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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마케팅과 기획사시스템만이 정답인가

[나도원의 '대중음악을 보다'] 음악과 시장② 대중음악은 어차피 파는 물건?

스타 발굴 프로그램이 유행한다. 외국에선 잘나지 않은 외모 아래 감춰졌던 재능이 발견되는 감동 스토리로 정당성을 얻는 것 같다. '외모=재능' 등식이 만연한 시장이 그들을 위해 자리를 남겨두지 않았을 뿐이니 의외라는 것이 의외고, 또 그것이 외모 마케팅의 변종이 되니 아이러니다. 한국에선 출연자의 가슴 아픈 사연을 건드려 감동 스토리를 만드는 모양이다. 냉혹한 경쟁방식이면서 인간미를 강조한다니 역시 아이러니다. 화제가 되고 있는 '슈퍼스타K'에서 이문세·이영훈의 곡으로 실력을 겨룬다기에 보게 되었다. 겉은 외국 프로그램의 포맷을 모방한 일반인 노래자랑에 가까웠으나, 속은 마조히즘을 상품화한 잔혹 엔터테인먼트였다. 고대 노예시장 같은 스튜디오에서 스타일(외모)과 직업(재산)으로 짝을 찾는 '러브스위치'와 마찬가지로 제작자와 참가자, 그리고 시청자 모두를 (자신도 모르게)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는 '인간시장' 메커니즘의 막장이 거기에 있었다.

음악 판에는 스타가 필요하고, 스타탄생에 의하여 트렌드의 재편이 이루어지지도 했다. 발굴이라기보다는 평가에 가까웠지만 오래 전 한국에도 있었던 비슷한 프로그램의 출연을 계기로 주목받은 '서태지와 아이들'은 실제보다 더 지지받고 실제보다 더 비판받을 정도로 대단한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힙합과 록을 섭렵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그만두었을 때 여전히 록 뮤지션들의 활동범위는 그 전과 비슷한 수준에 머물렀거나 좁아졌다. 이러한 대형스타와 트렌드에 대한 갈증은 (자신도 모르게)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연예기획사 오디션이 있는 날, 공황기의 배식소와 직업소개소 앞처럼 긴 줄이 늘어서는 것도 그렇다.

무한도전과 UV에게 호의적인 이유?

잘 소비되기 위한 트렌드 싸움은 음악산업에서도 관건이다. 심해진 결과, 종류도 다르고 미끼도 다른 낚싯대들을 주룩 펼쳐놓고 월척을 기다리는 손님들로 낚시터가 채워졌다. 들어봤음직한 소리와 차별성 없는 트랙, 혹은 댄스와 발라드의 극단을 오가는 앨범이 양산되었다. 유일한 단점이자 공통점은 들을 노래가 하나뿐이거나 아예 없어서 모두 듣자면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노고를 몰라서가 아니라 이런저런 유행의 진열을 마냥 좋아할 정도로 내가 성숙하지 못했고, 그들이 이런 사람에겐 관심이 없을 뿐이다. 후발주자인 f(x)처럼 틈새 비집기로 시작했다가 위상이 커져 정면으로 치고 나오게 된 예도 있으나 대개는 추종에 머문다. 유행코드의 영리한 결합은 참신함과 다르다. 세련되었으나 어디선가 본 듯한 스타일의 멋쟁이가 매력적인가? 급류에서 비껴서 가장자리에 선 '시와'의 음악이 신선한 이유가 있다.

선정적인 제목과 노랫말도 유행한다. 하지만 그런 노래를 코믹하게 생각하는 또 다른 대중이 있으며, 그런 히트송의 수명은 대체로 짧다. 이런 구도 안에선 장르 음악인도 길을 잃는다. 너무 넓다 싶은 앨범의 스펙트럼을 높은 숙성도로 상쇄한 뮤지션도 있지만, 시장에 적응하려다 대중친화적인 한국형 록 밴드의 전형과 관록의 팝-록 밴드의 사이, 그 어디쯤에 어중간하게 걸쳐버린 이들도 많다. 재즈를 했던 이들이 대중성 강박에 빠져 진부함을 과시하기도 하며, '감상을 위한 휴식' 대신 '휴식을 위한 감상'을 위한 라운지재즈가 커피숍을 채우곤 한다. 깊이 얕고 넓게 퍼져 있는 시내처럼 부담, 아니 기대 없이 발을 담그라는 것은 대중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무시다. 음악은 물론이고 학문과 종교, 정치에서 보게 되는 지향과 양상의 모순은 이처럼 대중화의 법칙을 오용할 때 나타난다.

그런데 '최신'이라는 가까운 과거는 먼 과거보다 촌스러워지기 쉽다. 오히려 철지난 스타일이 복고라는 이름으로 복구되고, 극복의 대상이었던 '가요풍'이 음악경험의 단계를 거쳐 여유와 함께 유머로 부활하고, 촌스러움(키치)을 의도한 뮤지션들까지 나타난다. 장기하가 전자라면 이이(EE)는 후자다. 자본의 복고 상품화와 다른 선상에서 과거가 현재와 만나 미래가 될 수 있다. 물론 모든 트렌드가 훗날 자격을 얻게 되지만, 재발견·재평가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틈에 명품으로 소비를 차별화하듯 고급문화를 추구하는 심리를 이용한 공식이 만들어진다. 시장의 수레에 갇힌 한국형 알앤비를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이 <R&B>로 풍자한 대목은 들어볼만하다. 주류 음악에 대한 무시가 아니다. 김만중이 《서포만필》에서 허난설헌을 높이 평가하면서 허균이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명문을 채집하고 끼워 넣어 명성을 얻게 했다고(스타와 표절작곡가의 관계?) 못내 안타까워한 심정에 가깝다.

기획사 시스템에 비판이 쌓이는 이유는 이 회전문의 축이기 때문이다. 탤런트와 코미디언뿐만 아니라 가수까지 방송국 전속이던 시절이 있었다. 기업부정이 계속 일어나는 이유는 기업문화와 자금헌납의 구조 때문에 털기만 하면 누구든 문제가 나왔기 때문이다. 다행히 방송과 연예, 그리고 가요기획사의 관계도 이젠 꽤 선진화되었다. 그러나 주택과 석유에 유입된 투기자본이 집값과 유가를 불안정하게 하듯이 연예계에도 자본을 투입한 만큼 수익을 강요하고, 정체불명의 회사가 젊은이들의 꿈을 갉아먹으며, 청소년 노동착취와 불공정 계약관행을 남겨두었다. 물론 기획사의 존재는 당연하고 필요하다. 어떤 자유의 옹호를 권장으로 오해해선 안 되듯이 일부의 과점과 폐해에 대한 비판을 전체의 부정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아이돌에 대한 호감과 인정도 색다른 음악이 세(勢)를 형성함으로써 서로의 존재와 가치가 보호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결과이다. '무한도전'의 노래들, 그리고 유세윤(UV)에게 "잘하는 짓이다"라며 호의를 갖는 이유는, 이러한 역학과 인식을 위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절대목표는 '얼마나 잘 소비될수 있는가'이다. 무한도전이 내놓은 여러 후크송과 UV의 신곡이 대중의 지지를 얻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이 흐름에서 한 발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뉴시스
소녀시대를 맞은 대한민국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소녀시대를 맞았다. 촛불소녀, 김연아, 여자축구에 이르기까지 모두 어린 여성이 주인공이다. 걸 그룹 선풍은 대열의 전위였고, 기획사 구조는 해외에서도 통하는 '한국형 아이돌'이란 막강한 변종을 탄생시켰다. 작곡과 기량의 향상이 선행된 결과인데도 이상하게 '주'보다 '부'를 부각시키는 분위기고, 미디어는 한류를 온통 '시장의 관점'으로 다룬다. 반면 이상적인 국제교류이자 모범적인 해외진출을 통해 진정한 한미공조를 보여준 '비둘기우유'와 시카고의 '블리스 시티 이스트'의 합작앨범은 미국과 유럽, 일본에서 발매되고, 비둘기우유는 중국 투어까지 다녀왔지만,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느 편이 더 의미 있는지 따져보는 건 편벽한 자의 소행으로 치부된다. 규모와 효용만 중시하는 것이 좋지 않은 조짐이라는 사실은 가습기를 꺼내기 귀찮아 대신 걸어둔 젖은 수건을 걸고 맹세할 수 있다.

단 한 편의 영화로 프로야구의 관중동원 신기록인 600만을 곧잘 상회하는 한국영화의 속사정은 그리 밝지 않다. 프랑스와 극장 관객수는 비슷하지만 몇 편의 흥행작으로 쏠림현상이 심한 한국에선 대다수 종사자들의 가난한 살림살이는 그대로다. 김연아의 여신강림이 우리와 우리 아이에게 더 많은 아이스링크와 피겨스케이팅의 기회를 허락하지 않은 것처럼, 기획사와 월드스타의 성공은 음악의 다양화와 다수의 창작여건 개선과 무관하다. 근저에 있는 아이돌 열풍의 역학과 함께 미디어의 속성도 한몫한다. 지난 만우절에 폴 매카트니 사망설에 대한 가짜 기사를 가명으로 쓴 적이 있다. 순식간에 사실인양 인용한 기사들이 인터넷에 쏟아져 나왔다. 자극적인 이슈를 증폭시키는 미디어의 도미노 효과를 확인해본 실험이었다. 이런 과정의 결과인 시선과 취향의 쏠림이 대중의 자연스러운 요구란 주장은 언뜻 권위의 파괴처럼 보이지만, 실은 시장논리의 정당화와 획일성의 가속화에 협조하는 셈이다.

또한 영향력 편중은 다른 분야의 질적 수준에도 영향을 준다. 말이 OST지 홍보를 위한 연예기획사와 영화제작사의 협업물인 삽입곡이 많다. 원래 영화와 별개인 삽입곡은 많지만, <뉴욕스토리>와 '프로콜 하룸'의 <A Whiter Shade of Pale>, <중경삼림>과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g>처럼 환상의 조합은 가능하다. 그런데 한국영화 <무적자>의 삽입곡으로 발표된 신혜성의 신곡은 가요라는 잣대로는 무난한 분위기와 편곡의 정석에 충실한 발라드지만 OST의 관점에선 사정이 다르다. 멜로드라마의 삽입곡으로 쓰여도, 다른 장르의 영화음악으로 쓰여도, 색깔이 다른 캐릭터의 테마송이라 해도 전혀 상관이 없다면? 과연 이와 같은 방식이 장기적으로 생명력 있는 상품가치의 산출에 효율적일까?

이런 구조에서 어리고 잘생긴, 그러나 연기는 가장 어색한 주연배우들이 등장하는 TV드라마가 줄을 이었고, 당연시된다. 얼굴(표정)로 노래하는 가수, 무술과 무용을 구분하지 못하는 춤꾼이 브라운관을 장악했고, 당연시된다. 그들은 아티스트로 수용되지 않고 캐릭터로 소비되었다. 뮤직비디오에서 음악이 영상을 위한 배경음악(BGM)이 되었듯이 말이다. 시장의 기획이 가수를 늘 돋보이게 해주지도 않는다. 15세에 데뷔한 아이유(IU)가 방송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커버곡들을 불러 화제가 된 일이 있다. 자기 앨범에 실린 곡들보다 다른 곡들을 부르니 더 돋보였다. 가능성은 있으나 시야가 좁은 가수가 기획사에 의탁하고 시장친화적인 음악성과 활동방식을 따르는 관성이 오히려 자질 발휘를 제한한 것이다. 둘의 결합이 시너지가 아니라 마이너스가 된 예는 많다. 심지어 인디밴드의 개념도 모르고 인디밴드라 소개한 '씨엔블루'의 밴드마케팅은 표절의혹까지 겹치자 더 큰 조소를 불러왔다.

산업화 시대에 중산층을 동경하는 노동자·부랑자 '리틀 트럼프'로 분하여 무수한 명작을 탄생시킨 찰리 채플린의 작품들은 좌파코미디로 불렸다. 그와 쌍벽을 이룬 버스터 키튼은 테크니션이자 스턴트에 일가견이 있는 배우·감독이었다. 늘 소외당한 약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주성치를 채플린의 후예로 꼽는다면, 성룡은 키튼의 후예쯤 되겠다. 그런데 1927년 <재즈싱어>와 함께 시작된 토키(Talkie), 즉 유성영화 시대가 오자 둘의 운명이 갈린다. 독립시스템을 통해 제 고집을 지킬 수 있었던 사람은 더 성공했고, 시대의 변화에 맞춰야 한다는 제작사의 지시를 따라야 했던 사람은 몰락했다. 전자가 채플린이고, 후자가 키튼이다.

성공 여부를 떠나 남이 입으라는 옷만 입을 때의 공허와 상처받은 자기존중감이 한 인간을 괴롭히기도 한다. 십대의 스타였던 김완선은 그 심경을 2005년에 발표한 <Seventeen>에 담아 들려주었다. 신해철과 이상은이 데뷔할 때의 틀에 머물렀다면 지금처럼 되지 못했다. 특히 이상은은 이소라, 장필순과 함께 롤-모델이 되었고, 자신의 길을 찾기 시작한 박지윤, '티티마' 출신의 소이, 모델로 유명한 장윤주도 자기 목소리를 들어보기 위해 기꺼이 염려와 실패를 감수했다. 이런 예가 많아지고 주목받아야 음악산업도 안정화된다는 말이 '수학의 정석'이나 '성문종합영어'에 실린다 해도 반대하지 않겠다.

음악은 상품이지만 상품만은 아니다

이러한 당연한 생각을 무력화하기 위해 '대중음악은 상품이다'는 강력한 무기가 등장한다. 그렇다. 공짜표로 가는 공연은 집중도가 현저히 떨어지고 중간에 그냥 나오기도 하며, 집에서 공짜로 보는 영화는 극장에서와 달리 앞으로 돌려보곤 하는 걸 보면 대가의 지불 여부에 따라 사람의 마음까지 달라진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치면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를 물끄러미 지켜보는 것이다. 음악이 상품이라는 규정은 노동(인간)은 상품이라는 말처럼 일면적이다. 상품의 조건, 그러니까 좋은 상품은 많이 팔리며, 많이 팔려야 좋은 음악이란 논법은 사실 시장법칙조차 무시한 것이다. 판매량은 항구성과 만족도, 희소성 등 좋은 상품의 여러 조건들 중 하나일 뿐이다. 비례하기 마련인 투입 대비 수입이 주류와 비주류의 차이일 뿐이다. 인구정책의 변화와 장기기증의 권장에서 보듯이 윤리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기능적인 임시가치를 본질로 오해한 편견이 음악을 압도한다.

그렇다고 상업적인 음악이 나쁜가? 기술적인 공식까지 있는 히트송이 나쁜가? 아니다. 조미료로 범벅된 간식이 주식이 되어 미각을 상실시키는 과잉, 소위 히트곡 작곡가처럼 모든 것을 돈으로 환원하는 미다스의 장애에 대한 선망, 보고 싶은 것을 보기 마련인 사람이 시장의 요구를 내면화한 상황이 문제이다. 재능 있는 음악인이 재물에 집중하면 추해지고, 표절작곡가의 사례처럼 어리석은 자가 재물에 집중하면 더 추해진다. 수용자도 마찬가지다. 블록버스터와 코미디를 좋아하는 관객일수록 보수성향을 보이며 사회성 있는 작품을 꺼린다는 조사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음악이 음악일 수 없는 세상에 던져졌다는 비유기화를 인식해야 비로소 유기화가 시작된다. 벌렸던 손가락을 조금 오므려보면 어차피 팔아야 하는 것과 반드시 많이 팔아야 하는 것은 명백히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대중음악은 태생부터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것은? 반은 맞다. 개념의 형성과 형태의 구성부터 시장의 발달과 걸음을 함께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시한 좀비가 자본의 힘으로 세계화되었고, 우리의 자랑 초코파이도 따지고 보면 해양 제국주의의 선물이다. 하지만 음악에 축복이었던 그만큼 재앙이었고,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과 함께 문제가 발생했다. 시장은 커졌고, 산업은 호화로워졌으며, 콘텐츠의 강조는 증폭되었다. 작다고 할만한 건 오로지 음악(인)의 입지이다. 물론 일각에서 신자유주의와 지구온난화를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내세우는 것처럼 모조리 자본주의 탓으로 돌리는 건 우스꽝스럽다. 인간의 야만성과 폭력성은 그 이전이라고 덜하지 않았다. 문제를 단순화하고 인민을 임의규정 해버릴 때 화가 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지금 가장 큰 문제는? 그리고 원인은? 결국 답은 같아진다.

음악은 자본주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놓여졌을 뿐이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발명 전부터, 음반의 출현 훨씬 전부터 음악은 있어왔다. 자본주의 하의 현상이라고 모두 그 산물은 아니다. 도시가 골목을 만들어냈지만 골목의 가치는 도시의 논리를 벗어난다. 교육도, 지식도, 예술도 도구로 만드는 질서에 동참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쓸모 때문에 쓸모없어졌다. 열 보 양보해도, 경쟁력 타령이 경쟁력의 한계선을 긋고 산업논리가 산업까지 허약하게 만든다. 멀티플렉스가 영화선택권을 보장하리란 순진한 착각은 대중음악계에도 있었다. 지금, 새로운 환경이 창출한 이득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음악과 음악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울타리 밖에도 음악이 있다

의식을 규정하는 말을 쥔 쪽은 자기네 가치를 모두의 가치로 만든다. 그 사이, 인간 내면을 파고드는 시장논리와 감성의 식민지화가 완성된다. 국가와 권위에 의한 통제는 시장의 통제로 넘어왔고, 음악의 위험한 매력을 스스로 소독하도록 만들며, 기관의 검열은 사라졌지만 더 강력한 검열 매커니즘이 작동한다. 전에는 검열 때문에 사랑노래만 불렀다면 이젠 장사 때문에 사랑노래를 부른다. 이문세·이영훈의 노래를 사랑하며 '미스티 블루'의 해산을 애석해하고 있으니 신파의 폄하가 아니다. 그럼에도 수용소 안에 살면서 이러한 지적을 외면하는 것을 음악을 위한 변호라고 착각하면 본의와 다르게 시장의 품으로 달려가 안기고 만다. 대중과 음악 편에 선다면서 대중과 음악을 열심히 떼어놓고 만다. 묘하게도 고답적 예술론에 대한 저항과 상업패권주의로의 투항은 전혀 다른 샘에서 나왔지만 흘러드는 도착점은 같다. 지향과 양상의 모순은 여기에서도 발생한다. 이렇게 검열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울타리 밖을 바라보는 것은 비현실적이란 태도가 비현실적이게 한다. 허무하게도 외국에선 현실이다. '두번째달'은 아일랜드 여행에서 "어디들 가나 흘러나오는 원초적인 음악"과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아들이 함께 연주하는 가족밴드들"에게 문화충격을 받았고, 그들 중 몇이 '바드'로 다시 태어나 음악의 생산과 전달의 모든 과정에서 주체가 되는 법을 고민하며 "길 위의 작은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렇게 시스템의 울타리에 걸터 앉아보려 시도했다. 이번에 [Huckleberry Finn Live]를 발표한 '허클베리 핀'은 부당한 조건을 포함한 기획사의 영입제의를 거부하고 스스로 레이블을 만들고, 스스로 앨범을 제작하고, 스스로 공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스스로 콘서트를 기획했다. 그리고 지금, "소와 바꾼 잭의 콩"은 무럭무럭 자랐다. 이런 이들은 찾아보면 많다. 물론 찾아봐야 많지만.

한편에 남아 있는 반동의 움직임이 어떤 가치와 다른 가능성을 간직할 수 있다. 세계관을 반영하는 지도를 뒤집어보는 모험이 필요하다. 태평양 중심의 지도를, 적도 중심의 지도를 뒤집어보는 것. 새로운 관점과 함께 새로운 개념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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