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무현 정부의 등장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그가 성공하기를 바랐고, 민주당 정권이 대안 세력이 될 수 있기를 바랐었다. DJ 정부 때에는 나는 정부 내에 있었고, 정권이라는 눈으로 본다면 '인사이더'였던 셈이다. 그걸 승계한 노무현 정부와 내가 단절하게 되는 데에는 몇 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큰 걸로만 따지면 새만금 사건과 한미 FTA가 그렇다.
나는 여전히 민주당이 '새만금 해수유통'을 당론으로 정하고, '탈토건'을 정책 기조로 세우기 전까지는 전면적으로 협조할 생각은 없다. 한 쪽에서는 4대강 반대를 외치면서 자기네 앞 마당에서는 '새만금의 경제기적'을 외치는 이 분열증적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런 게 나의 고민이다. 그러나 여전히 새만금 해수유통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 줌의 생태주의자'들의 얘기일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아주 소수이다.
한미 FTA의 경우는 더욱 직접적이고 파장은 더욱 컸다. 경제학자로서, 나는 통상에 반대하지 않고, WTO 체계도 수용하는 편이다. FTA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시각이다. "어떤 FTA이냐?", 그 질문을 했었다. 나는 '투자자 국가 소송제'라는, 아주 특수한 미국형 FTA에 고유한 이 특수 양식에 대해서 반대한다. 이걸 뺀다면, 나는 한미 FTA의 긍정적 효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수긍할 생각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작년에 한나라당의 강행으로 한미 FTA가 국회 비준을 통과하면서, 사실상 이 틀에 대해서 우리가 뭔가 건설적으로 얘기를 해볼 수 있는 공간은 닫혔다. 더 이상 절차적인 논의를 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고, 이 정부가 내가 원하지 않는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살아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미 FTA 역시 힘으로 강행하는 것이 부당해보이지만 어쩔 수가 없을 것 같다.
자, 이제 "한 글자도 고치지 않겠다"는 한나라당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아직 발효도 하지 않은 한미 FTA의 본조항에도 수정이 생긴 것 같다. 이제 국회로 와서 국회비준 과정을 다시 거치는 것 외에는 남겨진 발효 때까지 남겨진 행정적 절차는 없다. 국회 혹은 정부를 통과할 수 없기에 미국이 빠진 째로 발효된 국제협약이 몇 가지 된다.
종다양성 협약의 내부 의정서인 카르타헤타 의정서가 2003년 미국 없이 발효가 되었다. GMO, LMO 등 유전자 조작식품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미국은 여기에 빠졌다. 아들 부시가 대통령이 되면서 제일 먼저 한 조치 중에 하나 역시 기후변화협약의 최대 후속조치였던 교토 의정서에서 미국이 빠지기로 한 조치이다. 물론 많은 비난이 미국에 빗발쳤지만, 네오콘이 중심이 된 온실가스 회의론과 함께 미국은 이런 세계적 의정서 체계에서 빠져나왔다. 그 후로 기후변화협약은 교착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효과가 불분명하거나 득보다 실이 많을 것 같은 국제협약이나 조약에 대해서 국회는 비준을 거부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비준을 거부하는 것은, 미국만의 일도 아니다. 스위스도 가끔 EU 가입을 행정부가 추진하지만, 국민들도 그리고 국회도 EU 가입을 통과시켜줄 생각이 전혀 없어보인다. 영국도 유로화로 대표되는 EU 화폐통합 체계에 가입하지 않았다. 영국이 유럽이 아니라거나 스위스가 유럽이 아니라는 생각을 상상도 되지 않지만, 어쨌든 모두가 한다고 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한국 국회를 통과한 조약문이 이번에는 미국 의회 앞에서 다시 돌아나와서 수정된 것이다. 외교적 결례니, 그런 얘기는 할 것도 없다. 각 국의 행정부와 국회 모두 자신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일단 통과되어 발효되면 그 다음에 수정을 가하기 아주 어려운 양자 협약이라는 것의 특성상, 미국의 수정은 이해가 안가는 바가 아니다.
▲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5일 외교부 브리핑룸에서 한미 FTA 재협상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뉴시스 |
자, 문제는 돌고 돌아, 다시 문제의 출발지였던 민주당으로 왔다. 적지 않은 국민들은 민주당이 거부권을 행사해주고, 지난 정권부터 계속해서 문제가 되었던 몇 가지 조항들을 수정하기를 바랄 것이다. 문제가 되는 협약은, 문제가 없을 때까지 끊임없이 고치고 수정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건 작은 행정적 조항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 국민들 한 명 한 명의 경제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원래 한미 FTA를 추진하던 중추 세력인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사이의 권력과 정책의 승계 논의는 좀 복잡할 것 같다. 어쨌든 이건 자기들 문제이니, 자신들이 알아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참여연대 김기식 위원장의 '빅 텐트'에서 문성근의 '민란 프로젝트'까지, 넓게 보면 반 MB 전선이라는 것을 다시 세워서 민주당을 중심으로 뭉치자는 것 아니냐? 차악과 차선, 현실과 근본, 계급과 계층,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야 수도 없이 많겠지만, 결국 따져보면 얘기는 민주당의 대선 주자를 다음 대선에서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 아니냐? 그걸 연정이라고 하든, 빅텐트라고 하든, 어쨌든 현 정권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다음 대선에서 지지 않을 수 있게 힘을 모아달라는 것 아니냐?
한미 FTA 수정안은 이 복잡한 지형을 한 가운데로 가르는 중추선이다. 어떻게 보면 민주당에게는 시련의 순간이기도 하다. 지난 정권에서 국회의 한미 FTA 특위 위원장이 바로 송영길 인천시장이고, 그야말로 '총대 멘', 바로 그 인사이기도 하다. 당시 한나라당 소속이던 손학규 대표는 민심 행보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FTA 전도사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다. 정동영 대선후보 역시 개성공단 제품의 미국 수출행을 주장하며 은근슬쩍 묻어갔던 게 아닌가?
이제 이들이 한미 FTA에 대한 입장에서 우리들에게 대답을 해야 할 시점이 온 셈이다. 누가 봐도 지금의 수정안은 절차적으로도 납득이 안 되는 측면이 많고, 그 효과에 대해서도 제대로 분석이 되지 않은 측면이 많다. 이 수정안은, 다시 미국으로 돌려보내면 된다. 그건 외교적 결례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다.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수정을 필요한 아주 큰 협약에 대한 중간 절차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현실적인 힘은 진보진영에서는 민주당이 가장 세다. 국회의원 달랑 한 명 있는 진보신당이 뭘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민주노동당이 엄청난 권능을 발휘하여 기적을! 그럴 것 같지도 않다.
이건 야권 통합을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유시민이나 문성근에게도 해당되는 질문이다. 은근슬쩍 묻어가는 후보로, 설령 유시민이 야권 통합후보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 힘으로는 절대로 다음 대선에 이기기는 어렵다. 지난 지방선거 때 심상정 경기지사 후보와의 극적인 단일화가 있었어도 경기도에서 적지 않은 진보 당원들은 심상정에게 기표하며 무효표를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심상정이라는 이름에 투표를 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도대체 내가 뭐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는 어느 시민의 말을 그냥 흘려들을 것은 아니다.
이제는 시민단체의 지도자로 자신의 역할을 정한 문성근에게도 유효한 질문일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다음 총선과 대선은 같이 치르자, 그가 내건 명분에는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 명분이 진정으로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정책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한미 FTA 같은 중차대한 국면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정도의 입장 표명은 필요할 것 같다.
'무조건 반 MB' 진영에게는 분명 한미 FTA 수정안이 국회로 오는 순간이 시련의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시라. 지금까지 '대동소이', 큰 건 거의 비슷하고 차이는 아주 적다고 말을 했지만, 현실적으로는 아주 큰 차이가 있는 것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지금부터 1~2주 내에 벌어질 국회 동향을 아주 큰 눈으로 쳐다볼 것 같다.
내가 한국에서 들은 말 중에 아주 좋아하고 재미있는 말이 있다.
"한국은 길거리에서 대중 지도자가 나오는 나라이다."
지금의 한미 FTA 수정안 비준 정국, 이 싸움의 지도자가 다음 대선에 우리의 통합후보로 나서는 것, 나는 여기에 대해서는 동의할 것 같다. 대중은 생각하지도 않는 강경노선의 한나라당, 그리고 국민은 정말 안 중에도 없는 경제당국과 통상당국, 이 상황에서 우리가 쳐다볼 수밖에 없는 것은 결국 미우나 고우나, 야당 제1당, 민주당 아닌가?
이제 이번 주부터 민주당에게는 시련이 올 것이다. o과 x만이 있는 선택지, 국회에서의 한미 FTA 수정안은 결국 찬성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 그 두 개의 선택지만이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골치 아픈 논쟁이 기다리고 있으니, 분명히 시련은 시련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한나라당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들이 후계 구도를 어떻게 형성하든, 우리들에게 대선은 이미 이번 주부터 시작한 것이라는 사실…. 지금의 지도자가 우리의 지도자가 될 것이고, 그가 다음 대선의 우리 편 후보가 될 것이라는 건, 좋든 싫든 이번 주부터 펼쳐지는 국면의 진짜 속사정이 될 것이다.
대통령이 우리에게 던져놓은 수정안, 그것과 함께 우리의 대선은 이미 시작되었다. 진짜 '반 MB 전선'으로 대선을 치르고 싶다면, 그걸 전선으로 만드는 선택의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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