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의 싸움을 담은 그의 사진집 <너희는 고립되었다>(한국비정규노동센터 펴냄)가 나온 날은 전태일 40주기 기념 노동자대회가 열리던 지난 7일.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 10명을 사측이 직접 고용하기로 합의한 1일로부터 6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하지만 '승리'를 자축하는 의미의 사진집은 아니었다. 끝나든 그렇지 않든 기륭 노동자들이 싸워왔던 6년의 시간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었다"
10일 종로 통의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정택용 사진가는 조용조용한 말투에 평온한 표정이었다. 풍경 사진을 찍고 싶어서 카메라를 들기 시작했다는 그가 격렬했던 기륭 농성장에서 6년의 시간을 함께 했다는 게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루하리만큼 싸움과 협상 결렬이 반복되는 와중에 어느 순간 손을 털고 현장을 떠날 만도 했다.
ⓒ정택용 |
"사실 도망치고 싶은 때가 많았어요. 싸움 초기에 조합원들과 사측이 고용한 용역 직원들 사이에 물리적인 충돌이 잦았죠. 그럴 때면 조합원들은 거의 악에 받힌 듯 달려드는데 전 그만큼 다가가질 못했어요. 몇 번 장비가 파손될만한 상황을 겪으면서 '다칠지도 모르는데 오늘은 가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한 적도 많았죠. 그런 싸움이 붙을 때면 휴대전화 문자로 연락이 오는데 언젠가 한 번은 가지 않았던 부끄러운 기억도 있어요."
한 번 안 갔는데 부끄럽단다. 현장에서는 제3자였을 사진가가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는 건 6년의 시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터다. 그는 어떻게 처음 기륭 노동자들과 인연을 맺었을까? 그리고 왜 지금껏 그곳을 떠나지 못했을까?
"2005년 여름에 기륭전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문자로 해고를 당했다는 얘기가 파장을 불러일으켰어요. 사는 곳이랑 가깝기도 해서 아는 사람 따라 한 번 나선 거죠. 당시 노조가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할 즈음이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하고 가서 처음 딱 본 것이 기륭전자 입구 철문을 사이에 두고 안에는 조합원들이, 밖에는 연대하는 사람들이 앉아있는 광경이었어요. 그런데 조합원 아이 중 하나가 밖에서 엄마를 만나러 와서 철문 사이로 손을 맞잡더라고요. '말로만 듣던 1970년대 구로 공단의 모습이 지금도 있구나'하는 충격에 발을 끊지 못해 지금까지 왔어요.
ⓒ정택용 |
그러다 밥때가 됐는데 그 고층 건물이 내려다보는 앞에서 밥을 하려고 불을 땠어요. 또 경비원들과 한바탕하고 현관 앞 공터 귀퉁이에서 청국장을 끓였는데, 같이 먹자고 국그릇에 밥을 말아 내미시더라고요. 사측이 보는 앞에서 받아먹기가 좀 꺼려지긴 했는데, 같이 주저앉아 먹다보니 이미 그들과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연스레 끝까지 가보자고 하게 된 거죠."
"6년 동안 싸운 이유? 차별을 뼈저리게 느껴본 이들이니까"
기륭 노동자들의 6년 싸움을 지켜본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떠올렸을만한 질문을 꺼냈다. 어느 순간이 되면 싸우는 것보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다른 살 방도를 찾아보는 게 나았을 터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그렇게 싸웠을까?
"사실 2008년 단식 당시 협상(유예기간을 거친 후 기륭전자 자회사가 이들을 고용한다는 내용)이 진행됐을 때 사측이 말을 바꾸기도 했지만 조합원들도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사실 그 때는 '이 정도면 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사진집에 보면 '옳은 길을 찾기 위해 6년 동안 왔다'라는 말이 있어요. 다른 이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실리보다는 명분이 더 중요했던 거죠. 비정규직이, 진짜 차별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껴본 인간만이 요구할 수 있는.
ⓒ정택용 |
그들과 뜻을 함께 하며 보낸 6년 동안 '기륭분회'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져 있던 이들이 하나하나의 존재로 다가왔다. 긴 세월 동안 결혼을 하는 조합원도 생겼고, 암에 걸린 조합원을 떠나보낸 기억도 있다. 그에게 특별히 애착이 가는 사진이 있는지 물었다.
"철문 아래로 뻗어 나온 손 사진이 있어요. 기륭전자 대문 모습이 계속 바뀌었죠. 맨 처음엔 뚫려 있었지만 위쪽 절반에 철판을 덧대더니 며칠 지나니 아래 쪽까지 막았더라고요.
아래 쪽으로 뚫려 있는 공간이 20센티미터 정도만 남았는데 밖에서 연대 집회를 열면 안에 농성하는 조합원들이 궁금해 하는 거예요. 철문이 막힐 때마다 이들이 집회를 지켜보려 자세를 점점 낮추고, 마지막에는 엎드려서 지켜본 거죠. 그러다가 연대하는 동지들에게 안부를 전한다며 손을 불쑥 내밀고 흔들더라고요."
ⓒ정택용 |
그렇게 기륭 노동자와 부대끼던 그도 이번에 타결을 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올 초 사진집을 만들자는 제안이 들어왔고, 노동자대회를 겨냥해 작업을 하던 중 포클레인 농성이 시작됐다. 다시 현장에 나가고, 돌아와 사진집 작업을 하다 타결 소식을 들었다. 실감이 잘 나지 않고, 좋다는 느낌도 딱히 들지 않았다고 한다.
▲ "이 분들의 이야기로 얼굴을 알리고 싶지 않다"며 그는 인터뷰 사진을 사양했다. 또 "솔직히 사진가이면서도 카메라에 찍히는 걸 싫어한다"며 양해를 구했다. ⓒ본인제공 |
2008년에 이런 타결을 했으면 조합원들은 물론이고 사측도 피해를 덜 입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다 끝난 마당에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6년 간 사측이 보여준 행동은 정말 치졸했어요. 입장 뒤집기를 밥 먹듯 했고, 회사 앞에서 선전전을 벌일 때 그들이 보여준 행동을 보면 정말 앞으로도 타결될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조합원들 역시 합의문에 서명할 때까지 믿을 수 없다고 했죠. 어쨌든 타결이 됐지만."
사진가 경력의 8할을 기륭으로 채워온 그다. 이제 구로공단을 떠나 다른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그는 "타결 즈음에 열린 집회에 유명자 재능교육 지부장이 와서 울더라.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라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륭 조합원에 대한 6년간의 단상을 꺼냈다.
"본인들이야 자신들이 평범하다고 말하겠지만, 전 특이하다고 생각해요. 기륭분회의 분위기 자체가 독특했죠.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희망을 얘기했어요. 구사대에 두들겨 맞아 울다가도 금방 웃으며 다시 얘기할 수 있는 분들이었죠. 고통이란 게 뭔지 알고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 그런 웃음이 나올 수 있었고, 그래서 6년을 버텨올 수 있지 않았나 해요.
ⓒ정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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