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이 22일 한나라당과 원내수석부대표 회동을 갖고 기업형 슈퍼마켓(SSM)의 규제 법안인 유통산업발전법안(유통법)과 대ㆍ중소기업상생협력촉진법안(상생법)의 순차 통과에 합의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시 통과를 강하게 주장하던 민주당이 기존 입장을 뒤집고 상생법 처리가 한-EU FTA에 걸림돌이 된다는 정부의 반대 입장을 사실상 수용한 셈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유통법 개정안을 이달 25일 본회의에서 처리하고, 상생법 개정안은 정기국회 회기 내인 12월 9일까지 처리하기로 했다. 상생법이 통과될 때까지는 중소기업청의 'SSM 사업 조정 시행 지침'을 10월 내에 개정해 보완하기로 했다.
하지만 중소상인들은 이러한 순차 통과는 결국 상생법을 통과시키지 않으려는 정부와 여당의 술수에 불과하다고 경고해 왔다. SSM으로부터 전통시장을 보호하는 유통법과 달리, 상생법은 가맹 방식의 SSM을 사업조정제도에 포함시키는 규제로 전통시장이 아닌 일반 상가지역의 중소상인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망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전격 합의로 인해 지난해부터 끌어온 대형 유통업체와 중소상인의 갈등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민주당, 야합해서 이루려는 정치가 뭔가"
여야 합의 내용이 발표되던 이날 오전,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는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을 상대로 상생법과 유통법의 동시 처리를 주장하는 민주당 의원들의 '송곳 질의'가 쏟아지고 있었다. 김재균 의원은 "(유럽 국가의 중소상인 보호 조항을 둔) 한-EU FTA 협정문을 보면 기가 막히다. 지식경제부가 부처 소관인 중소상인 문제에 대해 별로 인식이 없는 것 같다"고 질타했고 노영민 의원 역시 "FTA 체결 과정에서 정부 부처간 협의나 국회에 의견을 묻는 절차가 거의 없었다"고 가세했다.
위원장인 민주당 김영환 의원도 보도자료를 내고 "외자를 유치한 1개 국내업체(홈플러스)가 SSM 규제법안 처리를 막아 우리나라 국익을 반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불출석사유서를 내고 외국으로 출국해 국감에 불참한 이승한 홈플러스 사장을 검찰에 고발조치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여당의 홍준표 최고위원도 21일 공정거래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홈플러스 측 증인을 향해 "애먹이면 당신들 손해 볼 것"이라고 경고를 날리기도 했다.
게다가 이날 오후에는 야5당 의원과 중소상인들이 국회에 모여 유통법 및 상생법 동시 통과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었다. 하지만 오전에 여야가 합의함으로써 기자회견은 민주당에 대한 규탄장이 됐다. 기자회견에 참석하기로 예정돼 있던 민주당 조정식 의원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지도부와 만나보고 당 내에서 대책을 논의해보겠다"며 회견장을 일찍 떠났다.
민주당을 제외한 야당 의원들은 일제히 여야 합의를 "야합"이라고 비판했다. 진보신당 조승수 대표는 "설마설마 했던 게 현실로 일어났다"며 "유통기업의 로비로 중소상인의 생존권보다 업체와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한 정부와 여당에 민주당이 가세해서 이루고자 하는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원내대표는 "이미 SSM이 골목 상권에 깊숙이 침투해 중소상인들의 회생책이 막막한 상황에서 정부와 여당이 참회하는 뜻으로 뒤늦게라도 관련법을 만들자는 게 유통법과 상생법"이라며 "그런데 여당과 민주당이 하필이면 이 기자회견을 앞두고 야합을 했다"고 말했다.
오후에 재개된 지경위 국장감사에서 민주당 김재균 의원도 "상생법을 발의한 입장으로써 이번 합의를 거부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조경태 의원도 "야당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한 달 보름 뒤 통과시킬 거면 왜 당장 통과시키지 못하나"라고 말했다.
김종훈 "상생법 문제 많아" 입장 고수…여야 합의 지켜질까?
중소상인과 야당이 유통법과 상생법의 동시 통과를 주장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지난 4월 지경위가 두 법을 통과시킬 때 법사위에서 동시 통과하기로 한 여야 합의를 이후 여당이 깼던 전례다. 유통법이 통과되고 난 이후 한-EU FTA 비준상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이유로 상생법 통과를 또 다시 미룰 수 있다는 게 상인들의 주장이다.
이날 오후 지경위 국감에 출석한 김종훈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상생법이 통과된 후 EU 측이 문제를 제기하면 해결하기가 어렵다"며 상생법 개정안에 문제가 있다고 밝힌 것도 여야 합의가 정부의 반대로 깨진 전례가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에 힘을 싣는다.
또 하나는 여야 합의 사항의 실효성이다. 상생법의 내용을 대체하는 중기청의 SSM 사업조정 시행 지침은 현재 사업조정이 신청된 직영 SSM이 가맹점으로 전환하는 경우만을 규제할 수 있다. 처음부터 가맹 방식으로 SSM을 개점했을 때는 정부나 지자체, 중소상인이 손쓸 방법이 없다.
여야합의가 뒤집어진 지난 5월부터 반대 방향으로 합의한 현재까지 SSM이 200개 가까이 늘어났고 이중 상당수가 가맹 방식의 SSM인 상황에서 상생법 통과가 늦춰진다면 진출 속도가 더욱 빨라질 가능성이 높다. 이후 상생법이 통과된다 해도 사업조정 신청 요건인 '입점 뒤 90일'을 넘기는 점포가 많아 최소한의 안전망 기능도 못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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