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법정 방청석에서 누군가의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삼성반도체에서 5년 동안 일했다가 지금은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인 김옥이(41) 씨였다. 변호인 측이 틀었던 동영상은 새 공장에서 최근에 찍은 것이어서 1992년 김 씨가 일했을 때의 노후한 작업 환경과는 너무나도 다른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고(故) 황유미 씨(당시 23세)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옛날에 사고 났던 라인들은 다 사라졌는데 이제 와서 신형 라인을 보여주면 무슨 소용이냐"고 항의했다.
25일 서울행정법원에서는 삼성반도체에서 일했다가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와 그의 유족들이 "백혈병이 직업병임을 인정해달라"며 신청한 재판이 열렸다. 원고는 황상기 씨 등 5명이었고, 피고는 이들의 산업재해 신청을 승인하지 않은 근로복지공단이었다. 근로복지공단이 지난 1월 "뇌종양 발병 원인이 작업 환경과 관련성이 있다는 근거가 없다"고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자 여기에 반발한 피해자들이 근로복지공단의 처분을 취소해 달라며 행정소송을 냈다.
▲ 지난 달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앞에서 시민단체들이 '삼성 백혈병' 산재 인정 촉구 기자회견을 연 자리에서 숨진 백혈병 노동자를 상징하는 방진복을 입은 반올림 회원들이 쓰러져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
이날 피고석에는 근로복지공단 대신 삼성 측 변호사 4명이 앉아 있었다. 삼성전자는 법무법인 율촌을 고용해 피고보조참가인 자격으로 소송에 참여했다.
삼성 측 변호인은 백혈병과 삼성반도체 공정 사이에 관련이 없다는 근거로 △반도체 공장에서 발암물질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 △위험한 화학물질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노출양도 적다는 점 △피해자들이 해당 화학물질과는 상관없는 공정에서 일했다는 점 △반도체 공정이 돌고 도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전 공정에서 잔류물을 제거하므로 다음 공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을 내세웠다.
원고 측은 피해자들이 삼성반도체에서 일했을 당시 "발암물질인 벤젠, 트리클로로에틸렌(TCE) 등을 썼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삼성 측은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건강실태 역학조사를 근거로 "벤젠은 기체일 때 위험하다"며 "그런데 벤젠은 공기 중에 거의 노출되지 않았다. (삼성반도체가) 설령 벤젠을 썼더라도 극미량이다"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삼성 측은 1995년까지는 TCE를 썼다는 점은 사실로 인정했다. TCE는 백혈병, 림프종, 간암을 일으키는 유해물질로 알려져 있다. 온양공장에서 반도체 조립공정에 참여했던 김옥이 씨는 반도체의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TCE를 사용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50번씩 돌고 도는 반도체 공정 속에 발암물질 노출"
원고 측은 "피해자들이 해당 화학물질과는 상관없는 공정에서 일했다는 주장도 실제 공정 과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삼성반도체 출신 부부였다가 남편을 백혈병으로 떠나보낸 정애정(34) 씨는 "반도체는 산화되기 전에 빨리 공정을 진행해야 한다"며 "일을 하다 보면 자기가 맡은 공정 외에 일손이 부족한 다른 공정에도 관여하게 된다"고 말했다. 정 씨는 "피해자가 어떤 공정에서 있었는가보다는 피해자가 어떤 일을 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례로 삼성 변호인 측은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디캡공정(decap)에 고(故) 황유미 씨가 배치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황 씨의 작업 일지에는 "50번을 사용한 더미웨이퍼를 디캡했다"고 적혀 있었다.
디캡공정이란 이전 작업자가 수십 번 썼던 웨이퍼(반도체의 재료가 되는 얇은 원판)를 다시 쓰는 공정으로 어느 공정에서 어떤 화학물질이 묻어 왔는지 알 수 없어서 더욱 위험하다. 노동자들은 디캡 공정에서 화학반응이 일어나 생기는 독한 연기를 그대로 들이마셨다. 원고 측은 "황 씨가 디캡공정을 거치면서 각종 발암물질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반도체 공정은 돌고 돈다. 마지막 작업을 마친 웨이퍼가 다시 첫 공정으로 보내지기도 한다. 노동자들은 모든 공정에서 위험 물질에 노출될 수 있다는 얘기다. 정 씨는 "이전 공정에서 완벽히 잔류물을 제거해 다음 공정으로 넘어간다는 주장은 이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쓰이는 화학물질 "영업 비밀"이라며 비공개
원고 측은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쓰는 화학물질 중에 오직 29%만 작업환경측정을 마쳤다"며 발암물질이 더 있을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삼성 변호인 측은 "미확인물질은 공급 업체의 영업 비밀에 해당하기 때문에 성분을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원고 대리인인 박상훈 변호사는 "당시 삼성반도체에서 썼던 발암물질은 극소량이지만 장기간 노출되면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백혈병이 산업재해로 인정받을 만한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박 변호사는 "백혈병은 드문 병이어서 65세 이하 백혈병 발병률은 1년에 인구 10만 명당 평균 1.7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에 걸린 사람은 공식적으로만 33명에 달한다. 비공식 인원과 다른 암에 걸린 피해자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난다.
공교롭게도 재판이 일어나기 전날인 24일은 고(故) 김경미 씨(당시 23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째 되는 날이었다. 재판이 끝난 뒤 이종란 노무사는 "마음이 아프다"며 "백혈병이나 다른 암으로 죽은 사람들의 기일이 올 때마다 1인 시위라도 해야겠다"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누군가가 "그러려면 1년에 도대체 얼마나 자주 해야 하느냐"며 손사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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