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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김남주…'어정잽이'들은 다 어디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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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김남주…'어정잽이'들은 다 어디로 갔나?"

['기륭'이 남긴 이들·①] 거리의 시인 송경동

사람들은 그를 '거리의 시인'이라 부른다. 거리에서 시를 만든 것도 맞고, 거리에서 살았던 것도 맞다. 평택 대추리에서 시작해 용산 남일당, 홍대 두리반까지 소외당한 이들이 벼랑 끝에 쳐놓은 농성장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구로공단 기륭전자 비정규직 농성장에서도 6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함께 했다. 시인 송경동 이야기다.

지난달 26일, 기륭전자 노사가 직접 고용 약속을 맺기 바로 일주일 전 거리의 시인은 기어이 탈이 났다. 10여일 전부터 농성장을 빼앗으려던 포클레인 위에서 농성하던 그는 발을 헛디뎌 땅바닥으로 추락해 오른발 발꿈치 뼈가 산산조각 났다. 그래도 포클레인에 다시 기어올라 농성장을 지키던 시인은 그날 밤 결국 병원으로 실려 갔다. 1일 조합원들이 조인식을 마치고 보고 집회를 하며 눈물을 흘릴 때도 그는 그 곳에 없었다.

"통증 심해도 체포영장 때문에 밤에나 병원 찾아"

9일 오전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을 찾았다. 마침 송경동 시인은 휠체어에 앉아 외투를 입고 있었다. 답답해서 바깥공기를 쐬러 나가는 길이었단다. 휠체어를 밀고 병원 밖 쉼터로 나갔다.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은 시인은 수술한 오른발이 움직일 때마다 몸을 움찔하며 찡그렸다. 제왕 절개한 산부에게 쓴다는 무통약을 세 대나 맞았지만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왜 그리 흥분했는가"라고 물었다. 당일 벌어진 추락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택배기사와의 다툼 때문이었다. 농성장 삼거리에 서 있는 포클레인 때문에 차가 지나갈 수 없다며 기사가 욕설을 하자 송 시인은 포클레인 위에서 신발을 던지며 흥분하다 발을 헛디뎠다. '욱'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날 정말 신경이 날카로웠어요. 금천경찰서에서 농성장을 '정리'하겠다며 시간을 줬는데 그날이 마지막 날이었어요. 사측에서 동원한듯한 동네 주민들이 와서 농성 그만하라며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어요.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협상도 몇 번이나 엎어지면서 정말 답답한 상태였죠. 그래서 그랬던 거 같아요."

'흥분'의 대가는 컸다. 이대로 병원에 실려 가면 체포영장을 신청한 경찰들이 잡으러 올 게 뻔했단다. 저녁에 알고 지내는 의사를 불러 발에 부목을 댔지만, 밤이 오면서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오한까지 들면서 이불 몇 장을 덮고 끙끙거렸다. 결국 밤 11시경 경찰 몰래 빠져나와 병원을 찾았다.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붓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신음한지 며칠이 지나서야 수술이 가능했다. 부서진 뼈 조각에 철심을 박아 잇고, 인공뼈도 집어넣었다. 퇴원까지 최소 2달, 재활을 거쳐 완치되기까진 2년도 걸릴 수 있다고 한다. 5일 조합원들이 마지막 집회를 열어 축하하던 자리에 겨우겨우 나왔지만 그 바람에 며칠을 더 통증에 시달렸다.

ⓒ프레시안(김봉규)

"6년의 출혈, 어떻게 보상받겠나"

병동으로 자리를 옮긴 시인은 인터뷰를 하기 전에 진통제 한 알부터 삼켰다. 한두 시간 정도는 통증 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고 했다. 협상 결과에 대한 느낌부터 물었다. 사측은 기륭전자에서 해고된 후 끝까지 싸운 조합원 10명을 짧으면 1년6개월 뒤에 직접 고용하기로 약속했다.

"이번이 거의 마지막 싸움이라고 생각했어요. 끝장을 보거나, 포클레인에서 끌려 내려오거나 둘 중 하나라고. 6년 동안 해결을 보지 못했는데 쉽게 될까 하는 생각도 들었죠. 사실 3년 전부터 고공농성, 국회 원내대표실 점거, 단식까지 안 해본 게 없었잖아요. 한 회사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았어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거죠.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경총에 교섭권을 넘기라는 얘기를 해보기도 했죠.

결국 타결이 됐지만 단위 사업장의 협상이 6년씩이나 걸려야 이뤄진 셈이잖아요. 그 세월 동안의 출혈은 뭘로 보상받겠어요. 정의를 바로잡고 진실을 알렸다는 의미는 있죠. 이들이 사실상 불법파견으로 일해왔다는 것, 사측이 이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인정받았잖아요. 하지만 누가 또 이렇게 6년 동안 처절하게 싸워서 권리를 찾으려 하겠어요.

그래도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엔 큰 의미가 있다고 봐요. 싸워오는 동안 사장이 네 번이나 바뀌었어요. 그때마다 고용승계 싸움을 벌여야 했죠. 정규직도 한 번 하기 힘든 싸움을 이들은 네 번이나 이겨냈어요. 대법원이 사측의 손을 들어줘 법적으로도 이들의 싸움이 근거가 없었지만 현재 법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해줄 수 없는 악법이라는 걸 보여줬어요."


"난 '어정잽이'…그게 더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

송 시인이 이들의 싸움에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게 된 건 어쩌면 자연스럽다. 21년 전 23살의 나이에 구로노동자문학회에 들어가 그때부터 구로공단 노동자들과 살을 부대꼈다. 1980년대 노동계가 민주화 운동을 벌이고 난 후 자생적으로 일어난 운동이다. 구로노동자문학회는 몇 년 전 사라졌지만 송 시인은 진보 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를 창간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문인이면서 현장에 더 자주 등장하는 그의 삶은 분명 특이하다. 하지만 송 시인의 관점은 다르다. "자신이 문학보다 현실에 치우친 게 아니라 자신이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한 쪽으로 치우친 사회가 문제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우리끼리 '어정잽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시인이라는 자리와 노동 운동가라는 자리의 간극에서 늘 왔다 갔다 해요, 어정쩡하게. 그런데 그게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요? 문학이라는 게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을 꿈꾸는 거잖아요. 그걸 상상력이라고 부르죠. 고답적이고 불합리한 구체제의 삶에서 벗어나 인간관계를 회복한 세계를 상상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죠. 그래서 역사에 회자되는 문인들은 거의 다 현장에서 부대끼면서 현실 감각을 익혔어요. 가깝게는 김남주와 박노해가 있죠. 그런 이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게 더 이상한 거예요."

그에게 용산 참사를 겪은 철거민과 기륭 노동자들은 다르지 않다. "비정규직은 자본의 이해관계 때문에 일자리를 잃고, 철거민은 그나마 유지하던 생업도 할 수 없게 되잖아요. 이름만 철거민, 비정규직일 뿐이지."

한동안 불편한 몸으로 살아가게 될 그다. 하지만 잠시 활동을 멈추고 쉴 거라는 기대는 없다. 향후 계획을 물었더니 지난 7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렸던 노동자대회 이야길 꺼냈다.

"그 자리에서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이 비정규직법 개정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를 제안했잖아요. 김 위원장이 얼마 전에 기륭 농성장을 방문했을 때 우리가 간곡히 부탁했던 내용이더라고요. 동희오토, GM대우, 기륭전자처럼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싸움이 있었지만 지켜보면서 느끼는 건 한 회사 차원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거였어요. 궁극적으로는 800만 명이 넘는 비정규직을 만든 법 자체를 바꿔야죠. 이 활동에 집중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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