공에 둥둥 떠 다니는듯한 환각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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