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5년 전 오늘, 그래 내가 네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2005년 9월 3일, 사무실에 와서 그 관리자들 정말 미워죽겠다고, 주변에 우리 동지들은 왜 내 말을 이리도 들어주지 않느냐고 울분을 토할 때, 나는 네가 또다시 응석을 부리는 줄만 알고 그냥 냉담하게 대하고 말았구나. 다음날 네가 그렇게 떠날줄 알았다면, 그날 밤에 소리지르고 흥분해서 미안하다며 내게 주려고 사온 빵을 그렇게 거절하진 않았을텐데….
그날 밤 늦게 전국비정규연대회의 수련회에 갔다가 다음날 내려오는 차 속에서 네가 목을 매 자결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차라리 수련회 같은걸 포기하고 울산에 있을걸, 네 옆에서 그 고통을 들어주기라도 했다면 이렇게 떠나보내진 않았을텐데 하고 얼마나 나를 원망했는지 모른단다.
네가 떠나고 난 뒤,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 너의 억울한 죽음을 만방에 알리고 너를 이렇게 만든 이들이 응분의 대가를 치르도록 노력했지만, 결국 이 못난 형은 아무 것도 해내지 못했구나. 당시 감옥에 갇혀 있었던 안기호 위원장은 너의 비통한 죽음 소식을 듣고 할 수 있는 일이 곡기를 끊는 것뿐이라 석방 직전까지 단식투쟁을 했었단다. 이번에 대법원 판결 당사자이기도 한 최병승 동지는 폭풍우 속에 고공철탑 농성을 벌였었고 말이다. 그래, 우리 모두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구나.
부당한 현실에 맞서 적지 않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울분을 토하며 힘내라고 격려도 해주었지. 하지만, 부당노동행위 사실관계가 불분명하다는 당시 정규직 노조 집행부의 싸늘한 반응보다 우리 스스로의 초라함에 더욱 몸서리를 쳐야 했단다. 우리 앞에 버티고 서있던 현대차 자본이라는 벽은 너무나 철옹성같아 난공불락처럼 보였지.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스스로의 실력이 그 벽을 넘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하고 부족했단다. 그때마다, 그리고 죽어간 너를 다시 떠올릴 때마다 남몰래 흘려야 했던 눈물….
기혁아. 아니, 우리 가슴에 절대로 잊혀질 수 없는 류기혁 열사!
네가 떠난지 5년이 지나서야 대법원은 노동자들이 주장해왔던 현대차의 사내하청이 명백한 불법파견이며 원청 현대차가 직접고용해야 한다고 판결했고, 그 직후부터 지난 한달여 동안 무려 1500명에 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모여들고 있단다.
참으로 오랜 세월이 지난 일이지만, 그래도 너의 사랑과 추억이 집약되어 있는 현대차비정규직지회 홈페이지(http://hjbtw.jinbo.net) 대문에는, 그 이후 5년 동안 너의 사진을 한번도 내린 적이 없었단다. "우리의 심장이 뛰는 한,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조합 홈페이지 |
그래. 2004~2005년 네 죽음이 있기까지 가열차게 진행되었던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 끝내 패배하고 난 뒤, 우리는 우리의 심장이 뛰고 있는지를 의심해야 했다. 현대차 원하청 자본의 탄압에 조합원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도대체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지를 몰라 헤매이던 시절이었지. 그런데 기나긴 기다림 끝에 대법원 판결이 나고 난 뒤, 우리는 심장이 여전히 뛰고 있음을 발견했다. 새롭게 가입한 조합원들과 함께, 이제 내일이면 울산공장 앞에서 네 비통한 죽음 5년째를 추도하는 행사를 갖는단다. 우리의 심장이 뛰는 한, 네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기혁아.
여전히 현대차 원·하청 자본은 5~6년 전 네게 그랬던 것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단결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단다. 특히 관리자들을 동원하여 각종 회유와 협박을 하며 노조 탈퇴를 유도하는데 그 방법은 5~6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더욱 독랄해졌더구나. 시골에 계신 노부모에게 전화하는 것은 기본이요, 조합원으로 가입한 노동자의 장인에게까지 전화해서 "사위가 탈퇴하도록 설득해달라"는 일도 있었다 한다.
급기야 지난 일요일에는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전주공장의 어느 하청업체 관리자가, 자신의 업체 노동자들이 집단가입한 문제에 앙심을 품고 비정규직지회 대의원의 머리를 맥주병으로 가격하고 식칼로 위협하는 '제2의 식칼테러'가 벌어졌다고 하는구나. 몇 개월 전에는 아산공장에서 업체 관리자들이 어느 여성노동자에게 수 차례 성희롱을 한 사실이 밝혀졌다고 하는구나. '여성' '하청노동자'가 당해야 하는 2중의 설움은, 정말 듣기만 해도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일이지 않니? 혁이가 들었다면 "당장 그 관리자들 공가삐리야죠" 하고 달려갔을 것만 같구나.
하지만 5년 전과 상황이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에 가입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조에 기대거나 사회 여론, 대법원 판결에 기대려 하기보다 스스로의 힘 또는 동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에 더 기대려 한다는 점이란다. 탈퇴를 설득해 달라는 말에 "우리 사위가 하는 일이 옳은 것이라 믿는다"는 장인어른의 답변이 참으로 통쾌하지 않니? 성희롱을 당한 여성 하청노동자는 당당히 노조에 가입하여 그 사실을 밝히고, 오늘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직접 제소를 한다고 하는구나. 그 사실을 밝힘으로 해서 업체 관리자들의 횡포는 오히려 더 흉폭해졌지만 "살아오면서 지금처럼 마음이 편해본 적이 없다"는구나.
그래, 노동조합이 이 사회에 기여한 중요한 역할이 바로 이런 것 아니었더냐? 조합원의 임금과 고용을 지키는 역할 이전에, 그동안 가슴에 묻어두고 살았던 분노와 불만을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활동함으로써 이제 당당히 관리자와 사측을 상대로 내뱉을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 말이다. "비록 해고되고 싸움에도 졌지만, 그래도 내가 불의에 저항하여 싸울 수 있는 당당한 주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노동조합이 너무나 고맙다." "잘릴까봐 말도 못하고 살던 세월, 하지만 이제 노동조합 덕에 관리자 앞에서 꿇지 않고 내 권리를 주장하게 되었다."
기혁아.
그렇단다. 주변에 이 투쟁을 지켜보는 많은 분들이,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조직되는 이유가 대법원 판결에 따른 '정규직화 열망'이라고 말씀들을 많이 하시는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단다. 물론 혁이 너도 알다시피 정규직화를 향한 열망은 사내하청 노동자 대중의 가슴 속에 깊이 자리잡혀있는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이번에 모아지는 열기는 단순히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만은 없다는게 내 생각이란다. 그동안 쌓아왔던 불만과 분노가, 대법원 판결이라는 계기를 통해 모조리 분출되고 있는 것이지.
구형 차종이 단종되고 신차가 출시될 때마다, M/H협상·모듈협상이 있을 때마다 "이번엔 또 누가 잘려야 하나"라며 가슴 졸이던 세월, 바지사장과 관리자들 눈 밖에 날까봐 아무리 부당해도 참아야 했고 잘릴까봐 노조 가입을 망설였던 과거! 바로 그런 것들이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나는 애초부터 정규직이었는데, 왜 지금까지 이렇게 서러운 존재로 대접받았는가" 하는 분노가 모아지고 있는 것이지.
일주일 전에 아산공장에서는 새로 가입한 어느 조합원이 이런 얘기를 하더구나. 어디 이런 심정이 그 조합원만의 얘기이겠느냐?
"대법원 판결을 보면서 정말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번에 성과금 받을 때 사인도 했고, 예전에 조합원들이 투쟁할 때 반대조로 넘어가 (대체인력으로 투입되어) 관리자들과 같이 사내하청지회를 탄압했던 사람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정말 여러분들에게 얼굴을 들기도 미안합니다. 지금도 그때 제가 왜 그랬는지 후회스럽습니다. 하지만 이제 조합원이 된 만큼 앞으로 지회 지침을 철저히 따르겠습니다."
혁아.
물론 아직 해결된 일은 하나도 없단다. 대법원이 판결을 내렸지만 현대차는 불법파견 해소는커녕 노조탈퇴 공작만 일삼고 있고, 6년 전에 자신들이 불법파견을 판정했고 이번에 대법원에서 그 사실을 재확인했건만 '노동부'라고 하는 작자들은 현대차의 명백한 불법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단다. 만약에 우리 노동자들이 '불법파업'을 한다고 나섰다면 법원 판결도 받기 전에 공권력 투입하고 지도부 체포하고 난리를 쳤을텐데 말이다. 아니, 당장 타임오프제 시행 때에는 전국 수백개 사업장에 근로감독관을 상주시켜 가면서까지 법 위반 여부를 감시하던 놈들이 아니더냐.
그렇기 때문에 아직 우리는 혁이 너를 저 세상 사람이라고 떠나보낼 수가 없단다. 편히 눈을 감고 쉬라는 말을 쉬이 할 수가 없구나. 혁이가 참으로 좋아하던 5공장 어느 해고자는 이런 말을 하더구나.
"부당해고 인정받고 정규직화 쟁취해서 체불임금 다 받으면 모조리 1만 원짜리로 바꿔서 그 종이에 일일이 '정몽구 XXX'라고 적은 후에 광화문 네거리에 화~악 뿌려버리고 싶다. 그렇게 해야 가슴에 맺힌 한이, 그리고 기혁이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이라도 풀릴 것 같다."
그래, 우리가 정말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을 때까지, 비록 우리에게 네 뜻은 전하지 못하겠지만 노동자들이 벌이는 투쟁들을 똑똑히 지켜봐주렴. 수천 명의 류기혁이 벌이는 그 투쟁들 말이다.
그리고 약속할게. 이번에는 반드시 해내겠다고 말이다. 네 죽음을 맞이하고 아무 것도 해내지 못했던 5년 전과는 분명히 다르게 행동하겠다고 말이다. 너를 떠올릴 때마다 남몰래 눈물 흘리던 일도 이제는 참아볼게. 그리고 정말로 "우리의 심장이 뛰는 한,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라는 약속을 지켰다고 생각할 때, 참았던 눈물을 모조리 쏟아내겠다고 말이다. 꼭 지켜봐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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